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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머니'를 요구했던 꼬마 아이의 어린 여동생.
 내게 '머니'를 요구했던 꼬마 아이의 어린 여동생.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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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경찰 아르준네 마을에서 사흘째. 이른 아침, 숙소에서 일하는 젊은 엄마가 어린 두 남매의 손을 잡고 구멍가게에서 나오고 있었다. 녀석들의 손에 막대 사탕이 하나씩 들려 있다. 예닐곱 먹은 남자 아이는 낯이 익다.

어제 저녁 내 주변을 빙빙 돌면서 "머니, 머니" 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던 녀석이었다. 녀석이 내게 손을 내미는 순간 "노!"라며 매몰차게 거절했었다. 겁에 질린 녀석의 그 커다란 눈망울을 보는 순간, 곧바로 후회했다. 녀석이 내 말을 알아들을 리 만무했지만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미안하다. 너한테 화난 게 아니다. 돈을 달라는 것은 좋지 못한 행동이다."

내가 매몰차게 화를 낸 것은 녀석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누가 이 네팔 시골 구석 저 맑은 눈망울까지 굽신거리게 했는가 싶어 공연히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녀석이 그런 내 속마음을 알 리 없었다.

나는 거듭 화를 내서 미안하다는 몸짓으로 다가갔지만 녀석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숙소 옆에 자리한 움막집이나 다름없는 허름한 집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저녁 내내 녀석이 내 말에 상처를 입었을까 싶어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마음 한 구석에 아프게 자리하고 있던 녀석을 이른 아침 다시 만났던 것이다.

어린 남매에게 막대 사탕을 손에 쥐어 준 젊은 엄마는 숙소로 들어서자마자 청소를 시작했고 녀석은 어린 여동생의 막대 사탕을 챙겨줘 가며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녀석은 막대 사탕을 빨고 있는 어린 여동생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참새처럼 쫑알거리고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매몰차게 대했던 어제 저녁 일을 떠올리며 도로 건너편에 자리한 구멍가게에서 내가 먹을 빵과 함께 두 봉다리의 과자를 사들고 남매에게 다가갔다. 녀석이 어제 일 때문인지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어제는 내가 정말로 미안했어."

나는 녀석 앞에 과자를 건네며 거듭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녀석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내 의중을 알아챘는지 슬며시 웃으며 과자를 받아 하나를 동생에게 건넨다. 내게 고맙다는 웃음을 내보이는 것은 과자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나의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 들였던 것이다. 나는 녀석들 옆에 거지처럼 쪼그려 앉아 짜이를 시켜 마신 것을 잊고 우적우적 딱딱한 빵을 씹어 삼켰다.

마음의 상처는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일어난다. 문득 한국을 떠나올 때 나의 두 아들에게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너희들이 누군가에게 잘못을 했으면 곧바로 용서를 빌고 그 누군가가 너희들에게 잘못한 것에 대해 진정으로 용서를 빌면 곧바로 용서해라.' 인도로 떠나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언처럼 당부했던 이 말은 내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비록 마음이 담긴 과자 두 봉다리에 불과하지만 진정한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준 녀석에게 고마웠다. 따지고 보면 내가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라 녀석이 내게 용서의 자비를 베푼 것이었다. 사소한 그 어떤 것이라도 자비는 누군가와 사심 없이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주는 사람만이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탁발을 통해 누군가에게 자비의 기회를 주었듯이 받는 사람은 주는 사람에게 자비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메마른 세상에는 탁발이 사라진다. 탁발하는 사람이 없으면 베푸는 사람도 없다. 탁발은 주고 받는 사람, 서로가 세상에 진 빚을 갚는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우리 할아버지 말을 알아들었습니까?"

내가 묵었던 숙소 주인. 한국의 올드 코미디언 남보원을 닮았다.
 내가 묵었던 숙소 주인. 한국의 올드 코미디언 남보원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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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초롱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슬픔이 서려있는 눈망울의 남매와 헤어져 숙소로 돌아와 배낭을 꾸렸다. 떠나야 할 시간이 돌아왔다. 안나푸르나를 향하는 지프차가 포카라에서 출발하여 오전 9시에 숙소 근처로 지나간다고 한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인도나 네팔에서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차를 만난 적이 없다. 8시가 조금 넘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지프차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미리 기다려야 한다.

