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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중에서 만난 네팔 사내와 안나푸르나. ⓒ 송성영
지프차에서 내린 곳에 점포가 하나 있었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지프차가 다닐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가파른 산악길, 하루에 몇 사람이나 지나칠까 싶을 정도로 외진 곳이다. 그럼에도 점포 앞에 음료수와 목도리, 염주를 비롯한 간단한 종교용품들을 말끔하게 펼쳐 놓고 있다. 지프차에서 내린 손님은 나 혼자였다. 점포 청년이 지프차 도착을 기다렸다는 듯 배낭을 걸쳐 메고 머뭇거리는 내게 다가온다.

"어디로 가려하십니까?"
"톨카 마을로 가려 합니다."
"여기가 톨카 마을입니다."
"하루 이틀 머물 숙소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도 숙소가 있습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는 안나푸르나가 보이지 않았다. 점포청년은 언덕길 너머 안나푸르나 설산 쪽을 손짓하며 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그렇다고 한다. 내일 아침에는 잘 보일 것이라고 한다.

"나는 안나푸르나가 보이는 숙소를 원합니다."
"저 언덕 위에 올라가면 잘 보입니다."

구름 사이로 언듯언듯 보이는 안나푸르나
안나푸르나 가는 길목에 자리한 톨카 숙소. ⓒ 송성영
점포 청년이 손짓하는 언덕은 불과 백여 미터에 불과했다. 거기다가 뜻하지 않게 50루피에 방을 내주겠다고 한다. 귀가 솔깃해 졌다. 본래 150루피인데 비수기라 사람이 없어 싸게 내주겠다며 이층으로 올라와 보라고 손짓한다. 점포 주인의 손길을 뿌리칠 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그래, 내리라면 내리고 있으라면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청년을 따라나섰다.

단 한 명의 손님도 없는 숙소는 턱없이 싼 가격에 비해 의외로 깨끗했다. 네팔 국립공원의 450루피짜리 방보다 깔끔했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따로 있었지만 본래 고양이 세수를 하고 있는 내겐 문제가 되질 않았다.

짐을 풀어 놓고 여권을 챙겨 간단한 인적 사항을 기재하기 위해 점포 안으로 들어서자 중년 부부가 반긴다. 점포청년의 부모라고 한다.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중년의 점포주인이 점포 옆에 풍성하게 매달려 있는 자두를 따와 내게 건넨다. 점포 앞에는 소쿠리에 자두가 가득 담겨 있었다. 지나가는 등산객들에게 내다 팔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얼마를 드려야 하죠?"

그가 빙그레 웃으며 돈을 받지 않으니 그냥 먹어도 된다고 한다. 약간 새콤한 맛에 달콤하니 맛이 있다. 옆에 있던 중년 사내의 아내가 손가락을 내 보이며 열 개에 5루피 한다고 말한다. 순박하게 웃고 있는 그에 반해 그의 아내는 어딘가 모르게 강인함이 있다. 생활력이 강한 한국 여성을 닮아 있다.

열 개의 자두를 사들고 방안으로 들어와 누웠다. '왜 여기에 와 있는 것이지. 왜 이 외딴 곳에 홀로 와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반복했다. 답이 나오지 않는다. 머릿속이 어지럽다. '그려, 타라고 하면 타고 내리라 해서 내려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조금 전에 했던 생각이 떠오른다.

숙소에 잠시 누워 있다가 밖으로 나섰다. 중간에 한국인 여성이 일본인 여성과 네팔 안내원을 앞장세워 트래킹을 하고 있다. 거의 두 달 만에 한국어로 그녀와 말 몇 마디 나눈다. 갑자기 한국말이 잘 안 나오는 것 같다. 한국어가 이상하게 발음이 되었다. 그녀는 저만치 기다리고 있는 일행들이 있어 몇 마디 주고받고 떠났다. 하지만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가 기억나질 않는다.
양떼를 몰고 가는 사내. 안나푸르나 가는 이 길은 5년 전까지만 해도 지프차가 다닐 수 없었다고 한다. ⓒ 송성영
화덕에 불을 피워 요리를 하고 있는 숙소 부부. ⓒ 송성영
그녀가 사라진 언덕 아래로 한 네팔 사내가 양떼를 몰고 내려서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나푸르나가 보인다는 언덕길을 나서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뭔가 먹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종일 과자 몇 개 먹은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안나푸르나는 구름이 걷힌 내일 아침에 만나도 된다. 숙소로 돌아와 메뉴판을 들여다본다. 방세를 싸게 내준 이유가 있었다. 메뉴판에 적혀 있는 식사들이 200루피가 넘는다. 먹을 만한 음식은 300루피 가까이 된다.

