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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合衆國"이라는 한자어 이름은 중국에서 만들어져 일본과 한국으로 퍼졌던 것임을 간추려 보았다. 그러나 "합중국(合衆國)"이라는 말은 과연 "United States"의 정확하고 충실한 번역어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가 않다. 합중국(合衆國)의 뜻을 번역해 보자. 두 가지 번역이 가능하다. 우선 "무리(衆, 많은 사람)가 모인(合) 나라(國)"라는 뜻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나라 치고 많은 사람이 모이지 않은 나라가 있다는 말인가? 합중국이 그런 뜻으로 만든 이름은 아닐 것이다.

두 번째로 "여러 나라(衆國)의 모임(合)"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메국이 갖는 연방제(聯邦制)의 속성을 묘사한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해석에도 두 가지 난점이 있다. 하나는 한자문화권 언어에서는 굳이 복수표시를 해야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단수형으로도 얼마든지 복수의 뜻을 나타낼 수 있다. 그래서 합중국(合衆國)은 그냥 합국(合國)과 차이가 없다. 중(衆)자를 끼워 넣은 것이 무의미해 진다.

더 큰 문제점은 국(國)의 뜻이 애매해 진다는 점이다. 영어 낱말 "state"가 대개 나라(國)로 번역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세, 행정, 입법 등의 일반적 정치 권력은 물론 외교와 군사권을 가진 완전한 주권을 가진 경우를 가리킨다.

행정, 조세권은 갖지만 외교, 군사권을 연방정부에 이양한 정체 단위를 요즘은 주(州)라고 부른다. 메국을 비롯해서 캐나다 ·멕시코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브라질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 ·말레이시아 ·나이지리아 ·아랍에미리트 등이 연방제를 채택하고 있다. 각 연방국가들의 단위 정체의 이름은 나라에 따라서 다르지만 한자문화권에서는 이를 "州"(주-한국, 쪼우-중국, 슈우-일본)로 불리는 것이 상례이다.

물론 주(州)는 역사가 있는 낱말이다. 중국에서는 은(殷)나라 최고 통치자를 왕(王)이라고 하고 왕의 영토를 나누어 다스리던 제후들의 관할지역을 주(州)라고 부른바 있다.

춘추전국시대와 (秦)나라 이후에는 최고 통치권자는 천자(天子)와 황제(皇帝)로, 제후는 왕(王)으로 이름이 격상됐는데, 이 때에는 왕이 다스리던 영토를 국(國), 국을 구성하는 하위 단위를 주(州)로 불렀다. 다른 이름으로 지방(支邦) 혹은 지분국(支分國)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삼국시대부터 행정구역 단위로 주(州)라는 이름을 썼다. 특히 신라는 505년부터 영토를 주(州)로 구분하기 시작했고, 통일 후에는 전국을 9주(州)5소경으로 나누어 통치함으로써 중앙 집권체제를 완비한 바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어법으로 보나 오늘날의 언어사용 관행으로 보나, 메국 연방을 구성하는 50개의 "state"는 국(國)이 아니라 주(州)로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요컨대 합중국의 국(國)이 "나라"를 가리킨다면 중(衆)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고, 합중국의 국(國)이 주(州)를 가리킨다면 그 국(國)은 잘못 쓰여진 말이라는 말이다.

잘못 쓰여지기로는 합중국(合衆國)의 합(合)자도 마찬가지이다. 한자문화권에서 합(合)자는 여러 개의 단위가 뭉쳐서 "하나"를 이루는 것을 가리키되 각 개체의 독립성이 유지되지 않음을 뜻한다. 개체가 정체성을 가지고서 한데 뭉치는 것을 가리키려면 연(聯)자를 쓴다.

다른 나라 이름에서도 연(聯)자의 용례가 확인된다. 독일의 공식이름은 "분데스 레푸블리크 도이칠란트(Bundesrepublik Deutschland)"인데 우리는 그것을 독일"연방(聯邦)"공화국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또 구 쏘련의 "련"자도 바로 연(聯)이다. 정식이름은 "쏘유즈 쏘베츠끼 쏘찌알리스티쩨스끼 레스뿌블리끄 (союз советский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й республиканский)"이고 한국말로는 "쏘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聯邦)"으로 번역했다. 공화국들이 연(聯)의 방식으로 모였다는 말이다.