숙소 계단을 내려서는데 확성기를 매단 지프차 한 대가 힌두 음악을 쏟아내며 어기적 어기적 지나가고 있었다. 거기다가 크락션을 빵빵 울려대고 있다. 경사스러운 결혼식을 알리는 인도차량들처럼.

"어디에서 결혼식이 있나 봅니다."
"아닙니다. 힌두교 찹니다."

숙소 주인 사내는 아주 유쾌하게 덧붙여 설명했다. 이곳에서는 붓다를 믿는 사람들은 '옴마니 파드메훔, 옴마니 파드메훔'을 읖조리고 힌두교 사람들은 '와셔 와셔' 어쩌구 해가며 내가 알아듣기 힘든 힌두 노래를 흉내낸다. 그리고 자신은 락 음악을 좋아한다며 전자 기타를 치는 흉내를 내더니 아울러 존 덴버를 좋아한다며 컨트리송 한 구절을 부르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40세가 넘었다며 이제 바꿀 때가 됐다는 등의 농담을 건네며 동네 사람들에게 자신의 농토를 빌려주고 생산량의 반을 소작료로 챙기고 있다며 은근히 부자임을 과시한다. 나는 그의 과시욕을 더 이상 들어주고 싶지 않아 말을 돌렸다.

"안나푸르나 가는 지프차는 어디에서 탑니까?"

안나푸르나 가는 길목에 자리한 구멍가게. 3대가 함께 살고 있었다.
 안나푸르나 가는 길목에 자리한 구멍가게. 3대가 함께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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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손짓한 곳은 숙소에서 3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지프차가 정차한다는 곳에는 구멍가게가 있었다. 구멍가게의 젊은 주인에게 재차 확인했다.

"안나푸르나 가는 지프차가 여기서 섭니까?"
"예 맞습니다. 여기 앉아서 기다리세요."

젊은 주인 옆에 서 있던 중년 사내가 내게 의자를 권했다. 젊은이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는 나와 동년배였다. 나는 의자 신세를 지는 것이 미안해 생수와 과자를 몇 개 샀다. 잠시 후 얼굴에 주름이 많은 노인 한 분이 가게 안에서 나왔다. 젊은 주인의 할아버지라고 한다. 할아버지는 내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손자를 통해 '어디서 왔나?' '무엇하는 사람인가?' 나에 관해 이런 저런 신상을 알고 싶어 했다.

안나푸르나 가는 길목에서 만난 네팔 경찰 아르준의 동네 사람들
 안나푸르나 가는 길목에서 만난 네팔 경찰 아르준의 동네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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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 부는 구멍가게 할아버지. 네팔 사람들이 농사지을 때 부르는 일노래를 들려줬다.
 피리 부는 구멍가게 할아버지. 네팔 사람들이 농사지을 때 부르는 일노래를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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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함께 하자던 구멍가게 할아버지가 아침을 먹고 나오면서 피리를 들고 나왔다. 내게 피리 연주를 들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구멍가게 앞으로 오고가던 동네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피리 연주와 봉두난발한 긴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의 낯선 이방인이 궁금한지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동네 노인이 구멍가게 할아버지와 번갈아가며 피리를 불기도 했다. 졸지에 구멍가게 앞이 낯선 이방인과 함께 하는 피리 연주장이 되었다.

할아버지의 손자 말로는 동네 노인들 대부분이 피리를 연주할 줄 안다는 것이다. 피리 부는 노인의 모습에서 단오나 대보름, 동네잔치 때 장구채를 잡았던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 겹친다. 우리 아버지뿐만 아니라 꽹과리, 북, 장구 등, 누구든 농 악기 하나쯤을 연주할 줄 알았던 오래전 우리 동네 어른들을 닮았다. 가난하게 살았지만 농을 쳐가며 고단한 삶을 즐길 줄 알았던 사람들이었다.