부엌에서 무언가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 중년 부부에게 모모와 파이를 시켰다.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파이를 화덕에 굽는다며 손짓을 한다. 방에 들어가 노트북을 켜놓고 사진과 원고 정리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청년이 파이를 들고 왔다. 화덕에 구운 파이가 뜨겁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모모와 파이의 맛이 일품이다. 6개의 모모를 다 먹고 나서 파이 몇 조각을 먹고 내일 아침 산행을 위해 몇 조각을 남겼다.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오후 8시도 채 안 됐는데 정전이다. 조금 기다리면 전기가 들어오겠지 했는데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깜깜 무소식이다. 멀뚱멀뚱 누워 있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악몽을 꾸다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다. 누군가가 독사처럼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쫒아오는 꿈속의 기운이 여전히 온몸을 휘감고 있다.
톨카 마을 사이로 보이는 안나푸르나. ⓒ 송성영
숲 길 사이로 보이는 안나푸르나. ⓒ 송성영
눈을 뜨고 손전화기를 켰더니 오전 5시가 조금 넘어 있다. 아직 사위는 어둠이다. 몸이 쉽게 일으켜지지 않는다. 그래도 일어나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뚜렷한 목적지도 없지만 일어나야 한다.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다친 무릎 통증을 이를 악물고 견뎌가며 반가부좌를 틀고 침대 위에 앉았다. 긴 호흡으로 불처럼 치솟아 오른 마음을 물처럼 가라앉힌다. 몸과 마음을 조절하지 못하면 길을 나설 수 없다. 불처럼 솟구쳐 있는 마음자리를 다스리지 못하면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게 된다.

작은 창틈으로 새벽 기운이 감지된다. 발가벗은 육신에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선다. 언덕길을 오르자 길 양옆으로 몇 채의 집들이 들어서 있다. 그 사이로 저 멀리 안나푸르나가 오락가락하는 구름 사이로 묵직하게 들어서 있다. 그때서야 여행의 목적을 감지하고 사진기를 꺼냈다.

마을을 지나 숲길로 들어섰다. 숲 사이로 해맑은 기운이 감지된다. 안나푸르나 설산이 언듯 언듯 보인다. 몇 걸음 옮기는데 뱃속에서 요동을 친다. 어제 저녁 게스트하우스의 식수를 끓이지 않고 그냥 먹어서 그런지 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한다. 산물은 괜찮겠지 싶어 몸을 실험 삼아 벌컥벌컥 서너 모금 마셨다. 이제 네팔의 기운에 익숙해지려나 싶었는데 오산이었다. 내 몸이 받아내지 못하고 있다. 마음을 잘못 쓰니 몸이 고생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꼭 필요한 만큼의' 날개를 다는 것
안나푸르나가 훤히 보이는 산길에서 한 아낙네가 춤을 추고 있다. ⓒ 송성영
안나푸르나가 훤히 보이는 산길에서 한 아낙네가 춤을 추고 있다. 이른 새벽부터 춤을 추고 있다. 걸음을 멈춰 그녀를 바라본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에게 온몸을 공양하는 듯 보인다. 그녀에게 신은 안나푸르나, 대자연일지도 모른다.

대자연 앞에 그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보인다. 그녀의 믿음은 하늘과 땅 대자연이다. 대자연은 신이 거주하는 그녀의 사원이다. 신을 향한 그녀의 춤사위가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녀의 내면에 신이 내린다. 문득 그녀의 춤사위는 자기 자신에게 공양하는 춤사위처럼 다가온다.

