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19 18:18최종 업데이트 24.04.19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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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0월 16일 일요일, 강원도 양구군 동면 임당리의 임당인민학교에서는 양구 일대에서 처음 보는 이색적인 이벤트가 벌어졌다.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교정에 모여들었다. 소년단 담당 선생의 지도 아래 초·중등 소년단원들이 학교 강당을 열고 청소를 했다. 강당의 입구에서 연단까지 하얀 광목으로 카펫을 깔고 꽃장식도 했다. 광목 카펫 양쪽으로는 축하객들이 앉을 의자도 놓았다. 읍내의 축하객을 학교까지 운송하는 낡은 일본산 토요타 미니밴이 몇 차례 오고 갔다.

오전 11시 신랑 신부를 태운 미니밴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강당 앞에 정차했다. 신랑은 검은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신부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차에서 내렸다. 서양식 결혼 예복으로 치장한 신랑 신부를 가까이서는 처음 보는 마을 사람들 모두 열광했다. 


목에 붉은 스카프를 두르고 도열한 소년단원들이 축가를 부르는 가운데 신랑 신부가 입장했다. 사모관대와 족두리만 보아오던 강원도 산골 사람들에게 대단한 화제가 됐다. 이색적이고 번듯한 서양식 혼례를 구경한 것이다. 신부는 임당인민학교 교사인 정병란이었고, 신랑은 임당중학교의 러시아어 교사인 정학진이었다. 

신혼부부에게 찾아온 전쟁의 비극
 
정병란과 정학진의 신혼집이 있었던 강원 양구 지석리 괸돌마을윤태옥
 
신랑은 일제강점기에 소련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양구에서 운수사업을 하기로 했다. 미니밴 두 대로 시작했다. 신부는 양구의 부잣집 딸이었다. 아버지가 배려해 경성으로 나가 진명여고를 졸업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신부는 인민학교 교사가 됐다. 정학진은 처음에는 영어 교사로 차출되다시피 했다. 북한이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을 시행하자 교사 인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학 경력을 고려해 러시아어 교사가 됐다. 

신부 신랑 모두 양구에서는 보기 드문 인텔리였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눈길이 오갔다. 학교 뒷산이 두 사람에게는 사랑의 공원이었다. 둘의 교제 사실은 오래지 않아 공원을 나와 교정을 지나 동네로 흘러들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됐다. 그즈음 신부의 남동생이 아버지에게 소문이 사실이라고 고해바쳤다. 남동생의 밀고 후 두 사람의 사랑은 혼례로 훌쩍 넘어갔다. 손만 잡아도 아이가 생긴다는 시절의 시골이었다.

임당중학교 교장의 주례로 결혼식은 성대하게 진행됐다. 예식 후의 피로연은 학교 앞 장거리에 있는 신부 아버지의 상점을 중심으로 풍성하게 치러졌다. 신혼집은 신부의 본가인 지석리 괸돌 마을에 마련했다. 이듬해 봄까지 신혼인 그들은 지석리에서 출발해 덕곡천을 건너 임당리 학교까지 함께 출퇴근했다. 하얀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있는 신부 선생님을, 인민복 차림의 신랑 선생님은 자신의 자전거 뒷자리에 앉히곤 했다. 이듬해 봄 신부는 이미 홀몸이 아니었다.

그러나 산과 들에 꽃이 피어나는 봄이 다가왔을 때 신혼의 애틋한 속삭임은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전쟁은 남한뿐 아니라 북한도 송두리째 흔들었다. 신랑이 인민군의 러시아어 통역장교로 차출된 것이다. 입대 3개월 후에 터진 한국전쟁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운명을 어둡게 만들었다.

양구는 애초에 38선 이북의 인민공화국 지역이라 당장에 전장이 되지는 않았지만 전쟁을 터뜨리기 직전에 38선 인접 지역에서는 일부 북피(北避)를 하게 했다. 신부 선생님은 임신한 몸으로 학생들과 함께 북쪽으로 피란을 떠났다. 전선은 빠른 속도로 남쪽으로 전개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으로 피란했던 학교는 임당리로 돌아왔다. 

