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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민주주의 법학연구회 소속 변호사와 법학자들이 <오마이뉴스>에 릴레이 기고를 시작합니다.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편견과 잘못된 상식을 깨는 내용의 [100문 100답 - 국가보안법, 이것이 궁금하다]가 그것입니다. 네티즌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 주

질문 9. 치안유지법과 국가보안법의 관계를 밝혀주세요

일제시대의 치안유지법과 국가보안법이 매우 유사하다고 들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치안유지법을 아시나요

치안유지법은 조선총독부에서 일본제국 주권을 보호하고 조선의 독립을 탄압하는데 적용하였던 대표적인 악법입니다. 일제는 40여년간 조선을 식민지로 통치하면서 끊임없이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는 민중의 봉기 등을 억압해야만 했고, 독립운동을 방해하기 위하여 나름의 합법을 추구하면서 법과 제도를 구축했습니다.

일제가 독립운동을 처벌하는 데 이용하였던 법으로는 보안법, 집회취제령, 제령 제7호, 치안유지법 등이 있었고, 1928년 치안유지법이 제정된 이후로는 해방 전까지 거의 대부분의 독립운동 관련자들은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처벌되었습니다. 치안유지법은 실로 일제 식민통치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일제 시대 보안법은 ‘집회 또는 다중의 운동 또는 군집을 제한, 금지 또는 해산’하는 데 적용되는 법률이었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치안유지법이 적용되기 이전이므로, 당시 참가자 등은 보안법위반으로 처벌되었습니다.

치안유지법, 사상통제와 독립운동 처벌위한 수단

3.1운동 이후 민족해방운동은 새로운 양상을 나타내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현상으로 독립운동단체의 조직화와 사회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운동의 발달 등을 들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변화에 따라 일제는 사회주의가 조선인들에게 독립의 수단으로 수용되고 있는 사실과 사회주의에 의하여 일어날 수 있는 제2의 3.1운동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단순히 집회 등만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 단체 조직 등에 대해서도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습니다.

이러한 법률을 제정하기 위한 조선총독부의 움직임이 있던 당시에, 일본에서 1925년 사회주의 운동을 억압하고 일제의 식민통치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상통제법으로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제는 치안유지법의 실시를 위해 사상탄압을 전문으로 하는 고등계경찰과 사상검사가 배치되고 중앙정보위원회가 설치하고, 일본보다 조선에서는 법률의 적용과 조문의 해석을 가혹하게 하여 위반자들을 엄벌하여 위하의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했습니다.

치안유지법, 한민족 사상통제 위한 대표적 수단

치안유지법은 전문 및 7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제1조에서 국체의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의 부인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의 조직 및 가입 그리고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자를 처벌했습니다.

여기서 ‘사유재산제도의 부인’으로 이 법이 사회주의운동을 겨냥한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조선총독부 및 사법부는 ‘국체의 변혁’이라는 요건을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제국주권의 존립에 관한 사항으로 국체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모든 독립운동을 처벌하는데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였습니다.

치안유지법은 제2조부터 5조까지 제1조의 목적 사항의 실행에 대하여 협의하거나 선동한 자 및 재산상의 이익을 공여한 자를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제7조에서는 국외에서의 행위도 처벌하도록 하였습니다.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수단으로 내세우고 한민족의 사상을 통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독립운동 등 일체의 민족해당운동을 탄압하였습니다.

국가보안법, 치안유지법의 '판박이' 법

이러한 치안유지법 제1조는 현행 국보법 제3조 등에서 반국가단체 및 이적단체의 구성과 가입, 제4조에서 목적수행자를 처벌하는 것과 유사한 규정입니다. 치안유지법은 제2~5조의 동조자에 대한 처벌은 현행 국보법 제5~9조의 회합 통신, 찬양 고무, 자진지원 금품수수, 편의 제공 등과 비슷한 규정입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을 거치고 나서야 대한민국이 성립되었고, 제헌국회는 서둘러서 법령 제10호로 국보법을 제정하였습니다.

현행 국보법은 11차례 개정되어 25개 조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1948년 12월1일 제정, 공포 당시 국보법은 6개 조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치안유지법과 거의 동일한 내용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국보법은 치안유지법을 모체로 하여 이를 계승한 것으로, 그 후 일제가 그러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에서도 독재정권 강화를 위해 악용되어 왔습니다. 국보법은 형법의 특별법의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1953년 9월18일 제정된 형법보다 5년이나 먼저 제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제정 국보법은 당시 성립된 이승만 정권이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반공, 반통일, 반민중적인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국보법, 치안유지법 바통 이어받아 사상탄압

일제 시대 치안유지법 제정과정에 있어서 일본과 조선에서는 사상운동을 과연 법으로 예방할 수 있는 것인지, 사상의 적화를 형벌로 처벌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반대의견이 개진되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에서는 치안유지법의 제정을 반대하며 “사상은 사상으로 대항할 것이며 사상은 사상으로 정복할 것이다”라는 글을 게재하였습니다. 이는 21세기를 사는 대한민국에도 그대로 요구되는 명제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국가에서 그토록 중시하는 “1789년의 프랑스 인권선언”은 제11조에서 '사상 및 의견의 자유로운 전달은 사람의 가장 귀중한 권리의 하나이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자유롭게 발언하고 서술하며 인쇄할 수 있다.'고 명백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치안유지법을 제정했던 일본에서는 이 법에 의해 사상의 자유가 침해된 과거에 대한 반성으로, 사상의 자유를 하나의 독립된 인권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004년 대한민국은 국보법을 내세워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에게 7년의 징역형을 선고하고 있고, 아직도 사상의 자유는 인권선언 속에서만 존재할 뿐입니다.

사상의 자유는 선언으로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의 자유을 억압하는 국보법을 폐지하고 사상을 사상으로 대항하게 할 수 있도록 사회제도를 개선하는 노력 속에서만 꽃 필 수 있는 것입니다.

(답변: 김미경 변호사 / 감수: 조광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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