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함께 만들었는데 아이를 책임지는 건 여자들이다.
판씨네마㈜
영화 <로마> 속 남자들은 무책임하고 비겁하다. 가족을 버리고 떠난 4남매의 아빠는 생활비도 보내주지 않은 채 시내에서 애인과 해맑게 웃으며 아이처럼 뛰어다닌다. 임신 소식에 줄행랑을 쳤던 페르민은 뻔뻔한 얼굴로 자신은 이 아이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한다. 그는 요란하게 무술봉을 겨누며 클레오에게 말한다.
너랑 네 배 속의 아이가 처맞고 싶지 않으면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고 나 찾으러 오지도 마. 미친 하녀 같으니.
아이는 함께 만들었는데 아이를 책임지는 건 여자들이다. 클레오가 해고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주인집 사모님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에게 임신 사실을 말하자, 소피아는 클레오의 상황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함께 병원에 가자고 한다.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러 가는 길, 소피아는 남편이 남기고 간 고가의 차를 직접 운전한다. 영화 초반, 소피아의 남편이 능숙한 운전 솜씨로 커다란 차를 집 주차장에 아슬아슬하게 집어넣는 모습이 나온다. 애초 집 크기에 맞지도 않았던 화려한 차는 남편의 허영심을 보여준다. 운전이 익숙지 않은 소피아가 불안한 눈빛으로 차를 몰자, 멋진 차는 여기저기 부딪치고 망가진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집에 돌아오며 주차장에 거칠게 차를 밀어 넣은 소피아는 클레오를 끌어안으며 말한다.
우린 혼자야.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여자들은 늘 혼자야.
소피아는 아픔을 추스르고 가장으로서 집안을 책임지려 한다. 클레오는 무거운 몸으로 네 아이를 사랑으로 돌본다. 중산층 백인 여성과 가난한 멕시코 가정부는 서로에게 기댄다.
생물학적 아버지는 아이를 버렸지만 소피아를 비롯한 주변 여성들은 클레오의 아이를 함께 챙긴다. 클레오와 비슷한 처지에서 일하는 가정부들은 임신한 클레오의 일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 노력한다. 4남매의 할머니는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클레오와 가구점을 찾는다.
아기 침대를 사러 가구점에 간 날, 클레오는 민주화 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에게 총을 겨누는 페르민과 우연히 마주친다. 갑자기 양수가 터져 차 안에서 진통하는 클레오를 위해 할머니는 기도를 해주고 병원까지 함께 가준다.
진료 접수를 위해 간호사가 이것저것 묻지만 할머니는 클레오의 이름 말고는 나이도, 생년월일도, 중간 이름도 알지 못한다. 그저 고용주와 고용인 관계일 뿐인데 할머니가 클레오와 아이를 위해 진심을 다할 수 있었던 건 그녀 역시 누군가의 엄마이기 때문이었을까? 여성으로, 엄마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여성들은 취약한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민다.
나는 그 애를 원치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