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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3년 1월 중국 동포 배충용(26)씨는 브로커에게 1500만 원을 주고 한국땅을 밟았다. 어렵게 일자리를 얻어 한국땅에 정착하려던 배씨는 어느날 갑자기 감기 증상에 시달렸다. 그러나 여느 외국인 노동자처럼 배씨 역시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빚 갚기도 빠듯한 일상에서 병원비 지출은 '계획에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증상은 점점 심해졌다. 진통제 없이는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병원을 찾은 배씨에게 폐렴이 폐혈증으로 번져 있다는 의사의 충격적 진단이 내려졌다. 배씨는 진단 8일만에 숨을 거뒀다.

배씨뿐이 아니다. 단순 맹장염을 방치해 복막염으로 죽고, 발바닥에 못이 박히고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 파상풍으로 숨을 거둔 외국인 노동자들이 부지기수다. 자신의 병을 알리게 되면 불법 신분인 자신의 존재까지 노출되는 것이 두려웠고, 무엇보다 만만치 않은 병원비가 이들의 병을 키웠다. 조금만 일찍 환부를 내보이고 하루라도 빨리 병원을 찾았다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은 이런 외국인 노동자들의 한맺힌 죽음행렬 속에서 세워졌다. 현재 병원 이사장으로 있는 김해성 목사는 1500여 명에 이르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장례를 치르면서 병원을 세워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김 목사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병원을 세우지 않으면 평생 한이 맺힐 것 같았다. 내가 죽더라도 외국인 노동자 한 명 살리고 죽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말했다.

▲ 병원을 찾은 외국인 노동자가 의사의 상담을 받고 있다.
ⓒ 전관석
리모델링에서 의약품 지원까지 순수 후원에 의존

김 목사가 뜻을 세우자 각계의 후원이 잇따랐다. 한 건설업체가 가리봉동에 위치한 외국인 쉼터를 리모델링해 지금의 병원 골격을 세웠고 여러 기업에서 의약품, 기자재 등을 내놓았다.

열린치과의사회, 대한의사협회, 서울시의사회, 전공의협의회 소속 전공의들이 선뜻 봉사를 자처했으며 고대구로병원 등 인근 병원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보태주었다. 자원봉사자들도 모여들면서 지난 2004년 7월 21일 29개 병상에 입원실과 수술실, 진료·치료실 등을 갖춘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이 탄생했다.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은 창립 당시 밝혔던 '무료시술' 원칙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에 한해 치료 및 수술을 전액 무료로 해주고 있다. 후원에 의존하는 경영이니만큼 만성적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후원금만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빚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정부 지원도 전혀 없다가 최근에야 지원대상에 포함돼 다소 숨통을 틀 수 있게 됐다.

이선희 행정원장은 "후원금에 전적으로 매달리다 보니 운영이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나라에서 할 일을 민간에서 하고 있는데도 이에 대한 지원이 잘 안 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 서울 가리봉동에 있는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 개원 1년만에 5000여 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무료진료를 받았다
ⓒ 전관석
"마음의 병까지 치유하는 곳... 아멜리아 치료 최선 다할 것"

현재 국내의 외국인 노동자 수는 50만 명으로 추산된다. 개원 이후 1년 동안 이 병원을 찾은 초진환자만 5000여 명이다. 재진 환자 및 수술 환자까지 계산하면 2만명 정도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 병원을 찾았다는 게 병원측의 설명이다.

이 병원은 개원 1년여만에 외국인 노동자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교통사고 환자로 입원해 있는 우즈베키스탄 노동자 미샤(38)씨는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이 병원으로 옮겨 왔는데 수술 후에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면서 "외국인을 위해 애쓰고 있는 의사, 간호사들에게 고마운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방글라데시인 디스크 환자 누집(42)씨는 "병원에 올 때는 걷지도 못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면서 "무엇보다 마음이 편해 몸도 빨리 회복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졌던 필리핀 여성 아멜리아씨도 귀국 후 이 병원에 입원, 유방암 수술을 받게 된다.

이선희 행정원장은 "아멜리아씨의 치료, 수술은 물론 회복에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아멜리아씨가 겪은 소외감과 외로움에 대한 치료까지 책임지겠다"는 이 원장은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은 단순한 치료만 하는 곳이 아니다. 이들이 겪었을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게 바로 우리 병원이 해야 하는 역할"이라고 말했다.

이 원장은 "앞으로도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은 국적문제, 임금체불 등 노동자들을 둘러싼 문제 등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애쓸 것"이라고 말했다.

"아멜리아 치료, 병원 설립 취지에 부합"
[인터뷰]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 이완주 원장

▲ 이완주 원장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은 지난해인 2004년 7월 21일 문을 열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아버지' 김해성 목사가 뜻을 세웠지만 이완주 원장의 결심이 없었다면 개원이 늦어졌을 것이다.

방배동의 평범한 소아과 개원의에서 50만 외국인 노동자들의 '주치의'가 된 이 원장은 "아멜리아씨가 노동자가 아니라고 해서 돌보지 않는다면 병원을 세운 취지에도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원장은 인터뷰 내내 "아멜리아씨 사연을 조금만 빨리 알았어도 벌써 수술대에 누워 있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 개인병원을 운영하다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이 문을 열면서 원장을 맡으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
"교회에서 의료사업을 하다 김해성 목사와 인연이 닿았다. 그동안은 중국 동포들을 상대로 의료활동을 많이 했는데 김 목사의 제안을 받고 고민하다 결심을 내렸다. 안 죽었을 사람이 죽고 있다는 생각이 가장 절실했다. 이제 나이도 찰 대로 찼으니 마지막으로 할 일이라 여겼다."

- 최근엔 지진피해가 심각한 파키스탄에도 다녀왔다는데?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니냐. 시간이 더 지나면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회만 된다면 의료활동을 하고 싶다. 파키스탄에서는 주로 바라코트 지역에서 진료활동을 했다."

- 외국인 노동자들을 치료하면서 안타까운 사연이 많을 것 같은데?
"암에 걸린 환자가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때도 있었다. 간염 폐렴 결핵에 걸려 있는 노동자들도 많다. 충분히 고칠 수 있는데도 쉽게 돌아간 사람들이 많다. 이런 장면을 목격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 가장 큰 보람은 무엇인가?
"외국인노동자들이 맘 편하게 와서 입원하는 것 볼 때다. 돈 걱정 없이 진료받을 수 있으니까 마음으로 이미 반은 나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병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칠 수 없어 죽을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을 편안하게 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도 우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 무료로 진료하고 있어 병원 경영상의 어려움도 있을 것 같다.
"아주 열악하다. 후원에만 의존하고 있으니 적자규모가 크다. 다행히 10월 18일부터 우리 병원도 보건복지부의 지원대상에 포함됐다. 아직 지원은 이뤄지지 않고 있으나 곧 이뤄질 것이다. 숨통이 조금 트일 것 같다."

-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정부 정책의 문제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정치적인 문제, 법적 문제는 잘 모른다. 다만 3-4년 지나 한국말과 일에 익숙한 노동자들을 다 내보내고 새 인력을 받아들이는 건 모순이라고 본다. 병원에 오는 환자들 대부분이 한국 온 지 3개월이 되지 않아 다치는 현실이다. 이런 부분은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이 병원에서 수술 예정인 아멜리아씨는 노동자가 아닌데 치료가 가능한가.
"우리 병원은 기본적으로 자애를 베풀자는 정신으로 설립됐다. 그 대상이 따로 있을 수 있는가. 아멜리아씨의 수술과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 전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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