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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를 머리에 이고 있는 란드룩 가는 길. ⓒ 송성영
이른 아침 늘 해왔던 명상을 마치고 뜬금없이 떠오른 생각을 손전화기 메모장을 펼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에게 자비심으로 다가오는 그 모든 것에 엎드려 절을 올리고 나를 구속하는 그 모든 것들에 저항하라, 그 대상이 신이라 할지라도...'

편한 곳에 안주하고 싶은 내 자신을 향한 그 어떤 다짐 같은 당부였다. 안락한 둥지는 여행자를 구속한다. 폭신한 침대에 깔려 있는 침낭을 접었다. 게스트하우스의 중년 부부가 화덕에 불을 지펴 직접 구워 팔고 있는 바나나 케이크 두 조각을 챙겨 짐을 꾸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체크아웃을 하겠다고 말하자 청년이 히죽히죽 웃으며 옷소매를 잡아끈다.

"좀 더 머물다 가시지요."

절룩거리는 내 다리를 쳐다보며 몸도 성치 않은데 좀 더 쉬어 가라며 방값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비수기라 손님이 없어 음식값이라도 받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차마 청년에게 음식값이 너무 비싸다고 말하지 못하고 그냥 빙그레 웃음으로 답하고 이틀치 방값과 음식값을 지불하고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왔다.

게스트하우스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 이곳 돌카에서부터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란드룩(landruk) 까지 한 시간 반 거리로 표시되어 있다. 여전히 다친 무릎이 시원치 않기에 쉬엄쉬엄 두세 시간 정도 걸으면 될 것이었다.

"그 몸으로 걷기에는 무립니다. 한 시간쯤 있으면 란드룩 가는 지프차가 옵니다."
"고맙습니다. 걷다가 힘들면 지프차를 잡아타면 됩니다."

내 몸을 시험하고 싶었다. 두세 시간 거리를 끄떡없이 걸을 수만 있다면 사나흘 걸린다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에 도전하고 싶었다. 평소 같았으면 하루 반나절 이상 걷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니었지만 다친 무릎 때문에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물소들마저 안쓰러운 눈으로 날 쳐다봤다
길을 막고 있는 물소. ⓒ 송성영
게스트하우스를 벗어나자마자 물소 몇 마리가 턱하니 길을 막아서고 있다. 나는 저만치 우뚝 서서 녀석들을 지켜보고 있고 녀석들은 그런 나를 우물 우물거리며 쳐다본다.

"얘들아 나 좀 지나가게 길을 비켜 주면 안 되겠냐?"

내가 우리말로 중얼거리며 사진기를 꺼내들고 다가가자 그때서야 한 녀석이 엉거주춤 일어서 한 쪽 길을 터 준다. 옆길로 지나쳐 갈 때까지 녀석들이 내게 눈길을 떼지 않는다. 경계의 눈빛이 아니다. 녀석들도 내가 걷는 것이 무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 생각에 미치자 녀석들이 눈빛이 어딘가 모르게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는 것 같다.

고오타마 붓다의 전생을 다룬 불교설화집, 본생담(本生談)에 물소가 나오는데 물소 역시 부처님의 수많은 전생의 한 생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처의 또 다른 모습이 어디 물소뿐이랴, 삼라만상, 부처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부처 아닌 것이 없다하질 않았던가. 나를 걱정하는 듯한 저 물소들의 눈빛 또한 부처다.

물소들에게 합장을 하고 뒤돌아서서 걷는데 언덕 위에 세 사람이 보인다. 할머니와 어린 두 손주들이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1시간 후에 도착한다는 지프차에서 아이들의 부모, 할머니의 아들이 내릴지도 모른다. 이들은 1시간이 아니라 몇날 며칠 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대처에 나간 아버지와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활짝 웃으며 사진기를 꺼내들며 찍어도 상관없습니까? 라는 표정을 보냈더니 할머니가 슬그머니 웃는다. 하지만 사진을 찍는 순간 무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본다. 두 아이는 여전히 쑥스러운 표정으로 나와 눈을 마주대하지 못한다. 내가 사진을 찍게 해줘서 고맙다며 합장을 건네자 할머니가 다시 씨익 웃는다.
길에서 만난 아이들과 할머니. 낯설어 하는 두 아이에게서 산골에서 자란 우리 집 아이들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 송성영
사진기 앞에서 무표정하게 먼 산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순수한 표정을 담고자 했던 내 의중을 할머니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거짓된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면 상대도 역시 거짓으로 다가올 것이다. 상대가 거짓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내 안에 거짓이 있기 때문이다. 물소든 사람이든 진심으로 누군가를 대하다 보면 말이 필요치 않는 그 어떤 기운과 온전히 만나게 된다.