영국과 현 러시아의 이름을 번역하는 데에는 연(聯)과 합(合)을 모두 쓰고 있다. 영국의 정식이름은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聯合)왕국"이고 오늘날의 러시아는 "독립국가 연합(聯合)"이라고 부른다.

연합(聯合)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강조점은 합(合)자 보다는 연(聯)자에 있다. 각 구성 정체들이 상당 정도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한데 모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다. 한국의 경험에서도 합(合)과 연(聯)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의 한국 강점을 합방(合邦)이라고 했다. 이는 한국의 정체(政體)를 완전히 무시했다는 말이다.

반면에 남북한의 통일 방식으로 연방제(聯邦制)가 이야기되고 있다. 남한과 북한이 각 체제를 유지하면서 외교와 군사권만이라도 먼저 통일한다는 뜻이다.

합방(合邦)과 연방(聯邦)의 뜻에 분명히 드러나듯이, 합(合)은 개체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는 모임인 반면, 연(聯)은 개체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모임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합중국(合衆國)은 "United States"의 번역어로 적합한 말이 아니다. 메국의 정체는 국(國)이 아닌 주(州)의 모임인데다가, 모인 방식도 합(合)이 아닌 연(聯)이다. 무리(衆)라는 말은 그것이 "무리"라는 뜻이라면 부자연스런 번역이고, 복수표시라면 불필요한 군더더기이다.

중국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외국어 번역 및 음차에 매우 신중한 것으로 정평이 있다. 빈번히 드는 예가 "코카콜라(Coca Cola)"의 음차어로 만들어진 "커쿠컬랴오(可口可樂)"이다. 사성과 함께 읽으면 원음과 비슷해 질 뿐 아니라 "입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뜻까지 더해 놓았다.

그러나 합중국(合衆國)이라는 번역어에서는 그런 정치한 번역 노력을 읽어볼 수가 없다. "United States"의 뜻을 번역했다고 보기에는 엉성하고 허점이 많다. 왜 그랬을까? 왕샤조약 이후 150년 이상이 지난 지금 그 이유를 미루어 추적하기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부적합한 번역어"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중국인들의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의 책임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당국자들이나 지식인들이 조금만 깊이 생각했더라면 그 번역어가 얼마나 어쭙잖은 말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독자적으로 더 적합한 번역어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인들은 그런 데에까지 생각이 미치지를 못했던 것 같다. 하긴 "나라 문을 열면 죽는다"는 파와 "나라 문을 열지 않으면 죽는다"는 파가 목숨 내건 싸움을 벌이고 있었을 때이니, 남의 이름을 제대로 번역하는 문제 따위가 중요한 사안이었을 리가 없었겠다.

결국 우리 선조들은 남들이 만든 어쭙잖은 번역어를 그대로 베껴 썼고, 일제 강점기를 통해 그 말은 더욱 굳어졌다. 해방 후에도 이를 바로 잡지 못했고, 결국 그 삼사대 후손인 우리들도 아직 그 말을 쓰고 있다.

그런데 만일 그때 우리 선조들이 제대로 된 독자적인 번역어를 만들었다면 어떤 말이 되었을까? 그것은 십중팔구 "어메리카 연주국(聯州國)"이 되었을 것이다. "어메리카 대륙에 있는, 여러 주(州)가 연(聯)한 나라(國)"라는 원래적 의미는 그렇게 말고는 달리 번역할 방법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주국(聯州國)이라는 말이 지금 우리에게는 생소하고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익숙해 진 습관 때문이다. 만일 한국 사람들이 1백년 전부터 메국의 공식 이름으로 "어메리카 연주국"을 사용했다면, 지금쯤 "합중국"이라는 말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들리겠는가?

지금이라도 합중국(合衆國)을 "연주국(聯州國)"으로 바꿔 부르자고 한다면, 미국(美國)을 "메국"으로 쓰자고 한다면, 그리고 "아메리카"를 "어메리카"로 바꾸자고 한다면, 그것은 바보나 미치광이의 헛소리에 불과할까? 그것은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

혹시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럴 필요(必要)와 실익(實益)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미 익숙한 이름을 바꾸는 데에 들어갈 사회적 비용(費用)은 얼마나 될까? 또 그런 비용은 우리가 무릅쓸 가치가 없는 것일까? 다음 글에서는 이런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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