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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채길순 소설가 채길순은 충북 영동군 백화산자락에서 태어나 1983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 작가 채길순 소설가 채길순은 충북 영동군 백화산자락에서 태어나 1983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 채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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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줏빛 허공을 내젓던 지팡이가 돌무더기 위로 솟은 솟대 끝을 향하자, 지팡이는 금세 뱀이 되어 솟대를 타고 올랐다. 뱀이 솟대 끝에 앉은 새를 덮치려는 순간, 아랑이의 숨도 같이 멎었다. 마침내 새가 날아오르자 어디 있던 새들인가, 어둠의 속박에서 풀려난 새떼가 먹칠하듯 하늘을 덮어버렸다. 이히히히-. 난데없는 할매의 웃음소리가 새떼가 칠해놓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일나거라……."
아랑이가 아주 잠깐 동안의 이상한 꿈에서 깨어나자 어둠 속에서 아비가 내려다보고 앉아 있었다. 다시 못 볼 먼 길을 떠나면서 그새를 못 참고 잠이 들다니, 아랑이는 자신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어미는 검은 꼬리를 끌며 타는 관솔불을 보며 말없이 눈물을 짓고 있었다. 아비가 길 떠날 차비로 초립을 쓰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7쪽, '아랑이'에서  

1995년 '한국일보 광복 50주년 기념 1억 원 고료 장편소설 모집'에서 '흰옷 이야기'로 당선한 작가 채길순. "모든 글에는 동학의 울림이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가 지난 4월 끝자락 장편소설 <웃방데기>(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를 펴냈다. '웃방데기'는 '웃방아기'와 '부엌데기'를 섞은 말로, 천한 계집이라는 뜻이다.

이 장편소설은 올해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아 '동학농민혁명사'라는 큰 산맥을 숨 가쁘게 오르락내리락 내달린다. 이 작품은 어디를 가더라도 눈길 찌르는 손가락질만 받으며 끝없이 짓눌리는 천민들… 그들이 온몸으로 마주치며 옹골차게 보듬은 갑오년 한울꿈이, 핏방울처럼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잎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한울'이란 천도교에서 '하늘', 곧 '우주본체'를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 '한'은 '큰', '울'은 '나, 우리'를 일컫는 말로 '큰 나, 큰 우리' 혹은 '큰 세상'이다. '큰 나' '큰 우리' '큰 세상'은 곧 동학농민군이 꿈꾸었던 한울꿈이다. 다시 말하자면 바르고, 진실이 가득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바람이다.

이 장편소설에 나오는 모든 이들은 그 한울꿈을 거머쥐기 위해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는 굳센 삶을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사라지는 죽음을 기꺼이 껴안는다. 작가 채길순은 이 작품에서 이름조차 제대로 없는 민초들이 지닌 뜨거운 희망과 끝없이 무너지는 안쓰러운 삶을 보듬고 잰 발걸음으로 내달린다.

이 책은 모두 30부에, 지금으로부터 120년 앞 무너졌던 그 한울꿈을 다시 일으킨다. '아랑이', '고리백정 을동개', '갑이, 계집종 나비를 얻다', '동학교도와 이대감', '갑이, 아내를 빼앗기다', '갑오년 봄 난리', '갑오년 가을 난리', '나비, 동학농민군 대장이 된 오라버니를 만나다', '통곡의 우금치 싸움', '하늘 아리랑' 등이 그 한울꿈이다.

작가 채길순은 '작가의 말-한울꿈을 꾼 사람들의 노래'에서 "몇 해 전에 일본의 어느 대학 연구소 창고에서 해골이 발견되었는데, '東學首魁'(동학수괴)라 씌어 있었다"며 "추적 결과, 학자들이 반란자들의 반골(叛骨) 기질을 연구하기 위해 조선에서 동학 농민군 두령의 머리를 도굴하여 들여간 사실이 밝혀졌다"고 말문을 연다.

그는 이 '반골 기질'에 대해 서슬 퍼런 대못을 쾅쾅 박는다. "반란자란 살면서 원한 때문에 목숨을 걸고 저항한 것이지 어찌 반골 기질을 타고 난단 말인가"라고. 그는 "학문을 연구한다는 이들의 짓거리가 이토록 어처구니없다"며, 이번 작품에 대해 "어린 날부터 내 머릿속에서 떠돌던 '동학이야기' 조각들이 구름으로 모여들어 한줄기 비가 된 것"이라고 귀띔했다.