꼬질꼬질한 녀석들과 볼을 부비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녀석들이 시야에서 멀어져 가자 '나는 이제 저 인연들과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다가 '영원히' 라는 단어 앞에서 갑자기 눈물이 울컥 솟구친다. 저 두 아이 만했을 때의 우리 집 두 아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우리 집 아이들은 저 아이들처럼 또래 아이들이 없었던 산골에서 자랐다. 꼬질꼬질한 볼을 비벼가며 친구처럼 지냈던 녀석들이 갑자기 보고 싶다.

그리움은 행복한 순간들을 기억해 낸다. 행복은 단순한 삶에서 찾아온다. 농사일을 마치고 흙발을 씻어 돌아와 이른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아이들과 숨박꼭질이며 비좁은 마당에서 축구, 야구 등의 놀이를 즐겼다. 별빛 가득한 밤하늘에 반딧불이가 날아드는 두 평 남짓한 작은 방안에 네 식구가 쪼르르 누워 저마다 보낸 하루의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다가 서로가 '좋은 꿈꿔'라는 말과 함께 잠들곤 했었다. 돈 없이 살았지만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녀석들의 어린 시절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스무살, 다 자라 날개를 달고 둥지를 떠나고 있다. 무엇인가와 영원히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욕망이다.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산다는 것은 때론 행복한 기억에 의지하는 것이다. 행복한 기억들은 살아 가는 이유이며 남은 생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돼 주기도 한다.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다 큰 아들을 둔 아낙네. ⓒ 송성영
언덕 위 밭에서 중년 사내가 손을 흔들어 준다. 어제 저녁 게스트하우스를 찾아왔던 사내다. 트레킹족들에게 대마를 팔고 있던 그는 영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지만 정작 네팔어 쓰기가 서툴러 자식에게 보낼 우편 주소조차 적지 못한다. 하여 어제 저녁 게스트하우스 청년에게 대필을 부탁하러 왔었다.

저만치 밭에서 한 아낙네가 시름에 겨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어제 오후 산책길에서 만난 그녀의 다 큰 아들은 지적장애를 앓고 있다.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어머니 치맛자락을 붙들고 졸졸 따라 다녔던 다 큰 아들은 저만치 밭 가장자리에서 뭔가에 푹 빠져 있다.

아낙네에게는 아프게 품에 안고 살아가는 저 아들 말고도 또 다른 자식이 있을 것이었다. 손 전화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은 그 자식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거나 한 시간 후면 이 마을을 지나가게 될 지프차에서 내릴 또 다른 자식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자식의 어린 시절,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면서.
우산까지 챙겨들고 먼 길을 가고 있었지만 발걸음이 가벼워 보이는 네팔 모자. ⓒ 송성영
숲길에서 만난 네팔 모자가 환한 웃음으로 반긴다. ⓒ 송성영
여행길은 어떤 목적지로 향하여 무작정 걷는 길이 아니다. 길을 걷다가 가슴과 가슴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부러 큰 길을 버리고 지름길인 산길로 접어들 무렵 환한 웃음으로 다가오는 모자를 만났다. 아이의 손에는 우산이 들려 있다. 게스트하우스 청년 말대로 비가 올지 모르기 때문에 걷다가 중간에 낭패를 볼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멀쩡한 날씨에 우산까지 들려 있는 걸 보면 먼 길을 나서는 모양이다. 산악지대에서 한두 시간 거리는 보통의 길이다. 한두 시간 걸리는 친척집에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 멀게는 반나절을 걸어 포카라 가는 버스가 왕래하는 네팔 경찰 아르준의 마을, 룸레이까지 가야 할지도 모른다.

지프차를 이용하면 될 것이지만 산악지대에서 근근이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지프차 요금은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나 같은 배낭 여행자들은 웅장한 히말라야를 조망하기 위해 트레킹을 나서지만 이들에게는 안나푸르나와 함께 걷는 길은 생활이다.

분명 먼 길을 나서고 있음에도 아이의 표정은 들떠 있고 걸음걸이가 가볍다. 목적지 어딘가에 기분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저들의 행복한 표정은 돈과는 전혀 상관없다. 모든 불행은 자본에서 시작된다. 자본에 길들여지게 되면 저들의 걸음걸이는 무거운 걸음이 될 것이다.

네팔 아이들에게서 자식들의 모습을 보다
란드룩에서 바라본 안나푸르나. ⓒ 송성영
한 시간도 채 걷지 않았는데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다친 무릎에서 통증이 몰려온다. 아직 지프차가 지나치지 않았다면 잡아탈 수 있을 것이다. 비라도 내리면 낭패를 본다. 산길에서 벗어나 안나푸르나를 머리맡에 두고 다시 큰 길을 따라 걸었다.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린다는 몬순이 시작돼서 그런지 자신들의 배낭을 포터들에게 떠맡기고 걷는 트레킹족들도 보이지 않는다.

