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24 19:28최종 업데이트 23.11.24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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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산 대전지구전적비. ⓒ 윤태옥

 
대전의 보문산은 시내에서 가까운 산으로 1965년 공원으로 개발된 시민들의 휴식처다. 이곳에 한국전쟁 대전전투(1950.7.19~20)의 기억을 담고 있는 시설과 조형물이 많다.

주차장에서 걸어 올라가면 대전지구전승비를 먼저 볼 수 있다. UN이란 알파벳 두 글자가 크게 강조돼 있다. 대전전투는 미8군 24사단과 인민군 3·4사단과의 전투였지만 미군이 편제상 유엔군이었기 때문에 유엔을 강조한 것 같다.


전승비 기단의 동판에는 비장한 추모의 글이 새겨져 있다. 요즘 사람들에겐 살짝 낯선 문체이고 글씨 자체가 시각적으로 잘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전승비 앞에 새로운 안내표지가 설치돼 있다. 추모의 뜻을 담아 당시의 전투상황을 기술하고 이곳에 이전한 경위를 알려주고 있다.

조금 더 가면 보문산공원 중심에 대전지구전적비가 있다. 걸어가다 보면 꽤 가파르고 높은 계단 위의 높은 탑과 그 앞의 장병상이 먼저 눈에 띈다. 방문객은 멀리서부터 고개를 들고 올려보아야 한다. 장병상은 로켓포를 겨누고 있는 사수를 중심으로 탄약수와 소총수와 기수가 한 데 어우러져 있다. 전장의 긴박감을 보여준다.

전적비 후면의 동판에는 한글과 영문으로 새긴 비문과 전사문(戰史文)이 있다. 전사문은 "특히 미 제24사단장인 딘 소장은 부대의 진두에 서서 유엔군을 지휘하다가 북괴군의 전차가 대전시내에 진입해오자 3.5인치 로켓포를 발사하여 북괴군의 전차 1대를 직접 파괴함으로써 떨어졌던 아군의 사기를 드높이기도 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허무하게 무너진 금강 방어선
 

금강 방어선 구축을 위한 금강교 폭파. ⓒ 강성현 제공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왼쪽)과 24단장 딘 소장. ⓒ 강성현 제공


앞의 글에서 살폈지만 미군이 오산 죽미령에서 인민군과의 첫 전투에서 패하면서 방어선은 평택에서 천안으로, 다시 조치원으로 밀렸다. 7월 13일 대구에 지휘소를 차린 미8군사령관 워커는 유엔군의 대규모 지원이 이루어지고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하기 전까지 금강-소백산맥에서 인민군을 저지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미군 24사단을 공주와 대전에 배치하고 25사단은 중부 산악지역인 의성 상주에 배치했다. 방어선을 친 금강은 한강과 낙동강 사이에서 가장 좋은 천혜의 장애물이었다. 24사단은 금강의 모든 교량을 폭파하고 19연대를 대평리(지금의 세종시 대평동), 34연대를 공주의 금강에 배치했다.

인민군은 105전차사단의 전차를 앞세우고 3사단이 대평리를, 4사단이 공주를 공격했다. 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청주에서 대전 방향으로 진출하려던 2사단은 국군의 방어에 막혀 있었다. 그런데 7월 14일 인민군 4사단이 미군 24사단 34연대 후방의 포병대대를 기습하여 초토화시켰다. 34연대는 화력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됐다. 게다가 금강 방어선 서쪽을 방어하던 중대가 본부와의 통신이 두절되자 도하하는 인민군을 빤히 보고도 성급하게 철수해버렸다. 이로써 금강 방어선은 허무하게 뚫리고 말았다.

대평리의 금강도 뚫렸다. 7월 14일 밤 인민군 3사단은 전차의 지원 없이 보병만으로 야간 도하공격을 시작했다. 강안에 제방이 있었고 비도 많이 내려 도강이 쉬운 조건이 아니었다. 미군 21연대는 조명탄으로 전선을 밝히고 공중공격의 지원을 받으면서 방어전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20분 정도 미군의 조명탄이 끊긴 틈에 인민군이 도하에 성공했다.

