메뉴 건너뛰기

close

▲ 단동에서 바라본 북한의 신의주
ⓒ 박도
북녘 땅을 바라보며

단동은 요동반도 동남쪽 압록강변에 위치한 도시로, 한반도와 중국, 러시아 유럽대륙과 국제철도망이 연결되는 지리적 요충지다. 옛 이름은 안동이었으나 1965년 단동으로 개명하였다.

단동은 중국 최북단 부동항으로, 압록강 하구부의 북한 신의주와 철교로 연결된 개방도시이다. 원래는 작은 마을이었으나 개항이 된 3년 후 일본의 대륙 진출의 문호로서 발전하였다.

오늘의 단동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었다. 단동역 언저리의 번화가를 스케치하고 다시 압록강가로 가서 압록강과 철교를 카메라에 담았다. 오후 4시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압록강가에서 보트를 탔다.

▲ 북한의 '압록강각'
ⓒ 박도
날렵한 일제 혼다 보트는 압록강의 물살을 가르며 압록강 철교 교각 사이를 지나 북한 지역 가까운 곳까지 갔다. 북한의 ‘압록강각’이 빤히 보였고, 곧 이어 낡은 배 위에는 북한 아가씨가 마주 앉아 이편을 바라보았다. 강 언덕 한편에서는 룡천역 폭발사고로 보낸 구호 식량을 하역하느라고 한창이었다.

보트의 머리를 돌리자 북한 공안이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서 있는 뒤에는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라고 새긴 플래카드가 서 있었다. 구호 식량부대를 나르는 궁색한 주민들의 모습을 보자 내 마음이 아팠다.

지난 번 답사 길에 열차에서 만난 조선족은 북한의 가난을 “작은 나라(북한)가 큰 나라(미국)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자니 엄청난 군비가 들기 때문이다”고 했다.

어쨌든 이 문명 세상에 아직도 많은 북한 주민이 먹는 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올 봄, 미국에 가서 보니까 그곳에는 너무 많이 먹어서 비만한 사람이 지천이고, 우리나라도 젊은이들 가운데 비만이 가장 큰 골치인데, 북한은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니 정말 세상 고르지 않다.

▲ 북한 주민들이 배에서 구호용 식량부대를 내리고 있다
ⓒ 박도

▲ 북한 공안이 우리가 탄 보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 박도

보트는 잠깐 새 북한의 위화도 섬에 이르렀다. 이 섬은 다행히 북한지역이라는데, 고려 말 이성계가 왕명을 거역하고 회군했던 역사의 장소다. 오늘의 위화도는 띄엄띄엄 세워진 북한 초소에 경비병이 한가롭게 지키고 있는, 아주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압록강 오른편의 단동과 왼편의 위화도 건물이 무척 대조적이었다. 단동에는 초고층 건물이 쭉쭉 뻗어나고 있는데 견주어, 위화도에는 짓다만 건물이 초라하게 서 있을 뿐이다.

중국은 개방 후 온 나라가 개발 붐으로 온통 야단이다. 그야말로 '호떡집에 불난 양', 가는 곳마다 길을 새로 내거나 넓히며 포장하고 고층 건물을 짓는다고 법석이다.

▲ 고즈넉한 위화도
ⓒ 박도
그런데 내 조국 북녘 땅은 아직도 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 가난, 그러면서도 강대국에게 비굴하지 않는 그 자존심을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

북한을 여러 차례 다녀온 LA에서 만난 동포 홍정자씨는 “지구상 수많은 나라 가운데 북한주민처럼 순수하고 애국적이며 열정적인 백성은 다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워싱턴에서 만난 <상록수> 작가 심훈씨의 아드님 심재호씨도 북한을 수차례 다녀온 바, “북한이 가난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민족 생존권의 문제다. 그 가난을 남녘 동포들이 조용히 조건 없이 해결해 줘야 한다.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며 도와줘서는 안 된다. 말없이 도와주는 것, 그것이 같은 피를 나눈 겨레의 바른 자세다”고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지금은 북한보다 조금은 더 여유가 있는 남쪽 동포들이 형제애로 베풀어야 할 것 같다. 지난 번 룡천역 폭발사고가 났을 때, 초등학생들까지 성금을 보내는 것을 보고 세상 참 많이 변한 것을 느꼈다. 그 언젠가 통일이 이루어지는 날, 그때 너는 가난한 형제를 위하여 뭘 했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까?

▲ 하늘로 치솟은 단동의 고층건물
ⓒ 박도

통화로 가는 길

보트에서 내린 후 공원으로 단장한 강가 산책길을 오르내리면서 이국의 풍물을 살폈다. 유람나온 유치원 아이들,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는 노인들이 많았다.

