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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낮에도 전등불을 켜 놓아야 한다
▲ 새로 이사한 반지하 내 방 낮에도 전등불을 켜 놓아야 한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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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어때요?"
"맨날 그렇지 뭐.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나저나 제게 큰일이 좀 생겼습니다."
"무슨 일인데?"
"3월 끝자락까지 이사를 해야 하는 데 보증금이 한 푼도 없어서 말입니다. 그냥 짐 다 버리고 다시 낙향을 할까 생각도 해봤는데 곧 딸들이 서울로 올라오잖습니까. 이를 어찌해야 좋을지..."

"보증금이 얼만데?"
"최소 3백만 원은 걸어야 월세 25만 원짜리 반지하나 옥탑방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곳 면목동 주변이 방세가 좀 싸거든요."
"거 참! 정말 큰일이네. 내가 여윳돈이 있다면 당장 해주고 싶지만 요즈음 다들 어렵다고 난리를 피우고 있으니... 우선 급한 대로 고시원이라도 들어가지 그래?"
"짐 땜에요. 어렵게 장만한 짐인데다 큰딸이 올라오면 당장 써야 되잖습니까?"

날이 갈수록 가난한 서민들은 먹고 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중 집이 없는 사람들은 더욱 힘들고 서럽기만 합니다. 특히 이사철이 다가오면 입안이 바짝바짝 타기 시작합니다. 방세가 예전에 비해 많이 오른 데다 마땅한 방을 구하려고 하면 보증금이 턱없이 올라 보증금 마련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정부에서는 전세자금 대출을 해준다고 떠들고 있지만 막상 종잣돈이라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전세금 70% 이내에서 연 4.5% 금리(집주인 확약서로 대출받으면 연 5.5%)로 빌려주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절차마저 까다로워 신용불량에 가진 것도 별로 없는 가난한 서민들은 꿈을 꾸지 못합니다.

며칠 앞, 저 또한 지금까지 1년을 살았던 6평쯤 되는 원룸에서 어쩔 수 없이 이사를 나와야 했습니다. 근데 보증금이 없어 4월 4일까지 집을 비워야 하는데 3월 20일을 훌쩍 넘기고도 발만 동동 굴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해도 보증금 3백만 원을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처럼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보증금이 없거나 보증금 1백만 원짜리 달셋방을 알아보기 위해 제가 살고 있는 면목동과 가까운 사가정, 용마산, 중곡동 주변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하지만 반지하나 옥탑방이라 하더라도 보증금을 최소 3백만 원을 걸어야 했습니다. 여기에 욕실과 화장실이 함께 달린, 좀 깨끗한 방은 월세가 30만원이 훌쩍 넘었습니다.

계단 셋을 밟고 들어서야 한다
▲ 반지하 방 들머리 계단 셋을 밟고 들어서야 한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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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철만 되면 보증금이 가난한 서민 목줄 죈다

"보증금을 좀 더 깎고, 월세로 돌리면 안 되나요?"
"비어 있는 방이라면 적당히 주인과 흥정을 잘하면 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비어 있지 않은 방은 나가는 사람에게 주인이 보증금을 내줘야 하니까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모자라는 보증금을 한 달 뒤에 주면 안 되나요? 갑자기 이사를 나오느라 돈을 구하지 못해서..."
"그렇다면 길은 고시원뿐입니다."

여기저기 부동산에 물어보아도 보증금을 깎는다거나 방세를 깎는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사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 다시 올라와 보증금 3백만 원이 없어 1년 반만에 다시 낙향을 한다는 게 너무나 서러웠습니다. 그렇다고 고향에 반듯한 일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만약 이대로 고향에 다시 내려간다면 오히려 먹고 살기가 더욱 힘들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넋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습니다. 끝내 보증금을 구하지 못하면 모든 짐을 버리고 다시 낙향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마음을 다지며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때 한국문학평화포럼 이승철(50) 시인이 "모든 짐을 버리고 내가 살고 있는 일산 오피스텔로 와. 1층은 당신이 쓰고 나는 2층 방만 쓰면 되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하루가 또 지난 뒤 민통선에서 교회를 꾸리고 있는 이적(52) 목사가 "내가 트럭을 보낼 테니까 짐 몽땅 싸들고 교회로 와. 방이 여러 개 있어"라고 했습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피부에 절로 와 닿았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해남에 사는 언론인이자 시인 윤재걸(61) 선배와 동생, 마산에 살고 있는 지인 등이 보증금을 조금씩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 다음날부터 저는 방을 구하기 위해 면목동 일대 여기저기를 쫓아다녔습니다.

싱크대가 너무 비좁아 그릇 씻기에 불편하다
▲ 싱크대 싱크대가 너무 비좁아 그릇 씻기에 불편하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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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약금, 이사하기 전에 돌려받을 수 없나요            

"어제 가계약한 그 집에 샤워실은 있는데 변기가 없네요."
"제가 화장실이 밖에 있다고 미리 말씀 드렸는데..."
"어떡하죠? 가계약을 파기하면 계약금 20만원을 아예 돌려받지 못하나요?"
"원칙은 그렇습니다만 제가 주인에게 사정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기대는 하지 마세요."

기가 찰 노릇이었습니다. 면목본동에 반지하방을 하나 가계약했는데, 샤워실만 있고 변기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샤워실 안에 변기가 붙어 있는 줄 알고 가계약을 했습니다. 사실, 없는 돈에 20만원을 날렸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했습니다. 그날 저는 부랴부랴 면목본동에 있는 다른 반지하방을 가계약했습니다. 10만원만 걸고.