도하한 인민군은 미군 후방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대대 지휘소를 공격했다. 미군은 보급로를 회복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19연대의 방어선도 하루 만에 붕괴됐다. 인민군이 전차를 동반하지 않은 전투에서도 패한 것이다. 미24사단의 방어선은 순식간에 금강에서 대전 서쪽의 갑천(서구와 유성구를 북류하는 금강의 지류)으로 밀렸다.

이렇게 해서 대전 시내가 전장이 됐다. 24사단장 딘 소장은 34연대를 대전에, 19연대를 영동에, 21연대를 마달령(대전~옥천 사이의 고개)에 배치했다. 그러나 24사단은 몇 차례의 패전 끝에 전투력이 연대 수준에 불과해 딘 소장은 7월 19일 대전에서 철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워커가 1기동사단을 대전 남부에 전개할 때까지 대전을 고수하라고 지시하자 철수를 7월 20일로 늦출 수밖에 없었다.
 

ⓒ 박종현

 
7월 19일 인민군이 대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속속 진지를 포기하고 후퇴했다. 20일 오전에는 유성에서 대전으로 진입하는 통로, 오후에는 논산에서 대전으로 진입하는 공격로가 완전히 열려버렸다.

인민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빠른 속도로 시내에 진입해 미군을 교란시켰다. 딘 소장은 대전시내에서 인민군 전차를 저지하려고 최전선에 나서서 지휘하며 분전했으나 전황은 악화됐다. 이미 대전의 남쪽 금산과 동쪽의 옥천으로 빠지는 도로는 그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민군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었다.

딘 소장은 철수명령을 내렸고 미군은 오후 6시부터 철수했으나 피해는 심각했다. 24사단은 8군 사령관 워커의 명령대로 20일까지 대전에서 버티긴 했으나 사상자가 1천 명이 넘었고 많은 무기와 장비를 잃고 퇴각했다. 24사단은 영동으로 철수했다가 1기동사단에게 전선을 넘기고 왜관으로 이동해 부대를 정비해야 했다.

이미 반격은 생각할 수 없었다. 방어선을 순차적으로 물리면서 대규모 유엔군 투입까지 시간을 버는 지연전이었다. 지연전은 연전연패의 다른 말이었다. 지연 효과를 조금이라도 얻기 위해 장병들의 목숨을 갈아 넣었다. 최악은 사단장인 딘이 실종되었고 결국 인민군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장병들의 목숨 갈아 넣은 지연전... 인민군 포로가 된 사단장
 

천안 방어전을 위해 기관총을 위장 설치하는 미군. ⓒ 강성현 제공

 
다시 보문산으로 돌아가서 대전전투전적비를 마주보면, 대전전투에서 갈아 넣은 수준으로 희생된 수많은 외국 병사들의 죽음에 가슴이 먹먹하기만 하다. 국가끼리, 국가 수반끼리 주고받는 큰 명분과 그들의 실리는 그렇다고 해도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에서 그 젊은 나이에, 그것도 남의 나라 전장에서 죽어갔다니. 이런 죽음 앞에서 추모의 마음은 모든 것에 앞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추모의 마음 한쪽에서는 어색한 것들이 드러나기도 한다. 24사단장 딘이 3.5인치 로켓포를 어깨에 메고 있는 장병상이 그렇다. 딘은 사단장이지만 후방의 안전한 지휘소가 아닌 최전선까지 나서서 작전을 지휘하고 장병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중대장도 대대장도 아니고 1만 병력을 지휘하는 사단장이 로켓포를 직접 멨다고?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지휘했을 뿐 로켓포를 직접 어깨에 메지도 쏘지도 않았다. 딘 소장은 자신의 수기에서 로켓포 사수와 동행해 사격을 지휘했고 분노와 실망과 홧김에 전차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을 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로켓포를 직접 발사했다는 전적비의 비문은 사실과 다르다.

