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24 05:42최종 업데이트 22.06.24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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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잘하는 나쁜 년'. 

워싱턴 정계 사람들에게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이 어떤 사람인지 묻는다면 아마 이런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슬로운은 씩 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을 것이다. 그녀는 '좋은 년'이 되는 데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슬로운의 목표는 일을 잘하는 것이다. 


워싱턴 최고의 로비스트 슬로운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승리다. 그녀는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뭐든 한다. 치밀한 전략 수립과 실행은 기본이고 비도덕적이거나 위법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함께 일하는 동료도 슬로운에게는 승리를 위한 도구일 뿐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로비판에서 슬로운은 판을 설계하고 뒤흔드는 사람이다. 그녀는 팀원들에게도 모든 패를 보여주지 않는다. 은밀하게 일을 꾸미고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다. 그리고 승리를 거머쥔다. 동료들은 슬로운의 유능함과 지독함에 혀를 내두른다. "얼음이 사람이 되어 슬로운이 되었다"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영화 <미스 슬로운> 시작과 함께 나오는 내레이션은 슬로운이 어떻게 일하는 사람인지 잘 보여준다. 
 
로비의 핵심은 통찰력이에요.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한 후 대책을 강구해야 하죠. 승자는 상대보다 한 발자국 앞서서 회심의 한 방을 상대보다 먼저 날려야 해요. 상대를 놀라게 만들되 상대에겐 놀라선 안 돼요. 

사연 없는 여자
 
미스 슬로운은 여성이 원톱인 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사연 없는 여자'다.(주)메인타이틀 픽쳐스
 
하루 16시간을 일하는 슬로운에게는 일이 곧 삶이다. 슬로운에게는 밥도 잠도 사치다. 매일 저녁 똑같은 식당에서 밥을 사 먹고 오랜 시간 불면증에 시달리며 각성제를 달고 산다. <미스 슬로운>에는 일하는 여성 서사에 흔히 따라다니는 징글징글한 가족도 가슴 설레게 하는 애인도 등장하지 않는다. 가족과는 전혀 교류가 없으며 남자에게 돈을 지급하고 성적 욕구를 채운다.  

슬로운은 왜 이토록 열심히 일하는 걸까? 어린 시절 결핍 따위의 숨겨진 사연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로비스트 일을 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그 능력을 활용해 일을 잘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여성이 원톱인 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사연 없는 여자'다.

승률 100% 로비스트 슬로운에게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는 로비는 하지 않는다는 것. 어느 날 슬로운이 몸담고 있는 대형 로비 회사에 워싱턴 거물 상원의원이자 총기 허용론자인 빌 샌포드가 찾아온다. 샌포드는 슬로운에게 총기 규제를 강화하는 내용의 '히튼-해리스법' 통과를 막아달라고 의뢰한다. 평소 총기 규제를 찬성하는 입장이었던 슬로운은 갈등한다. 

그때 '히튼-해리스법' 찬성 캠페인을 벌이고 있던 작은 로비 회사에서 스카웃 제안을 해온다. 총기 규제법 통과를 위한 로비를 함께 벌이자는 것이다. 자본력이 곧 무기인 로비 전쟁에서 총기 규제 측은 총기 허용 측에 비해 턱없이 적은 예산을 갖고 있다. 그만큼 승리할 확률도 낮다는 뜻이다. 누가 봐도 지는 게임에서 슬로운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이기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새 판을 짜보기로 한다.

새벽 3시, 슬로운은 회의를 소집해 팀원들을 모은다. 그리고 지금 당장 자신은 이 회사를 떠나 경쟁사로 갈 것이며 팀원들 자리도 모두 마련해 놓았으니 함께 갈 사람은 가자고 말한다. 이러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회사를 떠나게 돼서 미안하다는 설명 같은 건 없다. 어차피 그건 진심이 아니니까. 슬로운을 따라가는 팀원과 기존 회사에 남기로 결정한 팀원. 어제까지의 동지는 오늘부터 적이 된다. 

총기 규제가 신념이라는 슬로운에게 사람들은 혹시 아는 사람이 총기 사고로 사망한 거냐고 거듭 묻는다. 그러자 슬로운은 되묻는다. 왜 다들 그렇게 생각하냐고. 개인적인 영향을 받아야만 의견에 힘이 실리게 되는 건 아니라고. 

그럼에도 비극적 사연이 힘이 세다는 것을 똑똑한 슬로운이 모를 리 없다. 슬로운은 오랫동안 총기 규제 캠페인을 해온 팀원 에스미(구구 바샤로)가 고등학교 총기 학살 사건 생존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에스미의 의사와 무관하게 슬로운은 생방송 토론 현장에서 에스미의 과거를 폭로한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분장실에서 울고 있는 에스미에게 다가가 슬로운은 이렇게 말한다. 
 
흥분해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얘기라고 거짓말하진 않을게. 내 임무는 이기는 거고 난 어떤 수단이든 사용할 책임이 있으니까. 이 일로 얻게 될 언론의 관심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직무유기나 다름 없어. 프로의 세계에선 그래. 네 감정도 인생도 중요하지만 내 책임은 아니야.

