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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005년 11월, 남편은 이곳 대구에서 먼 강릉으로 발령이 났다. 1년 정도 머물 수도 있지만, 확률적으로 다음 인사가 있는 6개월 후에는 다시 대구로 갈 수 있다고 했다.

"집 알아봐라."
"시끄럽다마, 아는 우야고. 그냥 대구 있어라."

남편은 나와 아이가 고생할 것을 염려해서 홀로 관사에 머문다고 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남편의 건강이 염려되었기 때문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갈 거니까, 집 알아봐. 아님 내가 올라가서 알아보고."

은근히 고집이 세다는 것을 남편은 익히 잘 알기에 두 번 걸음 하지 않게 며칠 있다가 전화가 왔다.

"원룸 하나 구했다. 보증금 100만 원에 월 30이다."
"어떤데, 집은 괜찮아, 몇 층이야?"
"1층이고, 그냥 원룸이다."
"왜 하필 1층이야, 다른 층 없어?"
"이것도 겨우 구했다. 찬밥 더운밥 따질 때가 아니다."
"알았어. 준비되는 대로 올라갈게."

기간도 짧고 멀기도 했기에 간단하게 이불이며 옷가지, 식기도구 등을 챙겨 승용차에 실었다. 딸아이를 태우고 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낯선 곳으로 향하는 기분은 묘했다. 새 고속도로 덕분에 가는 길이 수월하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먼 줄은 몰랐다. 아마도 그동안 한 번도 대구를 떠나 산 적이 없기에, 대구와 멀어지는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져서 그랬는지도.

강릉에 도착해서 퇴근한 남편과 함께 원룸으로 향했다. 학창시절, 대학가 원룸을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살게 될 줄 어찌 알았을까? 그것도 혼자가 아닌 세 식구가 말이다.

간단히 짐을 풀고, 텔레비전을 틀었다. 14인치 작은 크기가 다이얼을 돌려서 나오는 것이 놀러 와서 여관방에 온 듯하다. 헌데, 텔레비전 나오지 않는다. "지지지" 어찌 된 걸까? 고장 난 걸까?

3층에 살고 있는 주인집에 전화를 했다. 결론은 스카이라이프를 달아야 화면이 나온다고. 그 날은 시청을 포기하고 다음날 설치기사가 왔다. 기기 하나를 연결하자 화면이 나온다. 어째 설치기사가 우리 식구를 불쌍하게 쳐다보는 듯하다. 아님, 나의 자격지심일까? 평소 남의 시선 의식 안하는 편이지만 문뜩 그런 생각이 든다. 저 사람은 과연 우릴 어떻게 생각할까?

화질도 썩 좋지 않은 작은 티비도 몇 만 원의 설치비가 들었다. 게다가 한 달 요금은 8800원. 그렇다고 안 달 수는 없다. 이 추운 겨울 낯선 곳에서 그래도 무료함을 달래기에, 적막감을 없애기에 티비만한 것이 있을까?

싱크대를 보니 가스레인지가 없다. 할 수 없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 공간도 좁고 휴대용가스레인지가 제격이다. 고기를 구울 때는 밑에 내려놓을 수도 있고 장점도 있다. 하지만, 가스쿡이 세 개인 것을 쓰다가 하나인 것을 쓰자니 불편하다. 압력밥솥을 썼는데, 밥 해 놓고 국 끓이고, 반찬하기가 번거롭기는 하다. 더구나, 부탄가스가 그리 용량이 작은 지는 미처 몰랐다. 얼마나 잘 떨어지던지. 놀러 다니면서 쓸 때와는 다르다. 해서, 쌀과 함께 부탄가스는 우리 집 필수품이 되었다.

더구나, 강릉은 관광지여서 식당 물가가 비쌌다. 물가가 싼 대구와 비교하면 두 배는 비쌌다. 예를 들어, 대구에서는 2~3만 원이면 먹던 회가 5~6만 원 줘야 하고, 돼지갈비도 대구에서 1인분에 3000원일 때 여긴 6000원이었다. 대구 물가에 익숙한 내가 외식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조그마한 냉장고도 불편했다. 양문형 냉장고에 김치냉장고까지 있어서 수납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는데, 공간이 공간인지라 장도 조금씩 자주 봐야 했고. 무엇보다 대구에서 가지고 온 김장김치는 둘 곳이 없었다. 베란다도 없는 1층이라 승용차 트렁크에 보관했다. 그나마 겨울이라 다행이었다.