딘 소장의 스토리는 조금 길다. 그는 대전 철수명령을 내리고 자신도 후퇴했다. 그러나 옥천으로 가야 하는데 금산 방향으로 길을 잘못 들어섰다. 지금의 대전시 동구 신흥동의 제2치수교 앞 네거리에서 옥천로를 따라 동남으로 갔어야 하는데, 계족로를 따라 남으로 간 것이다. 사단장이 부대와 연락이 끊겼다. 딘 소장은 8월 25일 실종 36일 만에 전북 진안에서 인민군에게 생포됐다. 다음날 전주교화소(형무소)로 이송되어 예심을 받고 북한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됐다.

딘은 왜 영동의 사단 지휘부가 아니라 대전 시내의 최전선에 있었을까. 국방부가 펴낸 전사는, 딘이 34연대의 사기를 고무하고 국군의 전의를 회복시키며 최전방에서 인민군의 전투방식을 관찰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하고 있다. 최전선에 나선 지휘관으로서 위험을 무릅쓰면서 적극적으로 나선 무장의 면모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대전을 방어하지도 못했고 희생자는 심각하게 많았으며 자신마저 생사를 넘나들다 포로가 되었다. 그의 열성은 뜨거웠지만 자신의 조국과 미군에게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히고 말았다.

실종 이후 그의 생존 소식이 전해진 것은 포로가 된 지 1년 반 가까이 지난 1951년 12월 말이었다. 프랑스 파리의 공산주의 계열의 신문 <스와르>(CE Sior)의 특파원인 월프레드 버체트가 평양에서 딘을 인터뷰해서 보도한 것이다. 그때까지 실종된 것으로 알고 있던 미국과 한국은 깜짝 놀랐다. 딘은 37개월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1953년 9월 4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고 건강검진을 하고는 그 다음날 바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쟁 영웅으로 띄웠는데... 머쓱해진 미군
     

딘 소장을 인터뷰하는 윌프레드 버체트. ⓒ 임재근 제공

 
'딘 사건'은 한국전쟁을 읽어가면서 기억의 전쟁이라는 또 다른 전쟁을 음미하게 한다. 딘이 실종된 다음날인 7월 21일 랄프 바르가손 상병이 로켓포팀을 지휘하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진술이 보도됐다. 딘과 함께 있던 부관 클라크가 7월 23일 영동에 복귀하면서 그의 실종은 확실시됐다.

미군은 두 달을 지나 9월 28일 대전을 수복했다. 그들은 파괴된 채 남아 있는 인민군의 T34전차에 "7월 20일 딘의 지휘 아래 파괴됨"이라고 페인트 글씨를 남겼다. 모두 네 대 가운데 세 대에 이런 글귀를 남겼다. 미군 장병들은 자연스럽게 승리감과 함께 희생된 것이 확실해 보이는 자신들의 지휘관인 딘 소장을 기렸다.

그에 대한 미국 정부의 조치는 포상이었다. 1951년 1월 미국 최상위의 군사훈장인 명예훈장을 수여한 것이다. 딘의 부인이 대신 받았다. 포로일 수 있다는 정보가 없지는 않았지만 훈장을 수여했다. 딘을 영웅화함으로써 패배한 전투지만 승리한 전투로 전환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1951년 12월 그가 포로로 생존해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은 머쓱한 상황이 됐다. 패전 책임이 있는 지휘관이지만 실종이 아닌 전사로 간주한듯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상징화했는데, 포로라는 게 확인된 것이다.

딘 소장에 대한 평가는 두 가지가 혼재할 수 있다. 사령관 워커의 명령에 따라 부하들의 더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 7월 20일까지 대전에서 버텼다. 그러나 자신이 지휘한 24사단은 3개 연대가 연전연패를 했고 그렇게 퇴각하다가 자신은 길을 잃었고, 게다가 적군의 포로가 됐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했거나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 특별히 희생적이어서 국가가 최고 훈장을 줄 만한 군인일까, 아니면 작전실패를 책임져야 할 지휘관인가. 미군 장성이, 그것도 사단장이 포로가 된 것은 이게 유일하다고 알려졌다. 세계 최강이었던 미군으로서는 패전의 치욕 위에 사단장 포로라는 최악의 치욕을 당한 것이다.