인천상륙작전을 반환점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1950년 10월 양구 임당리는 국군이 북진해서 지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군이 개입했고 12월부터 유엔군은 다시 남으로 후퇴했다. 신부의 친가 일족들은 좀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남쪽, 춘천으로 피란을 떠나기로 했다. 신부의 가족들은 신부에게도 함께 가자고 강권했다. 그러나 신부는 전쟁 중에 길이 어긋나면 신랑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며 임당리에 남겠다고 고집했다. 

전선으로 나갔던 신랑은 서울의 인민군 사령부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그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궤멸하자 부대를 이탈해 신부가 있을 양구의 집으로 향했다. 신랑은 춘천을 지날 무렵 양구지역 피란민들이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곳에 자신의 부인과 처가 식구들이 있었던 것이다.

신부는 북으로 떠났고 신랑은 세상을 떠났다
     
1951년 초 어느 날 밤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천전국민학교 수용소에 한 젊은이가 몰래 들어왔다. 얼마 후 운동장 한쪽에 세워진 수용소 천막 안에서 작은 동요가 일었다. 신랑이 처가 가족을 찾아낸 것이었다. 신부 아버지는 사위가 살아 돌아왔다며 신랑을 부둥켜안았다. 사위의 신분은 인민군 통역장교였지만 행색은 초췌할 대로 초췌해진 패잔병이었다. 신랑은 가족을 찾았다고 안도했으나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신부는 신랑을 기다리며 고향에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신랑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양구를 향해 떠나기로 했다.

그러나 잠을 청하려는 순간 천막의 출입문이 거칠게 열리며 치안대원들이 들이닥쳤다. 누군가 신고했고 인민군 장교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처가 가족들은 모두 경악했다. 신고하면 포상을 받고, 주저하다가는 의심을 받다가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시대였다.  

신랑이 검속된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새벽, 천전리의 수용소는 별안간 분주해졌다. 중국군의 공세로 인해 피란민을 경기도 마석으로 이동시킨다는 것이었다. 피란민들은 기차를 타기 위해 짐 보따리를 들고 춘천역을 향해 걸었다. 출렁이는 전선이 떠미는 대로 떠밀리는 세상이었다.
 
강원 양구 두타면 금강산 가는 길윤태옥
 
먼동이 틀 무렵 피란민들은 소양강변에 이르렀다. 그때 수십 발의 총소리가 우두벌(지금의 춘천시 우두동) 쪽에서 울려왔다. 갑작스런 총소리에 모두들 의아해했다. 얼마 후에 비통한 소식이 전해졌다. 전세가 긴박하다는 이유로 검속에 걸린 부역자들 모두가 여우고개 근처에서 총살됐다는 것이다. 신부의 아버지는 오열했다. 그러다가 사위의 시신만이라도 수습하겠다고 여우고개 쪽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가족들은 아버지를 극구 만류하며 침통하게 소양교를 남으로 건넜다.

전선은 1951년 6월 유엔군이 또다시 북으로 밀고 올라갔다. 이런 혼돈 속에 신부는 학교에 남았던 사람들과 함께 북쪽으로 진짜 피란을 떠났다. 그렇게 전쟁 속에 신혼부부는 이리저리 길이 갈렸고 생사조차 갈리고 말았다.

어느덧 전면전의 총소리가 멈춘 지 70여 년. 신부 아버지는 물론 오열하는 아버지를 부여잡고 소양교를 건너던 큰아들도 고인이 됐다. 전쟁 속에서 사랑하는 남편을 기다리며, 아니 사랑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가느다란 기대를 품고 북으로 피란을 떠난 신부의 행적은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확인할 길은 없다. 그의 일생도 고향을 박탈당한 채 어디론가 흘러갔을 것이다.

자유를 찾아 월남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이 들었다. 휴전선 지역을 답사하면서 사랑을 기다리다 북으로 피란을 간, 낯선 이야기를 들었다. 정병란 선생은 두 사람의 결혼은 전쟁에 깔리고 사랑은 총살을 당해 저세상으로 날아갔다는 것을 알기는 했을까. 아니면 이도 저도 포기하고 그냥저냥 살아갔을까.