수행자가 따로 없다. 그녀는 수행자다. 수행자들이 다스린 마음자리로 자비를 베풀며 세상을 살아간다면 그녀는 춤사위로 수행을 하며 뭇 중생들에게 자비심을 베풀고 있는 듯 보인다. 춤추는 아낙네가 사라지고 나뭇가지 위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 노래를 하고 있다.
산중에서 만나 낫을 꺼내들었던 네팔 사내와 안나푸르나. ⓒ 송성영
오만가지 표정 속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사진, 내 입맛에 맞는 사진을 선택할 것이다. ⓒ 송성영
그녀가 춤을 추었던 산길을 지나 한참을 오르자 안나푸르나가 훤히 반긴다. 턱하니 들어서 있는 안나푸르나 설산 앞에 넋을 놓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온다. 바랑처럼 포대자루를 등에 메고 있다. 심마니처럼 보인다. 그를 따라 가고 싶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약초를 캐러 가십니까?"

그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대답 대신 그가 옆구리에 차고 있던 낫을 꺼내든다. 잠시 두려움 몰려온다. 이 깊은 산중에 그와 단둘이다. 그가 낫을 꺼내들고 나뭇가지를 쳐대는 시늉을 한다. 낫은 나를 해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낫을 든 사내가 다시 양손을 머리위에 얹고 소뿔처럼 흉내를 낸다. 그리고 먹는 시늉을 한다. 소먹이를 위해 나뭇가지를 베러온 것이다.

머릿속에 외진 곳에서 불상사를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안내서나 뉴스, 소문 따위가 입력된 두려움이었다. 사내가 낫을 꺼내드는 순간 나를 해칠 것이라는 조작된 기억의 작용이다. 본래 내 자신의 내면에는 두려움이 없다.

내 기억 속에 두려움이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입력되어 있는 것이다. 그 바이러스를 이겨낼 수 있는 치료제는 자신이다. 나는 한껏 웃으면서 사진기를 꺼내 그 앞에 내밀었다. 그가 사진을 찍어도 상관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가 떠나고 나는 오만가지 표정을 지어가며 내 자신에게 사진기를 들이댄다. 오만가지 표정 속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사진, 내 입맛에 맞는 사진을 선택할 것이다. 당당한 모습이 찍힌 사진 뒷면에는 온갖 번뇌가 숨겨져 있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 있는 탐진치의 모습이 감춰져 있다.
구름 걷히고 해맑게 열린 안나푸르나. ⓒ 송성영
나의 겉모습은 가식으로 가려져 있지만 저 안나푸르나는 구름이 걷히자 해맑은 진면목을 드러내고 있다. 가식과 탐진치를 거둬낼 수 있다면 저 설산처럼 나의 내면에도 해맑은 그 무엇이 드러날 것이다. 내가 그토록 저 안나푸르나를 만나러 온 이유는 안나푸르나를 오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가식과 탐진치에 가려져 있는 그 무엇인가를 만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저 설산 가까이 오르기 위해 인도로 떠나오기 전, 일 년 내내 매일 아침 서너 시간씩 산행을 했었다. 하지만 나는 인도에서 다친 무릎 때문에 설산을 오를 수 없다. 무엇인가 이루겠다는 목적을 정해 놓으면 고통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삶이란 그 어떤 목적 없이 저 우뚝 솟아 있는 설산, 안나푸르나처럼 있는 그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 숨겨져 있는 탐진치에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 내 안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름 걷힌 저 안나푸르나처럼.

안나푸르나를 등지고 산을 내려서는데 숲 속 아름드리나무에 온통 이끼가 끼어 있었고 거기에 꽃씨가 내려앉아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이쁜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무가 또 다른 생명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갑자기 그 나무를 껴안고 싶어졌다. 차갑게 다가왔던 나무가 잠시 후 내게 온기를 내주었다. 그리고 나무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그대 나무를 품어보라
살아있는 그대의 온기가
얼마나 따듯한 기운을 품고 있는지
그대 나무를 품어 보라
얼마나 향기로운 생명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있다네
나무 이끼에 핀 꽃. ⓒ 송성영
스스로 크는 나무가 제 몸에 이끼를 키워 꽃을 피우게 하듯이 너의 마음에 꽃씨를 발아시켜 꽃을 피우라 이르는 듯했다. 나무는 하늘과 땅에 의지해 스스로 제 몸을 키운다.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만큼의 기운을 빨아들여 제 몸을 불리고 키를 키우고 살아간다. 사람은 필요이상을 섭취한다. 다른 사람의 기운까지 빨아드리고자 한다. 그렇게 제 몸을 필요이상으로 불리다보니 부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다.