미국은 딘이 포로로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도된 후 딘을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데서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딘과 같은 날 명예훈장을 받은 리비 병장과 대비된다. 미군은 임진강에 교량을 새로 건설하고는 리비교라고 명명하고 그 옆에 기념비(리비교 남단의 검문소 안쪽에 있다. 외부에서 볼 수는 있지만 영내라 자유롭게 출입할 수는 없다)도 세웠다. 리비는 후퇴 과정에서 목숨을 걸고 전우를 구해낸 것이 포상의 이유였다.

그러나 포로가 되었다가 생환한 딘에게는 리비와 같은 추가적인 명예는 주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딘을 영웅으로 치켜세웠지만, 포로로 확인된 이후 그의 영웅 서사를 조용히 내린 것은 상식적이다. 딘 자신은 회고록에서 "나무로 만든 훈장이라도 탈 자격이 없다"라고 고백했다. 겸손이 배어있지만 자신에 대한 담담한 평가다. 딘은 자신이 받은 훈장에 대해 적지 않은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승만은 딘 소장이 포로송환으로 귀환하자 그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미국이 딘의 영웅 만들기를 중지했으나 한국은 뒤늦게 영웅 만들기에 나선 셈이다. 포로가 되어 고초를 겪은 동맹국의 장성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그런데 한발 더 나갔다.

'로켓포를 멘 딘 소장' 장병상은 사실 왜곡
     
대전전투 30여 년 후인 1981년 대전에 대전전투 전적비를 세우면서 사단장 딘이 어깨에 로켓포를 메고 있는 일개 사수로 만들었던 것이다. 전적비 비문에는 딘이 3.5인치 로켓포로 적군 전차 1대를 직접 파괴하여 아군의 사기를 드높였다고 기록했다.

적의 전차가 눈앞에 보이는 최전선에서 지휘관인 사단장 딘이 로켓포를 직접 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흠이 될 리는 없다. 문제는 그가 로켓포를 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사단장이 로켓포를 직접 쐈다는 것은 영화의 한 장면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실전에서는 자칫 로켓포 사수까지 하느라 지휘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고 곡해될 여지도 있다.

전장에서의 지휘관이란 전황이 나쁠수록 더 엄중하다. 그런데 작전의 결과가 패전이었을 때 작전에 투입된 장병이 아닌 지휘관을 영웅이라 할 수 있을까. 본인이 전사했으면 경우가 다를 수 있다. 전사자에 대한 추모와 합당한 의례를 부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딘은 패전 뒤에 포로가 되고 말았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극진히 대우한 결과 딘이라는 존재는 본인이든 미국이든 한국이든 더 자랑스러워졌을까. 수사적 과장이나 예술적 표현을 넘어서서 사실의 왜곡이라고 비판을 받으면 애초의 감사의 뜻은 수그러들고 오히려 은연 중에 모욕이 될 수도 있다. 과장이 선을 넘어 왜곡이란 비판을 듣게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과공이 비례가 된 것이다.

전쟁은 당장에 물리력의 충돌이지만 그 후에는 기억의 전쟁이 되어 세상을 뜨겁게 달구기도 한다. 이럴 경우 사실을 왜곡하면 기억을 시도하지 않은 것보다도 못한 일이 될 수 있다. 시장통 사람들도 사석에서 팩트에 어긋나면 신뢰도가 떨어지는데 하물며 국가가 역사를 집단기억으로 형성하려는 공식적인 행위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앞의 글에서 유엔군 '초전'기념관이라는 명칭에 논란이 따라붙으며 추모의 마음에 얕은 스크래치가 생기더니, 이곳 대전 보문산에서는 팩트의 왜곡에 가슴이 답답한 것은, 내가 소심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보문산 대전지구전적비. ⓒ 윤태옥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임재근 박사(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교육연구소장)의 도움을 받았다. 자신의 논문 <한국전쟁기 대전전투에 대한 전쟁기억 재현연구>를 제공해 주었고, 대전형무소 보문산 골령골 등 대전전투의 현지 답사를 안내해주었다. 이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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