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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을 막 넘기고 창창한 혈기를 앞세워 군에 입대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통령을 내 손으로 뽑을 수 있는 감격스러운 기회가 왔다. 그때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후보단일화가 무산되고 노태우의 어부지리 열풍이 걷잡을 수 없이 드셌다.

규칙적인 생활로 볼살은 탱탱하게 불어 올랐지만 연일 계속되는 훈련과 작업으로 인해 마음은 남루해져만 갔다. 속된 말로 이리 쫓기고 저리 밀리는 졸병이 민주화 바람이 불건 말건, 대통령이 어느 누가 되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멀리 있는 애인의 야릇한 편지 한 통이면 정강이 시퍼렇던 멍도 확 풀리고 말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 군에 입대하였던지라 굴절된 시국의 현안을 바로보지 못했다. 입대 전에 다니던 회사는 S전자였는데 전태일 열사의 분신마저 왜곡되게 교육하는 곳이었다. 전태일 열사가 대중 앞에서 몸에 신나를 뿌리는 '쇼'를 하는데, 주위사람들의 부추김이 있어 엉겁결에 개죽음 당한 걸로만 알았다. 정말 무식하고 무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죄 없는 시민들의 육신이 유린당하는 5.18민주화 항쟁을 똑똑히 보았으면서도 그저 폭도들의 난동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선생님의 말씀만이 올바랐고 교과서만이 바른 척도라고 믿었었다.

농사꾼인 아버지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가방 끈이 꽤나 길었던 삼촌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냥 모르는 게 약이라는 무언의 암시뿐이었다. 그러던 내가 군에 입대하여 나보다 두 살 많던 동기 녀석에게 그렇게 맹신했던 ‘모범대한민국’의 참모습을 알게 되었다. 가면 속의 추잡한 얼굴을 보기 시작하였다. 나는 새벽별이 보이는 초소에서 망치로 둔부를 쾅하니 얻어맞는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막 무언가에 눈을 뜨기 시작할 때 나에게 첫 대통령 선거가 닥친 것이다. 누구를 찍어야만 이 나라가 바로 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돌이켜보면 별반 달라진 것도 없었지만). 드디어 투표일 보다 며칠 앞서 실시되는 부재자 투표 전날이 되었다.

그런데 그날은 참말로 이상야릇했다. 연일 지겹게 이어지던 훈련이며 작업 명령이 뚝 그쳤다. 아침부터 주황색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연병장에서 축구도 하고 족구도 하였다. 모처럼만에 고삐가 풀린 것이다. 덩달아서 그 유명한 포천 막걸리가 몇 동이 들어오고 구수한 삶은 돼지고기가 푸지게 조달되었다.

고참들이야 피식피식 웃고 그런 분위기를 즐겼지만 신참들이야 무슨 영문이지 모르고 어안이 벙벙한 채로 마냥 좋아했다. 그리고 웃기는 것은 살모사 같은 인사계의 얼굴이 꼭 하회탈마냥 연신 웃고 있었고, 근엄한 얼굴의 포대장도 자상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 일과가 끝나고 저녁 점호까지 포대장님(포병)과 사병간의 일대일 면담이 이어졌다. 그때부터 사병들은 사태파악을 하였는지 부대에는 온갖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언제 누구는 야당후보를 찍었다가 영창을 갔다더라’
‘아무리 비밀 투표라 해도 부대별로 투표율이 집계되어서 야당 투표수가 높은 부대는 좆뺑이친다더라’
뭐, 이런 흉흉하고 간 떨린 소문들이었다. 그리고 고참들까지 이런 소문의 진상을 일일이 일러주고 은근히 종용하였기 때문에 더더욱 믿을 수밖에 없었다.

포대장님과 나의 일대일 면담 차례가 왔다.
“어? 김일병은 김대중이하고 고향이 같네......음, 오늘 막걸리하고 돼지고기 무슨뜻인지 알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포대장님.”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그땐 그렇게 어린 마음에 충성어린 대답을 하였다. 이어지는 포대장님의 말씀이 긴 여운을 남겼다.
“김일병도 요즘 고생이 많을 거야. 부모님은 보고 싶지 않나? 휴가 언제 다녀왔지?”

다음날, 인생의 첫 대통령 선거에서 대한민국의 당당한 투표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없었다. 그냥 죽고 없는 껍데기였다. 맘에 없는 여당 후보를 내 손으로 찍는 순간도 어느 보이지 않는 눈이 나를 감시하고 있는 줄 알았다. 투표하고 나가면 어느 누가 내 투표용지를 펴 볼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나의 부끄러운 첫 대통령 투표는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제대하고 나서 그 투표일만 생각하면 얼마나 나 자신이 병약하고 한심한 청년이었는가를 두고두고 후회하였다. 그러면서도 술자리에서 군대얘기가 오갈 때, 나는 그런 회유와 엄포를 무릅쓰고 당당하게 소신껏 투표하였노라고 허풍을 떨었다.

벌써 15년이 지난 나의 한심한 과거를 털어놓았다. 그 시절 부끄러운 선거를 치른 뒤 벌써 세 번 째 맞는 대통령 선거가 돌아온다. 그 뒤로 치른 두 번의 대통령을 뽑는 내 한 표가 정말 소신껏 행사했는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본다.

혹시나 만연한 지역주의 바람에 편승하여 앞뒤 가리지 않고 투표를 하지 않았나, 아니면 나의 편협한 가치관에 얽매여 정책을 들여다보지 않고 인물만을 보고 표를 던지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그리고 다가오는 투표일까지 각 후보자들이 내세우는 정책들을 꼼꼼하게 가늠해보고, 또 한 번 샅샅이 훑어보아서 후회없는 한 표를 던질것이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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