한국전쟁과 피란

한국전쟁은 적어도 한국이란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의 삶을 들쑤셨다. 센 불로 끓어오르는 솥단지를 큰 주걱으로 몇 번이나 뒤집고 뒤집은 꼴이다. 원치 않는 수많은 죽음은 물론이요, 원치 않는 이산과 이주에서 뒤죽박죽이 된 일상까지, 깨지고 흩어진 가족 등등 일일이 헤아릴 수 없다. 

대표적인 것이 피란이다. 피난(避難)이란 말도 쓰지만 한국전쟁에는 피란(避亂)이란 말이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이 글에서는 피란으로 쓰고 있다. 피난은 재난을 피해 옮겨 가는 것이고, 피란은 난리를 피해 옮겨 가는 것이다. 재난은 뜻밖의 재앙과 고난이란 뜻이고 난리는 전쟁이나 병란, 분쟁 등 인위적인 상황이니 한국전쟁에서는 피란이 아니겠는가. 

피란은 징집, 전선, 북진, 남하와 같이 전투행위와는 약간 다르다. 전쟁의 위험을 회피하려고 거주지를 잠시 떠나 있거나 아예 이주하는 것이다. 내가 어려서부터 성인이 된 이후는 물론 지금까지도 한국전쟁의 강렬한 한 장면은 피란민의 물결이다. 그것은 방향성이 뚜렷해서 '남으로 남으로'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인식됐었다. 

장년의 나이에 한국전쟁의 현장을 답사하면서 피란이 남으로만은 아니란, 어쩌면 뻔한 사실을 뒤늦게 살짝 인지하게 됐다. 숫자는 적지만 북으로 가는 피란도 있었다. 정병란의 피란은 두 번 모두 북으로였다. 이 나라에서 북으로라는 말은 대단히 위험하고 부정적이다. 월북이 아니라 납북이라고 주장을 해도 쉽게 피해 가지 못하는 족쇄였다. 북으로 갔으니 남에서의 족쇄를 차지는 않았겠지만.
 
이은영
 
북으로 가는 피란은 양구와 같은 수복지구의 고난 가득한 위상과 관련이 깊다. 수복지구는 38선 이북이었으나 한국전쟁 후에는 휴전선 이남이 된 지역이다. 경기도의 연천과 강원도의 철원(화천), 양구, 인제, 고성, 양양(속초)이 수복지구에 속한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다. 38선 이남이었으나 전쟁 후에는 휴전선 이북이 돼 버린 황해도의 옹진과 연백, 경기도의 개성 개풍 장단 일대가 그렇다. 북한에서는 신해방지구라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보면 실지(失地)다.

수복지구의 현대사 경험은 38선 이남 지역과는 상당히 다르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이 지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현지에서는 보통 인공기라고 부른다)이 됐다. 이 시기에 토지개혁과 친일청산을 비롯한 북한의 인민민주주의혁명을 경험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재산을 포기하고 가족과 헤어지면서 월남했다. 

인공기가 무르익어서 한국전쟁이 터졌다. 인민군이 38선으로 남하하는 것을 불안하게 바라보긴 했지만 수복지구가 개전 직후에 당장 전장이 된 것은 아니었다. 마을 게시판에 부착된 지도에서 인민군을 표시하는 빨간 표지가 빠르게 남하하는 것을 지켜보는 정도였다. 38선에 가까운 지역에서는 인민학교 등을 북쪽으로 이동시키기도 했다. 정병란의 경우가 그랬다. 이때는 피란보다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임시조치 정도였다.

역사에 톱질당한 상처

하지만 개전 초기에는 생각지도 못한 양상으로 세상이 뒤집어졌다. 인민군이 남진하는데도 수없이 북으로 향하는 미군 폭격기가 던져주던 불안감 그대로였다. 국군의 연전연패로 시작한 전쟁은 미군이 참전하고도 낙동강까지 밀려갔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미군이 증강되고 유엔군으로 확대되더니 인천상륙작전으로 반환점으로 찍었다.

