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 10. 평양. 유엔군 차량이 평양에 입성하고 있다. 선도차에는 태극기과 성조기가 달려 있다.
NARA
한편 평양 점령을 전후로 유엔군 내부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맥아더는 10월 17일 정주-영원-함흥이었던 기존의 유엔군의 북진 한계선(맥아더선)을 선천-구성-풍산-성진(신맥아더선)으로 북상시켰다. 서쪽은 30킬로미터, 동해에서는 160킬로미터 북상시켰다.
유엔군의 평양 다음 목표는 청천강 선이었다. 국군 6사단이 미8군의 선봉으로 10월 21일 청천강의 개천으로 진출했다. 개천에서는 인민군 수송열차를 공격해 전차 8대 등 상당량의 군수품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거뒀다. 23일에는 압록강에서 27킬로미터 떨어진 희천까지 진출했고, 전차 20대를 싣고 있는 화차를 노획했다.
6사단 7연대의 2, 3대대는 기습효과 극대화를 위해 전 병력을 차량에 탑승시켰다. 7연대는 선봉부대라는 자긍심으로 사기도 높았다. 8사단은 산악지역을 통과해 덕천을 점령하고, 평양-덕천 철도를 확보했다. 10월 23일 국군 1사단도 안주에 집결해 청천강을 건널 준비를 했다.
유엔군 북진 한계선을 북상시켰던 맥아더는 10월 24일 중국 국경선까지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이 기존의 미국 정부의 9.27훈령에 부합하는지 논란이 있었으나 맥아더는 한국군만으로는 인민군을 격멸할 수 없다는 전술적 필요성을 이유로 밀어붙였다. 미24사단은 신의주로, 국군 1사단은 수풍댐으로, 국군 6사단은 희천-온정리-초산으로, 8사단은 희천-강계 축선에서 만포진 중강진을 향해, 압록강을 향해 진격했다.
북한에게 선제공격을 당해 낙동강까지 크게 밀렸으나 이제 미군 참전으로 강력하게 반격해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는 순간이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그러나 10월 25일 국군 1사단은 창산장시에 다다를 무렵 전례 없는 강력한 저항에 부닥쳤다.
적군은 북한 인민군이 아니라 중국군으로 식별됐다. 이때 한국전쟁 최초의 중국군 포로를 붙잡았다. 포로를 심문한 결과 전방에 2만 병력이 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1사단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미1기병사단으로 교대했으나 1기병사단 역시 철벽에 막힌 듯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낙동강 전선 돌파 이후 가장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 것이다.
신의주를 목표로 진격하려던 미24사단의 영국군 27여단은 26일 공중지원에 힘입어 대령강 도하에 성공하고 30일에는 정주를 점령한 다음에 미21연대와 교대했다. 21연대는 11월 1일 신의주 33킬로미터까지 진출했다. 이제 국경까지 하루면 진격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돌연 진격을 멈추고 종심방어 태세를 갖추라는 뜻밖의 명령이 내려왔다. 이날 미1군단은 압록강 지척에서 후퇴하기로 하고 일제히 철수했다. 김일성의 권력 심장부가 있던 강계를 향하던 8사단도 26일 오후 2시 공격을 중지하라는 긴급명령을 받았다.
국군 6사단 역시 중국군과 격전을 치르고 있었다. 6사단 7연대는 다른 연대들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고장으로 우회해 초산에 도착했다. 7연대1대대의 첨병소대는 10월 26일 오후 2시 15분경 압록강에 도착했다. 이 글의 도입부에서 소개한 그 사진이 재현하려고 했던 그 순간이다.
그러나 같은 시간에 6사단 2연대는 중국군에게 고전 중이었다. 19연대까지 투입했으나 진격이 아니라 전 병력에게 철수명령을 내렸다. 압록강에 다다랐던 7연대는 압록강 강물을 수통에 담기는 했으나 그 대가는 몹시 컸다. 과도한 진격으로 결국 퇴로를 차단당한 것이다.
상황이 이러했으나 미8군 사령부와 유엔군 사령부는 이들이 정규 중국군이 아니고 중국군에서 차출한 조선인 병사들을 인민군에 보강한 것으로 분석했다. 최초 정보의 실패는 이후 정보의 실패를 누적시키고 있었고 재앙이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강변에 도달한 감격, 그 참혹한 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