옥수수 밭이 넓게 펼쳐져 있는 작은 마을 길 앞으로 고삐 풀린 말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다가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자 집안으로 들어선다. 이슬비가 이마를 적시기 시작한다. 나는 축축 쳐지는 걸음걸이를 멈춰 걸어온 길을 자꾸만 되돌아본다.

지프차는 보이지 않고 힘겹게 걸어온 길이 내 지난 삶의 자취처럼 다가온다. 늘상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걸어왔다. 배낭을 감지한다. 무겁게 짓누르는 배낭은 내 업이다. 내팽개치고 싶어도 팽개칠수 없는 내가 짊어 가고 가야 할 업이다. 그렇게 톨카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 반 쯤 업보와 같은 배낭을 짊어지고 걸었을 때 저만치서 지프차가 다가왔다.

세 명의 승객이 전부인 지프차를 잡아 탔을 무렵 언제 그랬느냐는 듯 비가 그치고 볕이 쨍쨍하다. 지프차는 10여 분을 달려 안나푸르나를 머리에 이고 있는 란드룩에 도착했다. 더 이상 길이 없다. 란드룩은 게스트하우스들로 즐비했다. 룸베이 마을에서 톨카로 오던 도중에 지프차에서 한 중년 사내를 만났었다.

지프차에서 내리자마자 그 중년 사내가 운영한다는 '헝그리 아이'(hungry eye)라는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갔다. 구름이 오락가락하고 있는 저 웅장한 안나푸르나를 감상하기에 앞서 당장 지친 몸을 뉘이고 싶었다.
내가 묵은 란드룩 게스트 하우스 '헝그리 아이'(hungry eye). ⓒ 송성영
게스트 하우스가 즐비한 란드룩 마을 길. ⓒ 송성영
게스트하우스에는 지프차에서 만났던 중년 사내가 보이지 않는다. 그의 딸이 손님 하나 없는 한가로운 게스트하우스를 홀로 지키고 있었다. 중년 사내는 오늘 아침 일찍 포카라로 떠났다고 한다. 포카라에도 살림집이 있다고 한다. 이곳 란드룩을 오가며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는데 비수기라 게스트하우스를 딸한테 맡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길에 휴지 하나 보기 힘든 말끔한 란드룩 마을처럼 숙소의 창문 커튼이며 침대보 등이 3개월 가까이 인도와 네팔을 여행하면서 머물렀던 숙소 중에서 가장 깔끔했다. 일주일 내내 입고 있던 까만 때물이 절어 있는 흰옷이 말끔한 침대보를 더럽힐까봐 미안할 정도였다.

공동 화장실과 샤워장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방안에서 안나푸르나를 조망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히말라야 트레킹족들이 뜸한 비수기라는 특수성도 있었지만 하루에 100루피, 숙소 가격도 아주 저렴했다. 짐작한 대로 톨카에서처럼 밥값은 아주 비싸다. 이 멀고 험한 곳까지 생필품을 이송하였기에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란드룩 마을은 온통 돌투성이다. 내가 묵기로 한 게스트하우스는 양철 지붕인데 반해 대부분의 산비탈 집들의 지붕은 물론이고 마당조차 판판한 돌이 깔려 있었다. 돌 쌓는 기술이 뛰어나 어느 곳 하나 밟아도 뒤틀림 없이 판판하게 배치해 놓았다.  사람의 손을 거쳐 나온 인공미 보다는 오랜 세월을 거쳐 자연이 꾸며놓은 듯 자연스럽다. 그 어떤 왕실의 인위적인 고급 대리석보다 보기가 좋았다.

그 돌길을 따라 상인 둘이 대나무 장대 양족 끝에 토마토며 채소를 가득 담은 대바구니를 어깨에 걸쳐 메고 내려서고 있었고 그 옆 게스트하우스에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마친 한 무리의 배낭객들이 몰려 있었다.
호랑이 장가 가는 날처럼 멀쩡한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소먹이 나뭇잎을 구하던 사람들이 몸을 피하고 있다. ⓒ 송성영
침대에 잠시 지친 몸을 던져놓고 있다가 밖으로 나와 보니 때맞춰 멀쩡한 하늘에서 한두 방울씩 비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6월 초순부터 시작된다는 몬순이 숙소의 낡은 양철 지붕을 두드려가며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웃 숙소에는 비를 피해 파라솔 밑으로 모여든 동양여자와 긴 머리의 잘생긴 네팔 청년, 그리고 터번에 텁수룩한 수염의 시크교도가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자지러지게 웃고 있다.

