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23 05:25최종 업데이트 23.07.08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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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여행하면 제주4.3의 흔적 하나쯤은 스치게 된다. 그만큼 유적이 많고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나는 그날에 맞춰 제주를 여러 차례 여행했다.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과 4.3의 아린 역사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당혹스럽지만 익숙하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제주4.3을 가장 낯설게 마주친 것은 제주가 아닌 다른 섬, 바로 타이완이었다.

코로나19로 국경이 닫히기 직전인 2019년 11월 나는 타이베이의 2.28기념관을 찾아갔다. 지하철 출구로 나와 기념관 건물이 보이는 순간, 입구의 큼직한 야외 조형물이 내 망막에 충격적으로 꽂혀버렸다. 4.3 JEJU! 타이완의 2.28사건을 찾아왔는데 제주4.3이라니! 2.28사건(2.28대도살사건, 2.28기의라고도 한다)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찾아간 길이지만 그곳에서 제주4.3을 마주칠 줄이야.
 

타이베이 2.28기념관 ⓒ 윤태옥

 

타이베이 2.28기념관 ⓒ 윤태옥

 
2.28 전시관을 둘러보고 마지막에 찾아간 제주4.3 특별전시관은 '아름답고 슬픈 섬'(島嶼的美麗與悲傷)이란 짧고도 강렬한 어구로 시작했다. 답사여행을 준비하면서 타이완의 지인에게 추천받아 읽었던 책 <대만, 아름다운 섬 슬픈 역사>(주완요 지음)와 같은 제목이었다.

제주4.3은 1947년 3월 1일 기마경찰에 의해 한 아이가 다친 사고로, 2.28사건은 그 이틀 전인 2월 27일 타이베이 전매국 단속반원이 노점상 여성을 폭행한 사건으로 시작됐다. 사태의 결말은 참혹했다. 제주에선 2만5천 명에서 3만 명이, 타이완에서는 2만8천 명이 죽었다. 서로 다른 두 섬에서 너무 유사한 일이 평행선을 그렸던 것이다.

해방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는 항복했고 제주도는 35년 동안의 일제 식민지 시대가 끝났다. 조선은 해방과 독립이라 착각했지만 미국과 소련에게 분할 점령됐다. 미군은 9월 28일 제주도에 들어와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켰고 미군 제59군정중대가 제주도청에서 군정을 시작했다.


같은 날, 타이완도 50년 동안의 일제 식민지배는 끝났고 곧이어 중화민국의 국민당 군대가 진주했다. 50년 동안 접촉하지 못했던 '낯선 조국' 중화민국에 귀속됐다. 푸젠성 성장이던 천이(陳義)가 타이완 행정장관으로 임명됐다. 타이완은 다른 성과는 달리 행정장관이 입법 사법 행정의 전권을 독점하고 주둔군 사령관까지 겸직했다. 군정과 다를 바 없었다. 중화민국은 타이완 사람들을 일제의 노예였던 이등공민 정도로 간주한 것이었을까.

식량

제주도나 타이완이나 기존체제의 심장이 정지되자 크고 작은 문제가 연이어 발등에 떨어졌다. 당장 식량이 부족했다. 제주도는 1946년 보리마저 흉작이었고 한쪽에서는 굶어죽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 위에 미군정은 미곡수집령까지 내렸다. 공출이라면 경기를 일으키던 일제강점기가 되살아난 듯했다.

타이완도 태평양전쟁 동안 식량생산이 이미 대폭 줄어 있었다. 천이 행정장관은 타이완에 전매국과 무역국을 설치해 경제를 독점했다. 장뇌, 성냥, 담배, 술, 도량형 등을 전매, 곧 정부의 독점으로 묶었고, 타이완 전역의 운수를 통제하며 무역과 공업도 독점했다. 정부의 독점과 작은 마찰이라도 일어나면 민간부분을 가혹하게 단속했다. 게다가 해방 이후 1년여 만에 물가가 자그마치 100배나 올랐다.

귀향

제주도에는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을 포함해 6만여 청장년들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타이완에도 일본군에 끌려갔던 젊은이 10만여 명 돌아왔다. 두 섬 모두 쌀독은 비어있었고 변변한 일자리도 없었다.

외지인

미군정은 조선총독부의 관리와 경찰을 행정조직으로 재생시켰다. 친일은 반공으로 옷을 갈아입고 곤봉을 휘두르며 거리를 활보했다. 1947년에는 서북청년단이 대거 제주도로 몰려들었다. 외지에서 건너온 군경과 서북청년단의 횡포는 제주 사람들을 부글부글 끓게 했다.

타이완도 그랬다. 인사부터 차별이 극심했다. 타이완의 고위직 21명 가운데 단 한 명, 중간관리 316명 가운데 겨우 17명만이 타이완 사람이었다.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은 타이완 사람과 같은 업무를 해도 월급을 두 배로 받아갔다. 국민당 군대는 조직폭력배와 다를 바 없었다. 걸핏하면 권총을 꺼내들었고 강탈, 공갈, 협박, 겁탈이 횡행했다.