동학농민혁명! 여기 우리 아픈 역사 내놓는다

채길순 장편소설 <웃방데기> 이 장편소설은 올해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아 ‘동학농민혁명사’라는 큰 산맥을 숨 가쁘게 오르락내리락 내달린다.
▲ 채길순 장편소설 <웃방데기> 이 장편소설은 올해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아 ‘동학농민혁명사’라는 큰 산맥을 숨 가쁘게 오르락내리락 내달린다.
ⓒ 모시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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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이는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농기구를 벼려 주거나, 강오위장이 만들어두라던 창과 칼을 벼리고, 저녁으로는 군사조련을 했다. 서장옥 손천민 강오위장은 머지않아 무기를 들어야 할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과연 갑오년 정초부터 아랫녘에서 난리 소문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전봉준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반기를 들고 군아를 습격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전라감사 김문현이 황급히 나서서 조병갑 대신 박원명으로 군수를 교체하여 당장 급한 불을 껐다는 것이다. /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달이 뜨자 어둠 속에 엎드려 있던 만물들이 천천히 몸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86~187쪽, '달집태우기'에서

이 장편소설은 일제가 짓밟던 조선 끝자락, 종과 백정이라는 신분이 가장 낮은 사람들이 겪는 살 찌르는 삶이다. 이들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평등한 세상을 거머쥐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친다. 보국안민과 계급해방을 위한 교조신원운동인 공주·삼례집회(1892년), 광화문복합상소와 보은집회(1893년) 등을 거쳐 갑오년인 1894년 정월에는 고부민란에, 3월에는 전주성 함락 등으로 한울꿈이 눈앞에 다가온 듯 했으나….

그해 9월 동학연합군이 공주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관·일본군이 벌인 동학농민군 토벌과 대학살 등을 거치면서 그렇게 바랐던 한울꿈은 신기루로 사라지게 된다. "동학농민군의 저항은 날이 밝고 한나절 동안이나 계속되"었지만 "동학농민군의 시체는 북실 골짜기 곳곳에 차곡차곡 쌓여갔다"(그해, 12월 17일 밤)처럼.

이 책을 펴낸 '모시는사람들'은 "동학농민혁명! 역사의 뒤뜰 가득히 우거진 풀과 꽃들을 헤치고 여기 우리의 아픈 역사를 내놓는다"며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라면, 이 소설은 역사의 그물에서 놓친 패배자의 사연과 곡절을 낱낱이 파헤쳐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의 분노와 피울음으로 얼룩진 한을 핍진하게 기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작가 채길순은 이 장편소설을 쓰게 된 까닭에 대해 "어둡고 적막한 숲 가운데 눈동자 같은 양지마당"에 갔다가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박물관 진열대에서 뼛조각을 퍼즐처럼 꿰어 맞춰서 그물을 씌운 모양의 해골을 보았는데, 어느새 그것이 내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고 귀띔한다.

작가는 그때 "갑자기 숲의 머리를 쓸어가는 소소한 바람소리"를 듣는다. 그 바람소리에서 "함성과 함께 흰옷 입은 동학농민군이 구름처럼 일어"나면서 "난데없이 소나기 같은 총성과 함께 동학농민군이 짚단처럼 쓰러"지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이 장편소설은 그 환상을 비집고 태어났다. 다시 말하자면 "오랫동안 내(작가 채길순) 머릿속을 떠돌던 설화의 잉크가 부글대며 끓어올라 펜 끝에서 살아난 이야기"라는 것이다.

