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0월 26일 압록강 초산에 도달한 국군 6사단 7연대 한 병사가 압록강 물에 수통을 담고 있다.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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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마저 헛발질... 잘못된 판단이 한국에 불러온 거대한 재앙 https://omn.kr/28t23
다시 그 초산의 압록강 사진으로 돌아가 보자. 이 사진이 재현하려고 했던 승리의 감격과 통일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진의 이면에는, 아니 사진의 목전에는 승리가 아닌 패퇴가, 희망이 아닌 절망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이 사진에는 "적군의 매복에 걸린 것도 모른 채 대통령에게 바친다고 강물을 수통에 담느라...'라는 사진설명을 붙일 수도 있다. 현장에서 사진을 촬영한 사진병이 퇴각하는 도중에 중국군에게 포로가 됐다는 사실이 당시의 급박한 전황을 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 순간 7연대뿐 아니라 6사단 전체가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은 수통으로 북위 40.8도의 압록강 수면을 터치만 하고는 38도도 아니고 37도까지 줄달음으로 후퇴를 한 셈이다. 1.4후퇴라는, 역전했다가 재역전을 당하면서 이 나라 이 땅은 전쟁이 발발할 때보다도 훨씬 위중하고 끔찍한 지옥판이 벌어졌다. 그 지옥의 전조가 이 사진의 뒷면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참전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의 작은 섬 웨이크섬에서 트루먼과 맥아더가 면담했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전황에 대해 낙관론을 폈고, 미군은 추수감사절(11월 23일)을 일본에서 즐길 것이라고 공언했다, 중국군에 대해서는 이미 시기를 놓쳐 개입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는 이틀 뒤에 정주-영원-함흥이었던 기존의 유엔군 북진 한계선, 소위 맥아더선을 선천-구성-풍산-성진, 곧 신맥아더선으로 북상시켰다.
평양 점령 후에 유엔군 사령부는 낙관 일색이었다. 한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미2사단의 유럽 재배치를 계획하고, 미국에서는 극동으로 보낼 보충병을 취소하겠다고 극동군 사령부에 통보했다. 미8군 사령관 워커는 한국으로 반입될 탄약을 일본 보급창으로 돌리라고 요청했다. 장병들 역시 추수감사절을 일본에서 보낼 것이라는 기대에 들떠 있었다. 청천강 건너 잔적 소탕만 하면 전쟁이 끝날 것으로 모두 낙관한 것이다.
맥아더는 북진 한계선을 신맥아더선으로 밀어올린 일주일 후인 10월 24일 그 북진 한계선도 무시하고 전병력에게 중국 국경까지 최대 속도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다만 국경선 쪽으로는 한국군을 앞세우도록 했다. 이에 따라 미8군은 미24사단의 영국군 27여단을 신의주로, 국군 1사단은 수풍호로 진격하도록 했다. 우전방에서는 국군 6사단을 초산과 벽동으로, 8사단을 만포진과 중강진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이때 동부에서는 원산상륙작전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수도사단이 동북으로 진격했다.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에서부터 마치 경주대회를 하듯 빠른 속도로 북상할 때 중국은 이미 긴장감 속에 대비책을 강구해 왔다. 중국은 애초에 북한 김일성의 무력 통일에 유보적이었다. 국내문제가 산적한 신생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일성이 중국과 소련을 오가며 설득하자 결국 전면전 남침에 동의했다.
북한이 전면전을 일으키고 미국이 즉시 미7함대를 대만해협에 급파하자 중국은 자신들에 대한 위협이 다가오는 것으로 인식했다. 미국이 지상군을 본격적으로 투입하자 7월 15일 동북변방군을 편성하고 25만 병력을 동북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중국은 남한과 북한이란 인접국가의 상황에 일찌감치 군사적인 대비를 해온 것이다. 동북변방군은 8월 초 압록강에 접하는 안둥(지금의 단둥)과 지안, 퉁화와, 선양 인근의 번시 톄링 카이위안 등지에 집결했다.
중국군 총참모부는 한국전쟁을 분석하며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북한에게 이에 대비하라고 두 차례나 권고했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한 다음에는 미국이 한중 국경과 중국으로 전쟁을 확대하려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미국에 경고를 연발했다.
10월 1일 동아시아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맥아더는 북한에게 방송으로 항복을 권유했고, 국군은 38선을 돌파했다. 북한의 긴급지원 요청서는 스탈린의 책상에 도착했고, 김일성은 주북한 중국대사에게 파병을 요청했고, 박헌영은 베이징으로 급히 날아갔다.
마오쩌둥은 10월 2일 참전을 기정사실화하고 사령관에 펑더화이를 선임했다. 10월 8일 동북변방군을 중국인민지원군으로 개칭하고 김일성에게 중국군의 출병을 통보했다. 중국은 10월 19일과 26일 두 차례에 걸쳐 18개 사단 20만 병력을 신의주 삭주 만포 세 곳에서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중국군은 유엔군의 북진이 예상보다 빠르게 전개되자 작전을 변경했다. 서부지역에서는 청천강 북쪽의 산악지대에 3개 군단을 집중시켰다. 적유령 산맥 따라 정주-박천-군우리의 북쪽 20킬로미터 선에 전투배치를 완료했다.
크리스마스의 참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