저만치 길에서 소먹이로 줄 나뭇잎을 쳐대던 아낙네도 비를 피해 서둘러 나무에서 내려와 주섬주섬 나뭇가지를 챙겨 마을로 들어서고 게스트하우스 아가씨는 마당에 펼쳐져 있는 의자와 식탁포를 건물 안으로 옮겨 놓고 있다.

시야는 산 구름 내려 앉아 점점 짙어져 가는데 나는 '헝그리 아이' 숙소 이층 1번 방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사방팔방을 주시하다가 빗물 타고 오르는 메말랐던 흙 냄새를 맡아가며 김매기 한 옥수수밭과 콩밭을 적시는 풍경을 감상하고 있다.

산과 구름이 맞닿아 있는 안나푸르나를 머리에 이고 있는 란드룩, 저만치 게스트하우스 처마 끝에 비를 피해 오두마니 쪼그려 앉아 서로 딴전을 피우고 있는 두 남녀가 보인다. 저 두 사람은 비 그치면 어디로 갈 것인가.

조금전 옥수수 밭에 시선을 고정시켰던 나는 어느새 처마 밑의 남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나는 텅빈 게스트하우스에서 고장난 무릎 때문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이 긴 수염을 어루만지고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를 안나푸르나 턱밑에 앉아 하염없이 빗줄기만 바라보고 있다.

외로움이 온몸으로 덮쳐 온다. 우리집 아이들에게 카톡 문자라도 날리고 싶다. 하지만 인도에서 네팔 국경을 넘어오면서 손전화기조차 끊었다. 카톡이나 페북 조차 열어볼 수 없다. 빗속에 오로지 나 혼자 뿐이다.

빗줄기는 찰라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지만 나는 그 시간에 갇혀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막막함에 사로잡혀 있다. 정말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일까. 나는 앞으로도 전진하지 못하고 뒤로 돌아갈 곳 없는 공허한 시간을 붙잡고 있다. 아이들이 보고 싶다. 아이들에게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그 등 뒤에 이혼을 요구하는 아이들 엄마가 버티고 있다.
비가 그치자 안나푸르나에 걸쳐 있던 구름이 마을로 내려오고 있다. ⓒ 송성영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온 한 무리의 배낭객들은 내가 타고 온 지프차로 떠나버렸고 조금 전에 보았던 이웃 게스트하우스의 처마 밑 두 남녀도 보이지 않는다. 비만 오락가락 내리고 있다.

언제 나왔는지 아래층 처마 밑에서 게스트하우스 아가씨가 넋을 놓고 빗줄기 바라보고 있다. 저 높은 산 구름 뚫고 내려오던 빛기둥마저 높은 산 구름으로 뒤덮여 가고 있는데 자꾸만 졸음이 몰려온다. 달콤하게 비에 젖고 있는 옥수수밭이 졸음처럼 몰려온다.

졸린 눈꺼풀 사이로 비가 오면 미친 듯이 집 밖으로 뛰쳐나와 빗속을 내달리던 한 소년이 떠오른다. 그 소년은 어디로 갔을까? 종일토록 빗속을 유영하던 소년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나는 여기 멀쩡하게 앉아 있는데 그 소년, 호기심 많던 어린 시절의 나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깜박 졸음에서 깨어나 보니 오락가락 하던 비가 그쳤다. 비 그치자 안나푸르나에 걸쳐 있던 구름이 마을로 내려오고 있다. 그 틈새로 독수리 한 마리가 까마귀 떼에 쫓겨 높이 더 높이 날아오른다. 감히 작은 새들은 따라올 수 없는 더 높은 곳으로 빙빙 돌아 흔적 없는 하늘 계단을 만들어 까만 점으로 사라져 버린다. 구름 속으로 한 점 까마득히 사라져 버린 독수리는 돌아갈 곳 없어 자꾸만 산 깊이 몸을 숨기는 내 처지처럼 다가 온다.

산 깊이 몸을 숨기도록 나를 구속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내 자신이다. 나는 내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는 나를 피해 도망치고 있었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갑자기 사람이 그리워졌다. 저 때묻지 않은 히말라야 설산 안나푸르나 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더 그리워졌다.

슬프거나 행복한 표정으로 다가왔던 사람들, 톨카에서부터 이곳 란드룩에서 만난 사람들의 환한 웃음, 지적장애 아들을 둔 아낙네의 행복했던 그 어떤 시절, 게스트하우스를 홀로 지키고 있는 아가씨를 넋 나가게 했던 그 어떤 아름다운 추억이 절대 신처럼 우뚝 솟아 있는 저 안나푸르나 보다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비가 그치자 란드룩 마을로 구름이 내려앉아 수채화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 송성영
태그:#네팔 톨카, #물소, #트래킹, #랜드룩, #안나푸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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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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