반공은 전가의 보도이자 조자룡의 헌 칼이었다. 언제든 어디서든 누구든 공산당 딱지를 붙이고는 끌고 가서 고문을 가했다. 관리들은 술집과 도박장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검찰관이나 법원장과 같은 고위직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완 사람들은 이들을 '도시의 호랑이'(市虎)라며 공포에 떨었고, "개(일제)가 떠나자 돼지(국민당)가 왔다"며 탄식하고 분노했다.

아름다운 섬 제주와 타이완이 일제의 지배에서는 해방됐지만 백성들에게는 아름다운 생활이 오지 않았다.
 

성산 터진목의 학살터 표지와 일출봉 ⓒ 윤태옥

 

가요슝의 2.28 조형물과 전시관 ⓒ 윤태옥

  
촉발

1947년 3.1절 기념식과 시위가 이어지는 와중에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이가 밟혔다. 구경꾼들이 항의하며 쫓아가다가 느닷없는 총성에 쓰러졌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를 포함해 여섯 명이, 그것도 등에 총을 맞아 죽었다.

제주에서 3.1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 타이완 전매국 단속반원이 담배 노점상 여성 한 사람을 폭행했다. 구경꾼들이 강하게 항의하자 총을 쏘았고 한 사람이 죽고 말았다. 제주도나 타이완이나 경찰과 공무원의 인명사고를 해결하라고 시위를 하면서 그동안 쌓인 분노가 불붙었다. 섬 전체로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갔다.
         
악화

1947년 3월 10일 제주는 총파업을 했다. 공무원은 물론 미군정청 통역단이나 현직 경찰관도 파업에 동참했으나 열흘 정도 지속되고는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파업 후 한 달 만에 제주 사람 5백여 명이 잡혀갔다. 육지에서 증파된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은 빨갱이를 소탕한다며 많은 사람들을 끌어다가 고문을 가했다. 민심은 더 흉흉해졌다.

타이완에서도 시위는 급속히 확대됐다. 파업은 물론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상인들의 철시 속에 타이베이 시민들은 전매국과 경찰서를 비롯한 관공서에 몰려가 거세게 항의했다. 천이 행정장관은 계엄을 선포하고 곳곳에 군경을 투입했다. 양측의 무력충돌이 발생했다.

고문

1948년 3월 제주의 조천지서와 모슬포지서에 끌려갔던 두 청년이 고문치사를 당했다. 한림에서는 초주검이 돼 끌려가던 청년이 총살을 당하는 사건도 터졌다. 세 곳의 주민과 학생들이 장례를 치르고 분노의 시위를 벌였다. 미군정이 사건을 감찰했지만 유해진 제주지사는 유임됐다. 1948년 5.10 남한 단독선거를 밀어붙이던 미군정은 유해진이 필요했을 것이다.

봉기

제주의 남로당은 탄압이 강해질수록 강경하게 저항했다. 결국 1948년 4월 3일, 350여 명의 남로당 무장대가 봉기를 일으켰다. 경찰서와 우익인사들을 공격해 경찰관 넷과 민간인 여덟 명 그리고 무장대 둘이 사망했다. 미군정과 국방경비대와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대대적으로 진압에 나섰다.

타이베이 사람들은 전매국에 불을 지르고 일부는 군의 무기고를 열어 무장을 했다. 이들의 시위는 방송을 타고 타이완 전역에 신속하게 알려졌다. 시위와 저항은 순식간에 타이완 전체로 번져갔다.

협상

제주의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중령)은 미군정의 실정이 원인이라고 판단하고 4월 28일 무장대와 협상을 해서 전투를 중지키로 합의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협상을 허락하지 않았다. 5월 1일 우익 청년들이 오라리 마을을 불 지르고 이를 남로당 무장대의 소행이라고 발표하고는 강경토벌에 나섰다. 김익렬은 해임돼 여수로 전임됐다.

타이완에서는 3월 2일 타이베이 시민들이 먼저 2.28사건처리위원회를 조직했다. 천이 행정장관은 사건처리위원회에 관리를 참가시켜 수습방안 협상에 응하기는 했다. 제스처였다. 협상으로 시간을 끌면서 뒤로는 장제스에게 진압군 파병을 긴급 요청했다.

파병

제주도에 육지의 경찰과 군대가 증원되자 죽음이 하늘과 땅과 바다를 새카맣게 덮었다. 제주 경찰은 1947년 초에 330명이었으나 3.1사건을 예상한 듯 충남북 경찰 100명이 이미 '응원경찰'로 제주도에 도착해 있었다.

