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를 만나며 사라는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된다.
코리아픽처스
올해 들어 나는 모범생답지 않은 일탈을 선택했다. 하던 일을 모두 정리하고 백수가 된 것이다. 첫 번째 퇴사, 두 번째 퇴사 모두 그다음을 정해놓았다면 세 번째 퇴사는 달랐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모든 것을 멈췄다.
지난해 심각한 번아웃을 겪으면서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소진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은 곧 나였고 나를 쉴 새 없이 태우며 일했는데 더는 태울 연료가 남아 있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또 다른 씨앗을 뿌리기 전에 황폐해진 땅을 쉬게 하는 것이 먼저였다. 내게 안식년을 선물한 이유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신나게 놀겠다고 선포했지만 처음 3개월은 매일 새벽 6시에 눈을 떴다. 빡빡한 투두 리스트를 하나하나 지워가면서 성취감과 효능감을 느끼며 살아왔는데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니... 여백의 시간이 뭉텅이로 주어지니 오히려 불안했다. 이러다 금세 또 일자리를 알아보게 될 것 같았다.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도록 아침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해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공부를 하고 운전면허를 땄다. 그렇게 3개월을 보내고 나니 그제야 정말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식년을 결심하면서 가장 큰 계획은 '예전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일 해보기'였다. 계속 쓰던 근육이 아니라 거기에 있는 줄도 몰랐던 근육을 써보고 싶었다. 캠핑 가서 남편 도움 없이 혼자 텐트를 쳐보고, 어린이집 사람들과 함께 작은 텃밭을 가꾸고, 초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피아노를 다시 배웠다.
바쁘다는 이유로, 퀄리티 있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전에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일들을 하나씩 해보고 있다. 종종 프리랜서로 일을 하기도 하지만 노는 것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대체로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날들이다.
쉼의 시간을 보내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화가 줄었다는 것이다. 일에 몰입해서 정신없는 일상을 보낼 때는 너무 쉽게 화가 났다. 부정적인 일이 생기면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상황을 탓하고 나를 탓했다. 삶의 변수에 취약했다.
요즘 나는 부정적인 일을 마주하면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기면 안 되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내게도 일어났을 뿐이고, 이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내 안에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영화에서 "왜 도우면 안 되지?"라고 되물을 때 사라의 말투는 경쾌하다. 여유는 유연함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익숙한 질문을 뒤집을 수 있는 유연함은 여유에서 나온다.
사라는 "모든 게 정상인 것처럼 보여야 해"라며 줄리에게 관리인 마르셀을 평소처럼 부르라고 말한다. 정원을 살펴보던 마르셀이 프랭크를 묻은 땅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는 모습을 본 사라는 다시 한번 예전의 사라였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한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공개할 수 없지만 이 장면을 보며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나와 다른 존재를 만나 지금껏 머물던 안온한 세계를 부수고 나오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사랑한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나도 누군가에게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
달라진 건 사라뿐만이 아니다. 줄리는 사라에게 죽은 엄마의 원고를 넘긴다. "이걸 아줌마한테 드리면 엄마가 되살아날 것 같"다며 "만약 아줌마에게 영감이 된다면 훔쳐서 사용"하라고 한다. 사라는 줄리의 이야기를 책으로 낸다. 책 제목은 '스위밍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