"이 마을에도 농사지을 때 부르는 일노래가 있습니까?"
"예 물론이죠."
"할아버지에게 부탁해도 될까요?"

내가 노인에게 논에서 모내기 하는 모습을 몸짓으로 보여줬더니 금세 알아듣고 경쾌하면서 어딘가 모르게 슬픔이 묻어나는 연주를 해줬다. 우리의 정선 아리랑처럼 고단한 삶을 노래하는 민속음악에는 경쾌함 속에 아련한 슬픔이 배어 있다.

할아버지에게 아주 잘 들었다며 박수를 보내자 환하게 웃는다. 할아버지는 내게 네팔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건넸고 나는 두 손 모아 합장하는 자세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내보이며 웃자 노인도 따라 웃는다. 노인과 내가 서로 다른 언어와 웃음으로 소통하자 옆에 있던 손자가 언어도 통하지 않는 소통을 신기해하며 물었다.

"당신은 네팔어를 압니까?"
"전혀 모릅니다."
"그런데도 우리 할아버지의 말을 알아들었습니까?"
"예 모내기할 때 부르는 노래라고 하셨지요."
"맞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는 짐짓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보디 앤드, 마인드 랭귀지!"

옆구리에 칼처럼 낫을 차고 다니는 네팔 농부. 네팔의 낫은 묵직한 조선낫을 닮아 있었다.
 옆구리에 칼처럼 낫을 차고 다니는 네팔 농부. 네팔의 낫은 묵직한 조선낫을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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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가게 앞을 지나가던 아줌마가 구멍가게 청년에게 치마폭처럼 생긴 보자기에서 자두를 꺼내 준다. 청년이 내게 나줘 주려 하자 그 모습을 보더니 환하게 웃으며 내게도 몇 개 건네준다. 한국에서 먹는 자두보다 작았지만 달콤했다.

아줌마와 함께 다가왔던 중년 사내는 옆구리에 칼 같은 것을 차고 있었다. 그 용도를 물었더니 농사에 쓰이는 낫이라며 보여준다. 네팔에서는 칼집처럼 낫을 꽂고 다니는 낫 집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닿고 닳아 있는 중년 농사꾼의 무쇠 낫은 그리 날카롭지 않아 보였지만 대장간에서 매질로 만든 묵직한 조선낫처럼 아주 강하게 생겼다.

낫의 날과 손잡이로 이어지는 부분이 견고하다. 장검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마감을 했다. 유사시에는 무기로 써도 무방할 듯 싶을 정도로 튼실하다. 오래전 한국의 조선낫이 그랬듯이 땔감이나 가축의 먹이로 쓰이는 나뭇가지들을 쳐내는 데 요긴할 것 같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요즘 한국의 낫들은 살집이 없어 휘어지거나 부러지거나 이빨이 금세 나가 몇 차례 쓰지 못하고 버리는 경우가 많다. 네팔 농부가 차고 다니는 낫은 살집 두터운 조선낫처럼 숫돌에 갈아 최소한 십년은 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한국처럼 자본이 밀려들어오게 되면 대장장이들의 땀이 배어 있는 무쇠 낫들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자본은 편리에 따라 소중한 것들을 앗아간다.

이 아이를 만나려고 하루 늦게 출발했나 보다

네팔 사람들은 캐런볼 놀이를 즐겨한다.
 네팔 사람들은 캐런볼 놀이를 즐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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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런볼은 녹색 칩을 튕겨 상대방의 칩을 맞춰 네 모퉁이 구멍에 넣는 놀이다.
 캐런볼은 녹색 칩을 튕겨 상대방의 칩을 맞춰 네 모퉁이 구멍에 넣는 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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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가게의 젊은 주인은 동네 친구와 둘이서 '캐런볼'이라는 놀이를 하고 있다. 얇은 바둑알처럼 생긴 흑백, 각각 열 개씩의 칩을 네모반듯한 판위에 놓고 녹색 칩을 튕겨 상대방의 칩을 맞춰 네 모퉁이 구멍에 넣는 놀이다. 네팔 사람들이 즐겨 하는 캐런볼은 당구 놀이와 흡사하다. 당구공과 큐대가 없을 뿐이다.

