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두봉에서 바라본 제주공항 활주로
윤태옥
제주항 여객터미널 건너편에는 주정공장 옛터가 있다. 학살 전에 집단으로 수용하던 시설이었다. 제주항국제여객터미널 동쪽의 별도봉 바닷가에는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이 있다. 1949년 1월 젊은이 수십 명을 학살하고 마을을 전부 불태웠다. 나머지 주민들은 주변마을로 이주해야 했다. 곤을동은 사람과 집 모두가 사라져버렸다. 지금 그곳을 걸어보면 얕은 담장들이 집터였던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역사를 모르고 가면 걷기에 참 좋은 꽤나 고즈넉한 바닷가이거늘...
제주농업학교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일제가 패망한 그해 9월 10일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오대진) 결성식이 이곳에서 열렸다. 미군이 9월 28일 제주의 일본군으로부터 항복을 접수한 것도, 미59군정중대 본부도 이곳이었다. 4.3이 발발하면서 9연대, 11연대, 2연대가 교대로 주둔했다. 도내 유지들과 지식인, 자수자와 체포자들이 잡혀와 고문과 취조를 당한 후 처형되거나 이곳을 거쳐 육지의 형무소로 끌려가기도 했다. 제주농업학교는 도남오거리 일대에 있었다.
제주 시내에는 서문사거리와 동문시장을 잇는 대로변에 관덕정이 있고, 그 안쪽으로 제주북초등학교가 있다. 4.3의 시발점이라고 하는 1947년 3.1절 기념식은 북국민학교에 열렸다.
제주4.3에서 군인과 경찰, 서북청년단 등에서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가 있었다. 4.3특별법에 의해 확정된 희생자는 2020년 현재 총 1만4532명, 이 가운데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는 1500여 명, 16%다.
국가 현충시설로 관리되는 제주의 십여 곳의 충혼묘에서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제주시충혼묘(노형동 산19-2)는 입구에 박진경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 1948년 5월 부임한 그는 6주 동안 4천여 명을 체포할 정도로 강경 일변도였다. 박진경은 무자비한 토벌에 불만을 가진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남원 서귀포 조천의 충혼묘에서 서북청년단 애국단 민보단의 묘나 추모비를 볼 수 있다.
무장대 자체의 흔적은 거의 없다. 마지막까지 무장대를 이끌던 이덕구는 1949년 6월 경찰과 교전 중에 사망했다. 그는 가족묘(제주시 회천동 672)에 묻혀 있다. 현의합장묘에서 멀지 않은 송령이골에도 무장대의 무덤(의귀리 1974-3)도 있다.
▲남원 충혼묘
윤태옥
▲서귀포 충혼묘 경찰 충혼비
윤태옥
이렇게 제주도를 일주했다. 이것 이외에도 많은 흔적이 있다. 더 자세한 것은 제주4.3연구소 등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제주를 떠나 여수로 건너갈 시점이다.
착잡한 마음으로 되새겨 본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그때는 그랬으나 앞으로는 절대로 그러지 않아야 할 것"을 이야기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 그리고 생각이 다른 사람을 죽여 없애면 그 생각 전체가 없어질 것이라는 대단한 착각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제주4.3은 그 시작이다. 4.3은 여수와 순천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한 전체로, 북진하면서는 수복지까지 확산돼 갔다.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아야 할 역사다.
[필자 알림]
2020년 이후 계속해온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답사여행 – 휴전선(강화·교동~강원·고성)>을 오마이뉴스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휴전선 답사여행 9차(10.20~25)에 동반하고자 하는 독자는 다음 링크의 공지를 찬찬히 읽어본 뒤에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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