애매한 나쁜 년
 
슬로운은 일터에서 감정 노동을 하지 않는다. (주)메인타이틀 픽쳐스
 
일을 하면 할수록 일 자체보다 어려운 건 사람들과의 관계였다. 업무 채팅창에서 '네'와 '넵'과 '넹'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부터 일하면서 겪는 모든 것이 감정 노동이었다. 일터에서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서는 일하는 티를 적절히 내면서도 적당히 겸손해야 했고, 팀원들에게 '수고했어요', '감사해요' 코멘트도 놓쳐선 안 됐다. 밝고 긍정적으로 보이기 위해 자주 웃어야 했고, 내 의견을 언제, 어떻게,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동료의 반응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끊임없이 눈치를 보며 살펴야 '일 머리 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감정 노동은 여성들에게 더 많이 요구된다. 웃지 않는 여자 아이돌에게 따라다니는 인성 논란을 떠올려 보라. 감정 노동을 안(못) 하는 남자는 과묵하고 숫기 없다는 소리를 듣지만, 감정 노동을 안(못) 하는 여자는 무뚝뚝하고 싸가지 없다는 비난을 받는다. 여성 리더십에는 꼭 '부드러운 리더십', '포용의 리더십'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여성들이 더 감정 노동을 잘하도록 태어난 것도 아닌데 일터에서도 가정에서도 더 많은 감정 노동을 담당하는 것은 늘 여성이다. 

일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니 관계에 신경을 써야겠지만 때때로 이 모든 노동이 지긋지긋했다. 그럴 때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척하거나 눈 딱 감고 하고 싶은 말을 내지르기도 했다. 그래놓고는 또 '너무 나대는 것 아닐까', '너무 싸가지 없어 보이는 것 아닐까' 눈치를 봤다. 이건 눈치를 보는 것도 아니고 안 보는 것도 아니고 '애매한 나쁜 년'이 된 것 같았다.
 
'차스테인 언니의 충고 : 니가 애매한 나쁜 년이라 마음이 무거운 것이야. 더 나쁜 년이 되도록 하여라.' 

<미스 슬로운>을 보게 된 건 OTT 서비스 '왓챠' 사용자 한 줄 평 때문이었다. 슬로운은 일터에서 불필요한 감정 노동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상대방의 기분을 고려해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다. 웃지 않고 정확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감정 노동에 드는 에너지를 아껴 진짜 일을 하는 데 쏟는다. 

사실 일을 하다 보면 어디까지가 진짜 일이고, 어디까지가 감정 노동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그럴 때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감정의 총량을 생각한다. 일터에서 나이스한 사람,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어 무리해서 감정을 쓴 날에는 집에 돌아와 남편과 아이에게 쓸 에너지, 나를 돌볼 에너지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피곤하고 지쳐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만들었다. 내가 쓸 수 있는 감정과 에너지는 정해져 있는데 너무 많이 당겨써버린 것이다. 나중에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나이스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또다시 애매한 나쁜 년이 됐다. 그런 경험 때문일까. '더 나쁜 년' 슬로운이 미치도록 부러웠다. 

언니라고 불러도 되나요
 
슬로운은 자신의 욕망을 변명하지 않는다. (주)메인타이틀 픽쳐스
 
물론 슬로운은 그녀 자신도 인정하듯 윤리적 결함을 가진 인물이다. 결과를 위해 과정의 올바름을 고려하지 않고 동료를 배신한 슬로운은 나쁜 년이 맞다. 하지만 슬로운은 적어도 자신의 나쁜 짓을 변명하지 않는다. 좋은 사람처럼 보이려 노력하지 않는다. 나는 슬로운의 솔직함이 결과적으로 나쁜 짓을 해놓고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나도 괴로워'라고 말하는 이들의 자기 연민보다 훨씬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슬로운은 적어도 자신의 그릇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유능함과 성취욕에 대해 변명하지 않는 여성 캐릭터"라는 김혜리 평론가의 평처럼 슬로운은 자신의 욕망을 변명하지 않는다. 통찰력 있게 판을 읽고 회유하고 협박하고 배신하고 선을 넘고… 슬로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어깨가 쫙 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로지 승리라는 욕망을 향해 두려움 없이 돌진하고 실력으로 모든 것을 제압해 버리는 여성 캐릭터가 반갑고 멋졌다. 나는 살아보지 못했던, 어쩌면 앞으로도 살기 어려울 삶을 영화 속 주인공을 통해 대신 살아보는 경험이랄까. 미스 슬로운이 미스터 슬로운이었어도 이토록 매력적이었을까. 글쎄. 일 잘하는 나쁜 남자는 지겹게 봐오지 않았나.  

생방송 이후 에스미는 총기 규제 캠페인의 얼굴이 되고 총기 규제 여론도 점차 높아진다. 슬로운은 여성층을 집중 공략해 놀랄 만한 액수의 로비 자금을 얻어낸다. 마음이 급해진 총기 규제 반대 세력, 그러니까 슬로운의 전 직장은 슬로운의 과거 로비 활동을 문제 삼아 의회 청문회를 열기로 한다. 슬로운을 흠집 내 총기 규제법에 타격을 입히려는 전략이다. 모든 언론의 관심이 슬로운에게 쏠린다. 

대형 로비 회사의 사주를 받아 청문회를 개최한 상원의원은 로비스트 한 사람이 지나치게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도 걱정되지만 그 로비스트가 개인적 문제가 있다면 더 큰 문제라면서 슬로운의 일이 아닌 사생활을 들춰내 집중 공격한다. 청문회장에 앉아 있는 슬로운의 모습을 보며 이다혜 작가가 쓴 책 <출근길의 주문>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여자들에게 유독 인성 논란을 비롯한 온갖 '일 바깥'의 논란이 생길까. 경험상으로는 일로 까내리기 어렵지만 까 내리고 싶을 때 쓰는 방법이다." -이다혜, <출근길의 주문> 

청문회장에서도 슬로운은 에둘러가지 않고 자신의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재물 삼아 누구도 예상 못 했던 회심의 한 방을 날린다. 결론만 말하자면 슬로운은 의회도, 전 직장도 아주 제대로 박살 내 버린다. 슬로운을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브런치 https://brunch.co.kr/@hongmilmil 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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