‘압록강 단교’라는 곳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자 6·25 전쟁 때 부서진 다리를 그대로 두고서 역사의 현장으로 관람시키고 있었다. 철교의 역사와 1950년 한국전쟁 때 미 전투기들의 폭격장면, 그리고 그때의 장난감 같은 고사포들이 진열돼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남았다. 강 언저리 냉면집에 가서 점심을 먹은 후 찻집에 들어가자 위성으로 서울의 TV 방송이 나왔다. 압록강변에서 서울방송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오후 4시 중국 공안이 빈관 로비로 왔다. 그런데 영사는 오지 않았다. 용천에 보내는 물품 하역 현장 일이 늦게 끝나고 길이 막혀서 약속시간보다 늦겠다고 전화가 왔다.

▲ 중국인들이 강변 공원에서 놀이를 하고 있다
ⓒ 박도
16:40, 구세주 박인규 심양부총영사가 나타났다. 그는 인상도 매너도 좋았다. 시간 늦은 것을 정중히 사죄한 후, 우리의 사정을 경청한 뒤 곧장 공안에게 우리의 신변 보증을 서줬다.

그러자 공안은 여권을 모두 돌려주면서 중국을 떠날 때까지 앞으로는 관광만 하라고 했다. 그는 우리 일행이 빌린 차번호를 적어가면서 우리가 가는 곳을 꼬치꼬치 물은 다음, 그 지역에 우리의 거동을 주시하라고 통보하겠다고 했다.

공안이 떠난 후 박 영사는 최근의 고구려사 문제로 한중 외교상의 미묘한 관계를 설명하면서 때가 좋지 않다고 매사 조심하라고 신신 당부를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야 없지 않은가. 독립운동도 어려웠지만 그 유적답사도 매번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선조들과 견줄 수야 있으랴.

이래저래 오후 6시가 넘었다. 애초 여정은 점심 식사 후 곧장 단동을 출발하여 통화로 이동하면서 조상들이 걸어서, 또는 마차로 다녔던 그 길을 그대로 밟기로 했다.

통화에서 매화구에 사는 조선족 향토 사학자 이국성씨를 만나 그분의 안내를 받기로 예약됐는데, 뜻하지 않는 일로 차질을 빚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쉽게 끝난 것도 다행이었다. 선뜻 신원 보증을 해 준 박 부영사에게 이 글로나마 감사 드린다.

박 부영사가 떠난 후, 이국성씨에게 전화를 하자 이미 통화에 와서 빈관을 잡아놓고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기사에게 밤길이지만 괜찮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도 좋다고 했다.

▲ 압록강 단교 현장
ⓒ 박도
18:30, 우리 일행은 서둘러 저녁밥을 먹고 단동을 출발했다. 단동을 떠날 때는 해가 서편 하늘에 있었지만 점차 땅거미가 지고 어두워갔다.

통화로 가는 길은 단동과 멀어질수록 노폭도 좁아지고 포장 상태도 좋지 않았다. 환한 대낮에 이 길을 쉬엄쉬엄 달리며 조상의 발자취를 더듬고자 했던 애초의 계획은 빗나가고 말았다.

단동에서 통화까지는 300킬로미터가 넘는 먼 길이었다. 지도에는 그 길이 붉은 색으로 표시돼 있어 포장된 좋은 길로 알았으나 곳곳이 비포장에다가 산길 들길로 노폭이 좁아 승용차가 속력을 낼 수 없었다.

한밤 중인데다가 가로등도 없고 이정표도 눈에 별로 띄지 않아서 아주 힘든 길이었다. 그래도 진수영(38) 기사는 생글생글 웃으며 야무지게 차를 몰았다.

가는 도중의 관전, 환인은 독립운동사에 자주 나오는 지명으로 항일유적지다. 표지판만이라도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세상만사란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로 포장이 망가진 덜커덕거리는 길을 달리면서 그때 괴나리봇짐을 지고 걷거나 마차 타고 먼지 뒤집어쓰고 다녔을 조상들을 생각하니까 이나마 승용차를 타고 가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길을 열흘씩 보름씩 걸려 마차를 타고 생면부지의 만주 땅을 달렸을 그때 그분들의 고초는 얼마나 심했을까?

일제의 종이 될 수 없어 고향의 집과 논밭 다 버리고, 낯설고 물선 이국 땅에 망명도생하면서 후손을 위해 독립의 씨앗을 뿌렸던 민족지도자들의 그 높은 뜻을 오늘의 우리가 어찌 헤아리겠는가.

▲ 가까이서 본 압록강 철교
ⓒ 박도

▲ 통화로 가는 길
ⓒ 박도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