나는 이 장편소설을 읽으며 가슴을 몇 번이나 탕탕 쳤다. 왜 우리나라 역사는 '죽임과 죽음의 역사'처럼 이리도 아프고 한 맺힌 일들만 거듭되는가 억울해서였다. 해방이 된 뒤에도 그랬다. 피붙이 살붙이끼리 총을 마주 쏜 한국전쟁을 거쳐 3.15와 4.19, 5.16도 모자라 1980년 5월 광주학살까지. 그 뒤에도 편한 날이 없었지 아니한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 맺힌 우리 역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넝가주소.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 넘어를 간다……

나비의 노래가 먼 하늘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아니다, 이는 종으로 한 많은 삶을 살다가 죽어가면서 부르던 할매의 노래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다.
"할매요, 어무이요! 내는 인제 종년 아이라요. 그라고 사람맨치로 잘 살 낍니더."
먼 산에서 '우우웅-' 대답 같은 산 메아리가 되돌아왔다.
-298쪽, '하늘아리랑' 맨 끝자락 

활빈당 행수였던 아버지 김봉남이 머리가 잘려 종로에 내걸리자 충청도로 내려와 계집종 아랑이와 살다 이 대감에게 빼앗기고 동학농민혁명에 뛰어드는 갑이, 동학농민혁명에 뛰어든 갑이가 보은 북실에서 죽음을 당하자 딸과 바우덕이 아들을 데리고 새 터전을 찾아나서는 아랑이, 고관대작들 재물을 훔쳐 나눠주는 활빈당 행수이자 대동계 두령 노릇을 하다가 붙잡혀 목이 잘린 김봉남, 이 대감 댁 종으로, 동학교도가 되었으나 아내를 이 대감에게 빼앗긴 뒤 덤벼들다 죽음을 당하는 바우덕이, 양천 고을 고리백정으로 '경성습격사건'에 뛰어들면서 도성 안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동학지도부에 몰래 알리는 일을 하다 공주전투에서 죽는 을동개.

그래. 이 장편소설에 나오는 갑이와 아랑이, 갑이 아버지 김봉남, 작가 유시연 장편소설 <바우덕이>에도 나오는 그 바우덕이, 을동개 등과 동학농민군들은 어쩌면 우리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얼마나 수많은 이들이 분신 혹은 의문사, 투신자살, 사고 등으로 죽었는가.

그 뼈아픈 역사는 '어제'로 끝나지 않고 오늘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금도 세월호 침몰참사로 전국 곳곳에 수없이 나부끼는 노란 리본과 저녁때마다 열리는 촛불집회에 삼삼오오 몰려드는 저 시민들. 저들이 그때 '한울꿈'을 꾸던 그 동학농민군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무늬만 다를 뿐 크게 달라진 게 없지 않은가.            

작가 채길순 장편소설 <웃방데기>는 작가가 처음 짧게 썼던 '나비 이야기'에 천민들이 피눈물을 무기로 삼아 싸웠던 아픈 이야기를 보탠 작품이다. 이 장편소설은 하루아침에 나온 작품이 아니다. 작가 채길순은 그동안 신문과 잡지 등에 그야말로 '발로 쓴 동학' 이야기를 소설과 기행문으로 수차례에 걸쳐 연재했기 때문이다.  

종과 백정들을 짚신으로 삼아 내달린 동학농민혁명사! 그 속내를 가장 폭넓고 깊이 있게 다룬 장편소설 <웃방데기>. 이 장편소설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한 맺힌 우리 역사다. 오늘도 대물림처럼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는 그 쓰라린 역사는 그 어떤 거센 비바람이나 너울로도 결코 지울 수 없다. 

그래. 지금도 "날이라도 꾸물꾸물하면 구천을 헤매던 동학농민군 원혼들의 구슬픈 울음이 실낱같이 피어오르거나, 푸른 불꽃들이 반딧불이 같이 날아다녔고, 가끔은 상여소리가 들려서 사람들이 이 길을 피해 다니는 바람에 딴 길이 나게" 되었다는 작가 채길순이 '작가의 말'에서 쓴 그대로.  

소설가 채길순은 충북 영동군 백화산자락에서 태어나 1983년 <충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95년에는 '한국일보 광복 50주년기념 1억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흰옷이야기'가 당선되었다.

장편소설 <동트는 산맥>, <흰옷 이야기>, <어둠의 세월>, <조캡틴 정전>이 있으며, 기행서 <새로 쓰는 동학기행1>, 소설 창작 이론서 <소설 창작의 길라잡이> <소설 창작 여행 떠나기>를 펴냈다. 지금,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소설을 가르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문학iN에도 보냅니다



웃방데기 - 한울꿈을 꾼 사람들의 갑오년 이야기

채길순 지음, 모시는사람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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