지난 4월 4일(토) 오후 2시께. 이사하는 날, 부동산에 새로 이사하는 방 보증금을 걸기 위해 갔더니, 부동산에서 그 반지하방(변기 없는) 가계약금을 주인이 돌려주지 못하겠다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럼 돈이 20만원 모자라니 보증금을 280만원만 걸자고 했습니다. 한 달 뒤에 주는 조건으로.

저는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면목본동에 있는 반지하 방으로 겨우 이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지하방에는 원룸처럼 가스레인지와 세탁기, TV 등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할 수 없이 또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조금 더 빌렸습니다. 그 돈으로 중고 가스레인지(3만원)와 중고 세탁기(10만원), 중고TV(5만원)를 사고, 설치비 등을 냈습니다.

이사를 하고 나서 하룻밤을 지내다 보니, 가장 불편한 게 세면실과 화장실이었습니다. 세면실 천정이 너무 낮아 반쯤 엎드려야 겨우 들락거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싱크대도 너무 비좁아 그릇 씻기에 매우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제게 이만한 공간이 주어진 것만 해도 큰 다행이라 여기며 마음을 다독였습니다.

이틀 동안 새로 이사한 방을 말끔하게 청소해 놓고 보니 그제야 이 방이 제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만 같았습니다. 이 방에 앉아 이사와 관련된 일을 다시 한번 곰곰이 떠올려 봅니다. 저는 1980년대 중반 서울에 올라와 1990년 중계동 아파트에 들어가기까지 5년 동안 이사만 무려 10번을 넘게 했습니다.

가리봉동 여인숙에서 시작해 신대방동, 신림동에서 신림동, 봉천동에서 봉천동, 봉천동 산꼭대기, 건대입구 반지하에서 반지하 등지를 돌아다녔습니다. 그 뒤 아파트에 들어간 뒤 출판사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어렵게 마련한 아파트까지 경매로 날려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서울은 제게 집을 허락하지 않는 도시로 여겼습니다.

청소를 하고, 가구를 정리한 작은 방
▲ 작은 방 청소를 하고, 가구를 정리한 작은 방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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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증금에 우는 세입자,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자화상

"아빠! 이사 잘했어?"
"으응. 아빠 주변 시인들이 도와줘서 쉽게 이사를 했어."
"아빠 이사한 집 어때?"
"반지하에다 세면실과 화장실 천장이 너무 낮아 좀 불편하긴 해도 서울에서 적은 돈으로 이만한 방을 구하기도 쉽지는 않아."

이사하는 날, 큰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방이 두 개라고 하니까 큰딸은 대뜸 자기 방이 어떤지 보고 싶다며 사진을 찍어 메일로 보내라고 재촉했습니다. 창원에서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큰딸은 미술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까닭에 방학 때가 되면 서울에 올라와 학원을 다니곤 합니다. 가수가 꿈인 작은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굳이 서울에서 살려고 하는 까닭도 두 딸 때문입니다. 큰딸은 2010년이면 서울로 올라오고, 뒤이어 작은 딸도 2011년에 서울로 올라옵니다. 이 방 계약은 2011년 4월3일까지입니다. 그때까지 얼른 보증금을 많이 마련해 두 딸들이 마음 놓고 공부할 반듯한 1층 방을 구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문득, 제가 창원공단에서 현장노동자로 일할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 저는 창원이 고향이어서 집 걱정은 아예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시도에서 취업을 위해 창원공단으로 온 동료들은 참 자주 이사를 했습니다. 방세가 조금이라도 더 싼 방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저도 리어카에 이삿짐을 싣고 가는 동료를 도운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집 없는 사람들 서러움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서울에 올라오면서부터 저는 이사를 할 때마다 그때 진눈깨비를 맞으며 이삿짐 몇 개 달랑 리어카에 싣고 공단대로변을 허우적 허우적 걸어가던 푸른 작업복 입은 동료들 뒷모습이 자꾸만 떠오르곤 합니다. 

아무리 반지하 방이라도 주인이 자기 살 집처럼 신경을 좀 썼으면 좋겠다
▲ 천정이 낮은 세면실 아무리 반지하 방이라도 주인이 자기 살 집처럼 신경을 좀 썼으면 좋겠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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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주변에는 가진 건 별로 없어도 마음이 참 좋고 따뜻한 사람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이사를 할 때에도 이적 시인이 직접 트럭을 끌고 와 도와주었고, 김이하(50), 최소연(47) 시인 등이 이삿짐을 싸고 나르고 푸는 일을 제 일처럼 했습니다. 그리고 1년 동안 제게 보증금과 달세 한 푼 받지 않고 원룸을 내준 면목동 누나에게도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이 땅에는 집이 우리나라 사람 수보다 더 많습니다. 그런데도 해마다 이사철만 되면 보증금이 없어 쩔쩔 매는 세입자들은 더욱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집값과 보증금, 방세도 턱없이 비쌉니다. 이 땅에서, 특히 서울에서 집 없는 사람들이 발 뻗고 편히 쉴 방 하나 구하기가 이토록 어렵다는 게 말이 됩니까.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덧붙이는 글 | '세입자 이야기' 응모



태그:#반지하, #보증금, #이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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