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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과 비리를 우리 국민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옳은 말이다. 사실이 그렇고, 또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말 앞에서 참으로 곤혹스럽다. 우선 이 말을 서청원 한나라당 대표가 했다는 사실이 나는 곤혹스럽다못해 슬프기까지 하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을 지지했노라고 큰소리치는 내 동창 친구들이 서청원 대표의 그 말을 복창하며 '지당하신 말씀'이라고 재삼 재사 읊조리는 데는 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친구들에게 물었다.
너희가 어제를 아느냐고. 어제의 한나라당을 기억하느냐고.

그들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라고.

그래서 내가 또 물었다.
너희가 과거에도 그런 국민 정신을 지녔느냐고. 민정당이 민자당으로, 민자당이 신한국당으로, 신한국당이 한나라당으로 탈바가지를 바꿔 쓰면서 나라를 물 말아 막고 분탕질할 때도 '부정과 비리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국민 정신을 세웠느냐고.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라고? 그래서 너희들의 눈에는 오늘만 보인다는 말이냐? 수십 년간 이 나라를 지배해 온 수구 기득권 세력의 부정과 비리에 비하면 오늘의 그것은 '새발의 피'에 불과한데, 너희들의 눈에는 그저 오늘의 그것만 보이고, 오로지 그것만이 전부라는 말이냐? 어제의 분탕질은 전혀 보이지도 않고, 지나간 어제의 일이니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냐?

친구들은 지지 않고 대답했다.
김대중 정권이 국민에게 안겨 준 실망과 상처가 너무 크다고.

옳은 말이다. 나 역시 김대중 정권으로부터 많은 실망과 상처를 받았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은 더욱 크게 증폭되고 말았다. 그러나 내게는 안타까움과 연민도 있다. 지역당의 한계를 안고 소수 정권으로 출범한 민주당 정권의 지난 5년간의 온갖 고초들을 생각하면 연민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공동 정권으로 출발했던 자민련의 이반과 김종필의 몽니,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의 끊임없는 앙탈, '조중동' 족벌 언론들을 비롯한 수구 세력과 사이비 지식인들의 집요한 물어뜯기, 여기에 남북 관계를 압박하는 미국 부시 정권의 수구적 태도까지 가세하여 민주당 정권은 그야말로 험로를 눈물겹게 헤쳐온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대중 대통령이 이룩한 남북 관계의 일대 물꼬는 우리 역사에 참으로 빛나는 금자탑이 될 것이다. 모든 부분에 걸쳐 활발한 '이행'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김 대통령의 통일 노력과 업적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의 그런 업적조차도 아들들의 비리 문제에, 이회창 총재의 부패 정권 심판 주장에, 월드컵 축구 열기에 완전히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6·13 지방선거의 한나라당 압승으로 나타났다. 그 바람에 '6·15 남북 공동선언' 2주기도 국민들에게 별다른 기억과 감회를 안겨 주지 못하고 슬그머니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친구들에게 물었다.
부패 정권을 심판해서 좋으냐고.
친구들은 국민의 본때를 보여 주어서 기분 좋다고 했다.
나는 또 물었다.
대통령 아들들의 비리와 게이트라 불리는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부패 정권으로 몰아붙이고 단정을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느냐고.
친구들은 도리질을 했다.

나는 이미 패자가 된 처지였지만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그럼 김 대통령 아들들의 거액 수수와 이회창 총재 아들들의 병역 기피를 비교 관점으로 보면 어느 쪽의 비리가 더 크겠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우리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라면 이회창 총재는 두 아들을 군에 보내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통령 후보가 될 수조차 없을 텐데,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친구들은 이회창 총재 아들들의 병역 기피 문제는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했다.

나는 친구들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했다.
우리가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잘못하는 정권에 대한 국민적 심판은 꼭 필요하지만,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형국이라든가, 사돈 남 말하는 뻔뻔스러운 짓은 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노라고.

동창 친구들과의 설전에서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고 집에 돌아온 나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늘의 사안에만 집착하는 친구들의 단순성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라고 한 말을 떠올리는 심사가 얄궂기 한량없었다. 어제는 어제라…. 그럼 어제 일도 잘 알고 있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을 터였다. 그들은 어제에 대한 망각증과 무지를 그렇게 호도하고 있는 것이 거의 분명했다.

나는 잠시 내 청년 시절을 떠올렸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 시절을 살아오고 전두환의 5공 폭압 정권 시절을 겪어오면서 나는 4, 50대들의 진부 고루함이 참으로 증오스러웠다. 특히 50대들의 비루함이란…! 아버지가 속한 세대임에도, 나는 50대 이상의 세대들이 빨리빨리 사라져야 나라꼴이 제대로 될 거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내가 막상 50대가 되고 보니, 50대는 여전히 보편적으로 진부 고루하고 한심스럽다.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은 50대들 속에서 같은 50대로 세상을 살아가자니 외롭고 서글프기 한량없다.

잠들면서 나는 얄궂은 의문들을 떠올렸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세월이 흘러 50대가 되면 그들은 어떤 모습일까? 예나 지금이나 훗날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아무 책임감 없이 다수가 선거에 불참하며 그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젊은 세대들, 그들이 훗날에도 역시 50대의 다수를 이를 텐데….

그런 쓸데없는 의문들을 뇌리에 처박은 채로 나는 잠이 들었다. 그런 의문들이 내 뇌수에 악영향을 끼쳤는지,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니 머리가 욱신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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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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