3.1사건이 터지자 바로 목포 경찰 100명을, 보름 후에 전남북 경찰 222명을 제주도로 출동시켰다. 1948년 4.3이 터지자 전남경찰 100여 명이 급파됐다. 5월에는 수원의 국방경비대 11연대가 제주도에 상륙했다. 서북청년단도 몰려들었다. 12월에는 서북청년단 620명이 경찰, 곧이어 새로 건너온 단원 250명은 군과 경찰로 나누어 채용됐다.

타이완에서는 파병요청 3일 만에 상하이에 주둔하던 21군에서 2개 사단을 파견해 곧바로 타이완 해안에 상륙했다. 도살이 시작됐다.
 

제주4.3 행방불명자 위령비 ⓒ 윤태옥

 

타이베이 2.28기념관 ⓒ 윤태옥

 
학살

제주는 1948년 11월부터 4개월간 해안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지역을 초토화했다.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원동리, 세화리, 토산리, 다랑쉬굴, 조천면의 자수자, 의귀국민학교 수용 주민, 북촌, 동광리, 상창리, 봉개지구 육해공 합동작전... 지명 하나에 오십 내지 수백 명씩 죽어나갔다. 소위 군사재판이란 절차를 통해 사형이 집행된 것도 수백 명이었다. 이와는 별개로 1950년 한국전쟁 직후인 8월에는 제주시, 서귀포, 모슬포 등지에서 예비검속에 걸린 주민이 수백 명씩 학살당했다.

타이완에서는 2개 사단이 상륙하고 5월 16일까지 두 달 동안 타이완 전역을 휩쓸었다. 진압이란 이름의 생지옥이었다. 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비정성시>(悲情城市)다.

방언

제주도 지방어는 외지인들에게 낯설었다. 중국의 지방어는 문자를 공유하긴 해도 말로는 서로 잘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식민지 50년 동안 타이완은 대륙과 접촉이 없었으니 대륙에서 건너온 외성인들의 말은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와 다를 바 없었다. 제주도 토벌대나 타이완 진압군의 말을 즉시 알아듣지 못해 죽은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밀항

제주 사람들은 학살의 광풍이 멈추지 않자 제주도에서 탈출했다. 밀항도 많았다. 생업을 찾아 또는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해방이 되어 돌아온 남의 땅 일본으로 적지 않게 밀항을 했다. 오사카는 제주 사람들에게는 제2의 제주도가 됐다. 훗날 오사카의 제주 출신 재일동포들이 중심이 돼 세운 통국사란 절이 있다. 그 절에는 제주4.3희생자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타이완은 2.28사건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말없이 이민을 갔다. 그것은 생존이고 도피였고 추방이었다.
 

순이삼촌 문학비 ⓒ 윤태옥

 
침묵

타이완이나 제주도나 무참하게 죽은 사람들은 원혼으로 떠돌았고 가족들은 연좌의 사슬에 묶여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현기영이 1979년 소설 <순이삼촌>로 4.3을 건드리자 그의 손톱은 고문에 짓이겨졌다. 40년 동안 완벽하고도 절대적인 침묵을 강요당했다.

계엄령 치하의 타이완도 그랬다. 타이완 사람들은 타이완 자체의 역사를 배울 수도, 타이완 고유의 언어도 말할 수 없었다.

해금

1987년 4.3과 2.28은 비로소 해금됐다. 대한민국은 민주화를 이뤘고 타이완은 계엄령을 해제했다. 공권력에 의한 두 학살 사건은 어렵사리 공론화 과정을 거쳐 진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과

두 나라 국가원수는 자국의 국가폭력을 국민에게 머리 숙여 사죄했다. 지금은 기념관과 유적지 등을 통해 참극의 역사를 후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타이완2.28과 제주4.3은 쌍둥이였다. 망망대해 3천km나 떨어진 두 섬의 비극은 어찌 그리 똑같았을까. 너무도 아름다운 풍광 속에 깊고 깊은 슬픔을 품고 있는 섬이다. 금년 1월에 나는 다시 타이완으로 역사기행을 갔다. 이번엔 가오슝의 2.28기념관을 찾았다. 가오슝이 겪은 참극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21세기에는 제주와 타이완, 거기에 또 하나의 아름답고 슬픈 섬 오키나와가 서로 연대해 교류하고 있다. 이들의 역사를 보면 세 섬으로 둘러싸인 동중국해는 동아시아의 슬픈 내해(內海)로 보인다.

[필자 알림] 
2020년 이후 계속해온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답사여행 – 휴전선(강화·교동~강원·고성)>을 오마이뉴스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휴전선 답사여행 9차(10.20~25)에 동반하고자 하는 독자는 다음 링크의 공지를 찬찬히 읽어본 뒤에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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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타이완 지도 ⓒ 오마이뉴스 박종현

 

집터만 남아 있는 사라진 마을 -곤을동 ⓒ 윤태옥

     

타이베이 2.28기념관 ⓒ 윤태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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