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선악을 가르지도, 내 편과 적을 나누지도 않는다.
이십세기폭스코아㈜
겉으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밀드레드는 사실 윌러비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밀드레드가 윌러비를 옹호하는 치과의사의 손톱에 구멍을 내던 날, 윌러비는 밀드레드를 경찰서에 불러 취조한다. 서로 날선 말이 오가다 윌러비가 각혈을 하고 밀드레드 얼굴에 피가 튄다.
윌러비와 밀드레드는 둘 다 놀라서 서로를 바라본다. 윌러비는 밀드레드에게 미안하다며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말하고, 밀드레드는 알고 있다며 사람을 불러오겠다 말한다. 죽어가는 남자와 죽은 딸을 둔 여자. 분노는 사라지고 사람이 사람에게 느낄 수 있는 연민이 두 사람 사이에 퍼진다. 영화는 한 인간이 갖고 있는 여러 얼굴을 다층적으로 보여준다. 선악을 가르지도 내 편과 적을 나누지도 않는다.
윌러비 서장의 죽음 후, 평소 윌러비 서장을 존경했던 후배 경찰 딕슨(샘 록웰)은 허리춤에 곤봉을 차고 경찰서 맞은편 광고 회사로 향한다. 광고판 때문에 윌러비가 죽었으니 광고를 실어준 놈에게 복수하려는 것이다. 구금 중인 흑인을 고문한 전력이 있는 인종차별주의자 딕슨은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다. 딕슨은 광고 담당자 웰비를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창문 밖으로 던져버린다. 딕슨은 해고된다.
얼마 후, 도로를 지나던 밀드레드는 광고판이 불타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밀드레드는 소화기를 들고 광고판을 향해 돌진한다. 밀드레드는 투사, 아니 전사 같다. 불타는 광고판이 마치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밀드레드는 필사적이다(실제로 안젤라는 불에 타서 숯덩이가 된 채 발견되었다). 광고판을 불태운 "개자식"들에게 복수하겠다고 결심한 밀드레드는 깜깜한 밤 경찰서 맞은편 광고 회사로 향한다. 광고 회사에는 아무도 없다.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분노는 분노를, 증오는 증오를,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밀드레드는 경찰서에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경찰서를 향해 화염병을 던진다. 하지만 그 시각, 경찰서에서는 윌러비의 편지를 가지러 경찰서에 들른 딕슨이 이어폰을 낀 채 편지를 읽고 있다. 경찰서는 불바다가 된다.
영국인 감독이 미국에서 촬영한 영화를 보면서 지난 3월 한국 대통령 선거 결과가 떠올랐다. 0.73%p 차이로 당락이 결정된 지난 대선에서 영호남은 말할 것도 없고 여와 남, 2030과 60대 이상의 표심이 선명하게 나뉘었다. 이를 두고 "반으로 갈라진 대한민국"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진보 언론이라 불리는 곳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자괴감을 느낀 순간 중 하나는 좌우 진영 논리를 마주할 때였다. 우리 편은 좋은 놈, 저쪽 편은 나쁜 놈, 진영 논리에는 오직 피아만 존재했다. '이것이 잘못됐다'는 비판에 어김없이 '저쪽이 더 잘못했는데 왜 우리한테만 그러냐'는 반발이 돌아왔다. 반성없는 내로남불이 반복됐다. 표가 되지 않는 소수자들의 목소리는 '거악과의 싸움'이라는 대의에 밀렸고, 거대 양강 구도 속에 다양한 가치를 말하는 소수 정당은 점점 존재감을 잃어갔다.
기자를 그만둔 후 뉴스를 거의 보지 않았다. 이쪽도 싫고 저쪽도 싫었다. 마음 한편에 나 역시 진영 논리를 강화하는 데 일조했을지 모른다는 죄의식을 안고 살았다. 지난 대선 투표 결과를 보면서 한국 사회에 얼마나 분노와 증오가 팽배해 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분노와 증오가 휩쓸고 간 자리에는 냉소와 무관심이 남았다. 이번 6.1 지방 선거에서 절반의 국민은 아예 투표를 하지 않았다.
이쪽과 저쪽으로 나뉜 증오가 커질수록 정파적으로 이득이 되지 않는 이들의 권리는 보장받기 어렵다. 단적인 예가 차별금지법 제정 무산이다. 지난 5월, 2017년 첫 발의 이후 15년 만에 처음으로 차별금지법(평등법)에 대한 국회 공청회가 열렸지만 국민의힘은 아예 참석하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 역시 차별금지법을 신속처리 안건으로 지정해 달라는 시민사회의 요구에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며 46일간 단식 농성을 했던 미류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책임집행위원의 지적이 뼈아프다. 그는 "우리가 목도한 것은 이 땅의 정치의 실패"라면서 "우리의 삶을 불평등과 부정의로부터 변화시킬 능력이 지금의 정치에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증오로는 아무것도 해결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