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란과 정학진의 신혼집이 있었던 강원 양구 지석리 괸돌마을
윤태옥
신랑은 일제강점기에 소련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양구에서 운수사업을 하기로 했다. 미니밴 두 대로 시작했다. 신부는 양구의 부잣집 딸이었다. 아버지가 배려해 경성으로 나가 진명여고를 졸업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신부는 인민학교 교사가 됐다. 정학진은 처음에는 영어 교사로 차출되다시피 했다. 북한이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을 시행하자 교사 인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학 경력을 고려해 러시아어 교사가 됐다.
신부 신랑 모두 양구에서는 보기 드문 인텔리였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눈길이 오갔다. 학교 뒷산이 두 사람에게는 사랑의 공원이었다. 둘의 교제 사실은 오래지 않아 공원을 나와 교정을 지나 동네로 흘러들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게 됐다. 그즈음 신부의 남동생이 아버지에게 소문이 사실이라고 고해바쳤다. 남동생의 밀고 후 두 사람의 사랑은 혼례로 훌쩍 넘어갔다. 손만 잡아도 아이가 생긴다는 시절의 시골이었다.
임당중학교 교장의 주례로 결혼식은 성대하게 진행됐다. 예식 후의 피로연은 학교 앞 장거리에 있는 신부 아버지의 상점을 중심으로 풍성하게 치러졌다. 신혼집은 신부의 본가인 지석리 괸돌 마을에 마련했다. 이듬해 봄까지 신혼인 그들은 지석리에서 출발해 덕곡천을 건너 임당리 학교까지 함께 출퇴근했다. 하얀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있는 신부 선생님을, 인민복 차림의 신랑 선생님은 자신의 자전거 뒷자리에 앉히곤 했다. 이듬해 봄 신부는 이미 홀몸이 아니었다.
그러나 산과 들에 꽃이 피어나는 봄이 다가왔을 때 신혼의 애틋한 속삭임은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전쟁은 남한뿐 아니라 북한도 송두리째 흔들었다. 신랑이 인민군의 러시아어 통역장교로 차출된 것이다. 입대 3개월 후에 터진 한국전쟁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운명을 어둡게 만들었다.
양구는 애초에 38선 이북의 인민공화국 지역이라 당장에 전장이 되지는 않았지만 전쟁을 터뜨리기 직전에 38선 인접 지역에서는 일부 북피(北避)를 하게 했다. 신부 선생님은 임신한 몸으로 학생들과 함께 북쪽으로 피란을 떠났다. 전선은 빠른 속도로 남쪽으로 전개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으로 피란했던 학교는 임당리로 돌아왔다.
인천상륙작전을 반환점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1950년 10월 양구 임당리는 국군이 북진해서 지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군이 개입했고 12월부터 유엔군은 다시 남으로 후퇴했다. 신부의 친가 일족들은 좀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남쪽, 춘천으로 피란을 떠나기로 했다. 신부의 가족들은 신부에게도 함께 가자고 강권했다. 그러나 신부는 전쟁 중에 길이 어긋나면 신랑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며 임당리에 남겠다고 고집했다.
전선으로 나갔던 신랑은 서울의 인민군 사령부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그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궤멸하자 부대를 이탈해 신부가 있을 양구의 집으로 향했다. 신랑은 춘천을 지날 무렵 양구지역 피란민들이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곳에 자신의 부인과 처가 식구들이 있었던 것이다.
신부는 북으로 떠났고 신랑은 세상을 떠났다
1951년 초 어느 날 밤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천전국민학교 수용소에 한 젊은이가 몰래 들어왔다. 얼마 후 운동장 한쪽에 세워진 수용소 천막 안에서 작은 동요가 일었다. 신랑이 처가 가족을 찾아낸 것이었다. 신부 아버지는 사위가 살아 돌아왔다며 신랑을 부둥켜안았다. 사위의 신분은 인민군 통역장교였지만 행색은 초췌할 대로 초췌해진 패잔병이었다. 신랑은 가족을 찾았다고 안도했으나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신부는 신랑을 기다리며 고향에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신랑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양구를 향해 떠나기로 했다.
그러나 잠을 청하려는 순간 천막의 출입문이 거칠게 열리며 치안대원들이 들이닥쳤다. 누군가 신고했고 인민군 장교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처가 가족들은 모두 경악했다. 신고하면 포상을 받고, 주저하다가는 의심을 받다가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시대였다.
신랑이 검속된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새벽, 천전리의 수용소는 별안간 분주해졌다. 중국군의 공세로 인해 피란민을 경기도 마석으로 이동시킨다는 것이었다. 피란민들은 기차를 타기 위해 짐 보따리를 들고 춘천역을 향해 걸었다. 출렁이는 전선이 떠미는 대로 떠밀리는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