9시에 도착한다는 안나푸르나 가는 지프차는 열시가 넘었지만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지프차가 오거나 말거나 노인들의 피리 연주와 캐런볼 놀이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구멍가게의 동년배가 더 초조해 보였다. 가끔씩 시간을 확인해가며 고개를 길게 빼고 저만치 도로를 주시한다. 아홉시에 지프차를 탈 수 있을 것이라 내게 얘기했던 것이 미안했던 모양이다.

동네 사람들과 '보디 랭귀지' 혹은 '마인드 랭귀지'로 웃고 즐기는 사이, 11시가 다 되어 갈 무렵 지프차가 불쑥 다가왔다. 동네 사람들과 제대로 작별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서둘러 지프차에 올라탔다. 지프차 좌석은 만원이다. 짐칸 의자에 겨우 엉덩이를 걸쳐야 했다.

안나푸르나 가는 지프차에서 만난 눈빛 맑은 네팔아이.
 안나푸르나 가는 지프차에서 만난 눈빛 맑은 네팔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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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로 향하는 산길 곳곳이 파손되어 있다. 산물이 흘러 내려와 진흙탕 길이 곳곳에 함정처럼 깊게 파여 있고 종종 도로 아래로 아슬아슬한 절벽이 나온다. 그야말로 '길이 아니라도 좋다'는 식으로 지프차는 앞만 보고 울퉁불퉁한 산길을 흔들흔들 잘도 달린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이 길은 본래 5년 전까지만 해도 차도가 아닌 사람과 조랑말들이 다니던 길이었는데 그 길을 조금 넓힌 것이라고 한다.

중간에 몇몇 사람들이 하차해 앞좌석으로 옮겨 탔다. 지프차의 종점은 안나푸르나가 코앞에 펼쳐져 있는 란드룩이라는 곳이라 한다. 거기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는 중년 사내가 앉아 있었다.

중년 사내 옆 좌석에는 꼬마 아이가 할아버지 품에 안겨 있다. 나는 그 아이의 눈빛을 보는 순간, 네팔 경찰 아르준과 함께 걸었던 새벽 산책길에서 안나푸르나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생명과 자연의 청정함이 합일 되는 순간처럼 환희심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아르준이 떠난 동네에서 하루를 더 묵었던 이유가 바로 이 아이의 순수한 눈빛과 만나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아이에게 두 손 모아 합장하며 '나마스테'를 건네자 부끄러운 듯 몸을 뒤틀며 배시시 웃음으로 화답한다.

아이의 웃음과 눈빛은 내 어릴 시절의 작은 형의 모습이었다. 마냥 기대어 응석을 부리고 싶은 맑고 초롱초롱한 눈빛의 아이였던 작은 형. 이제 그 아이는 지금 없다. 세파에 찌든 중년의 사내가 되어 더 이상 그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 초롱초롱한 눈빛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안나푸르나 기슭 어딘가에 살고 있을 네팔의 아이는 자신의 눈빛을 통해 내 어린 시절을 보여주고 있었다. 작은 형과 함께 산과 들을 지치도록 뛰어 놀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다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순수한 모든 것들, 순수한 생명들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것들은 세월의 무덤 속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슬프다.

나는 눈빛 맑은 네팔 아이가 내리는 곳에서 따라 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프차 차장은 내 목적지인 톨카에 도착했다며 내리라고 한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아름다운 것들에 집착하게 되면 아름다움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배낭을 챙겨 지프차에서 혼자 내렸다.

묵직한 배낭을 걸쳐 메고 손을 흔들어주자 차장 사이로 아이가 배시시 웃으며 부끄러운 낯빛으로 손을 흔들어 준다. 지프차가 떠나고 아이도 떠났다. 아이가 떠나고 있는 저만치에 변치 않는 히말라야 만년설, 안나푸르나가 반기고 있었다.

톨카 마을과 히말라야 설산 안나푸르나
 톨카 마을과 히말라야 설산 안나푸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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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자비심, #네팔 농촌의 일노래, #캐런볼, #네팔 아이, #톨카마을과 안나푸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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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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