거기다 이 냉장고가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주인은 이사 오기 직전 다른 냉장고로 교체했다) 돌아가는 소리가 장난 아니었다. 물론, 방이 따로 있고 문이 있었으면 좀 나았을 텐데 말 그대로 원룸이라 냉장고를 코앞에 두고 잠을 자는 것은 곤욕스러웠다.

나와 남편은 어른이기에 참을 수 있지만, 유치원 졸업을 앞둔 딸아이에게는 여간 미안하지 않았다.
"시끄럽고 친구도 없고, 답답하고 힘들지?"
"괜찮아, 엄마. 난 책이 친구잖아. 책 보면 돼" 하면서 엄마를 위로한다. 나도 힘든데 어린 딸이 뭐가 힘들지 않을까? 원룸 생활을 벗어났을 때, '원룸 싫어, 다시는 살고 싶지 않아' 한 것을 보면 딸도 분명 힘들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날 위로해 주었다.

힘들어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고 했던가? 봄이 오고, 대구로 갈 날이 다가 오자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조금만 고생하면 된다 싶어서. 그러던 어느 날, '똑, 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3층에 살고 계시는 주인집 할머니다. 가끔은 그렇게 방문을 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헌데, 내 예상과 달리 문이 열리자 대뜸,

"대체 이 집은 보증금 100만 원 언제 줄 거야?"
"계약할 때 남편이 드린 걸로 아닌데요."
"난 받은 기억은 없는데"

황당해서 계약서를 봤다. 보증금은 적혀 있는데 '영수함'이란 주인집 글씨는 없다. 계약서만 보면 보증금을 준 흔적이 없다. 계약 당시 기억을 더듬어 봤다. 남편과 통화에서,
"보증금은 은행으로 송금하지?"
"됐다. 얼마된다꼬. 기분 좋게 바로 드릴란다."
해서, 은행에서 돈을 찾아 준 것으로 알고 있다. 남편이 퇴근하고 오자 보증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 남편은 현금이 아닌 수표로 지불을 했다.

"내 혹시나 싶어서 수표 번호는 적어 놨다" 하면서 메모한 수첩을 들고 3층 주인집으로 올라갔다. 수첩을 보여 주자, 받았다고 한다. 만약, 보증금을 받지 않았다면 나갈 때가 다 될 때까지 이야기하지 않을 턱은 없을 것이지만, 아무튼 수표 번호가 없었더라면 보증금을 받지 못할 뻔 했다.

대구로 발령이 나고 간단하지만 떠날 준비를 했다. 그 중의 하나로 스카이라이프에 해지전화를 했다. 헌데, 황당했다. 요금은 분명 우리가 냈는데, 원룸이라 주인집 명의로 되어 있어서 난 해지 권한이 없단다. 순간 기분이 울적해졌다. 집 없는 설움이 아니라 원룸에 사는 설움이었다.

전기세는 다행히 따로 미터기가 되어 있어서 쓴 만큼 냈지만, 수도는 그렇지가 못해서 두 달에 2만 원씩 내야만 했다. 원룸에서 얼마나 쓰겠는가? 하긴, 세 식구 사니까 우린 억울할 게 없다. 혼자, 거의 잠만 자는 경우는 조금 억울하지 싶다. 

그런 속에서도 즐거움은 있었다. 평소 남편은 주말에 잠을 즐긴다. 완전 곰이다. 헌데, 원룸이라는 공간은 그것이 힘들었다. 좁은 공간에 코를 골면서 늘어지게 자는 남편이 워낙 자리를 차지해서 불편했고, 남편 또한 텔레비전 등 각종 소리에 민감해서 잠이 일찍 깨었다. 잠이 깨면 원룸이 답답해서 밖으로 나갔다. 덕분에, 가까운 경포대부터 대관령에 있는 양떼까지 구경은 잘 했다. 대구에서 강원도 놀러가기는 쉽지 않기에 함께 한 여행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값진 교훈은 그동안 너무나 당연히 여겼던 것들에 대한 감사다.  김치를 넣을 수 있는 넉넉한 냉장고가 있다는 것이, 세탁기가 있다는 것이, 피시방에 가지 않아도 마음껏 할 수 있는 컴퓨터가 있다는 것이. 우리 세 식구 함께 편히 쉴 수 있는 방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를.

더욱 값진 것은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언제나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줄 남편과 나, 딸 이 세 식구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세입자이야기' 응모글



태그:#원룸, #세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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