급기야 개전 4개월 만인 1950년 10월 국군이 북진하며 이 지역을 점령했다. 전쟁 전에 월남했거나 월남하지 않고 숨죽이고 있던 반북한 반공 세력들이 치안과 행정을 장악했다. 토지개혁으로 재산을 빼앗겼던 것에 대해 보복이 벌어졌다. 인공기의 권력과 그 주변 사람들은 상당수가 북으로 도주하거나 피란했다. 

난세는 수복지구에서 세상이 한 번 뒤집힌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자 중국군이 참전했다. 중국군의 공격을 받은 유엔군은 장진호의 패전에서 시작해 전체 전선에서 속절없이 후퇴를 거듭했다. 수복지구는 다시 인공기로 돌아갔다. 이 지역에서도 남으로의 피란이 물결쳤다. 북에서 돌아온 인민공화국 권력은 또 한 번의 살벌한 보복을 벌였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끝이 아니었다. 전투력을 회복한 유엔군이 다시 북진해 1951년 6월 수복지구 일대를 점령했다. 

일제청산과 토지개혁으로 광범위하고 상처 깊은 칼부림이 일었다.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보복의 칼부림이 일었다. 1.4후퇴로 보복을 보복하는 칼부림이 또 휩쓸었다. 그리고도 유엔군이 북상해 또 한번의 칼부림이 일었다. 수복지구에서는 칼질이 아니라 톱질이었다.

유엔군의 재점령 이후 휴전협상이 운위됐지만 이 지역에서는 지리한 고지전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 지역은 유엔군이 점령하고도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과는 달리 대한민국의 온전한 영토가 아니었다. 유엔은 대한민국의 영토를 38선 이남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38선 이북의 점령지는 국제법상 유엔군의 교전지역이었을 뿐이다. 유엔군 사령관이, 실제로는 미군의 지휘를 받아 국군이 시행하는 군정지역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정상적인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주권 바깥이었다. 
 
강원 양구군 동면 피의능선 전투전적비윤태옥
 
전면전으로서의 한국전쟁은 종전으로 끝났다. 수복지구는 여전히 대한민국이 아니라 유엔군 사령관의 군정 지역이었다. 1954년 11월 17일이 되어서야 유엔군은 대한민국에게 '사실상의 행정권'을 이양했다. 이 날짜로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이 시행됐지만 유엔군 사령관의 군사적 관할권은 그대로였기 때문에 사실상의 행정권이라고 한다. 수복지구법은 1962년이 되어서야 대체입법으로 폐지됐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완전한 끝은 아니었다. 한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이었다는 족쇄가 채워졌다. 불신과 차별의 대상이었다. 고시에 합격하고도 신원조회에서 탈락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지역주민들은 자신들이 인민공화국의 인민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민임을 끊임없이, 그것도 적극적으로 증명해야 했다.

오래도록 모든 선거에서 여당의 후보가 당선된 것은 수복지구의 비극에서 비롯됐다고 현지인들은 종종 이야기한다. 지금도 수복지구의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특히 구술을 통해 자료를 수집하는 학자들은 당혹스런 상황에 부닥치곤 한단다. 구술을 채록하는데 구술 자체를 기피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종전을 한 지 70년이 지났어도 전쟁에, 아니 역사에 톱질 당한 상처가 그만큼 깊고 깊은 것이다. 

※ 정병란 임당인민학교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임당국민학교를 21회로 졸업했다. 정병란 선생의 이야기는 지난 10일 양구군의원 나선거구 재선거에서 당선된 정창수 전 양구군의회 의장이 임당초등학교 개교 100주년을 맞아 100년사를 편찬하면서 직접 발굴한 것이다. 그는 당시 양구 사람들의 기억을 모아 이 이야기를 되살려 100년사에 실었다. 정창수님은 내가 일행들과 양구 지역을 답사할 때 몇 번씩이나 현장에 나와 안내해주고 지역에서 발굴된 여러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정창수님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하다는 말씀을 다시 한번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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