산길 옆, 발아래로 고사리가 널려 있다. 거의 손가락 굵기와 맞먹을 정도다. 지천에 널려 있다. 나는 본능처럼 고사리의 허리를 뚝뚝 잘라 천 가방에 넣는다. 그러다가 잠시 손을 멈춘다. 여린 생명의 허리를 툭툭 분질러 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손을 멈추고 귀 기울여 보세요. 나를 꺾어주세요 라고 말하는 꽃은 없어요. 제발 나를 내버려 두세요라고 하소연 할 거에요. 고사리도 마찬가지랍니다. 모든 생명들은 똑같은 목소리를 낼 거에요.' 잎사귀도 피기도 전에 허리가 툭툭 잘려나가는 여린 고사리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살생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살생하지 말라는 것은 필요 이상의 살생으로 욕망을 채우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먹고 먹히고, 죽이고 죽는다. 인간은 채식과 육식으로 나눠 살생, 불살생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 동물들은 필요이상으로 살생하지 않는다. 필요한 만큼 살생한다. 인간은 저장기술을 통해 좀 더 많은 무자비한 살생을 하고 살아간다. 세상 사람들에게 살생하지 말라 가르치면서 좋은 음식을 탐하는 수행자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생명 유지는 살생과 불살생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살생의 그물을 피해갈 수 없다. 다만 살생으로 얻은 기운을 어떻게 쓰는가. 어떻게 되돌려 놓는가 그것이 문제다. 생명 유지를 위해 살생을 하여 그 기운을 대자연 속으로 되돌려 놓는 것은 자연의 순환 고리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생명의 연장이다. 불필요한 살생은 자신을 갉아 먹는 것이다.

한꺼번에 수십만, 수백만의 생명을 처참하게 죽일 수 있는 살상 무기를 가진 사람들은 꽃이며 고사리가 뭔 대수냐고 대꾸할지도 모른다. 그 말에 답할 수 없다. 생명 연장을 위해 먹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것처럼 참 쓸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새. ⓒ 송성영
고사리를 꺾던 손을 놓고 돌아오는 길에 수많은 지렁이들이 맨 바닥 위로 기어 나와 몸을 뒤틀고 있다. 메마른 대지에 푸석푸석한 흙을 뒤집어쓰고 있다. 새 한 마리가 나무 끝에 앉았다. 내가 사진기를 꺼내 다가가자 나뭇가지를 박차고 자유롭게 날아간다.

자유롭다는 것은 꼭 필요한 만큼의 날개를 다는 것이다. 작은 깃털에 몸집을 너무 불리면 날지 못한다. 날아가지 못하는 닭 신세가 될 것이다. 나는 닭처럼 퇴화된 날개를 달고 있다. 자유를 목말라 하면서도 물욕의 몸집을 불려 날개를 퇴화시키고 있다.

퇴화된 날개는 두려움이다. 닭장을 벗어나면 먹이를 찾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 그래도 어쩌랴. 이 퇴화된 날개로 지붕 위나 최소한 나뭇가지 위라도 날아야 하질 않겠는가. 창공을 높이 날아 세상을 내려다 볼 수는 없어도 마당이나 닭장에 갇혀 있는 나를 바라볼 수 있는 그 어떤 시도를 해봐야 하질 않겠는가. 수염발 허연 중년의 내가 퇴화된 날개를 펼쳐 안나푸르나를 만나러 온 이유이기도 했다.
태그:#네팔, #톨카 마을, #안나푸르나, #살생과 불살생, #퇴화된 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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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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