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여보, 우리 이사하면서 전자제품 몇 개는 새로 사야할까 봐요.”
아내는 이삿짐을 싸다 말고 너덜너덜한 살림들을 어루만지며 넌지시 물어왔다.
“그래, 십 년도 훨씬 넘었겠다. 우리 햇빛이 손에 남아날 재간이 있을라구….”

“하지만 새로 장만해도 걱정이네요. 햇빛이 손닿지 않게 천정에다 매달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뒤꽁무니 졸졸 따라다니며 말릴 수도 없으니.”
낡은 TV며 비디오를 이쪽저쪽 매만지다 말고 갑자기 한숨 섞인 혼잣말을 했다.

“뭐, 두 돌 안 된 애들이야 다 그렇지…. 지 맘대로 뒹굴 수 있는 장난감 방을 만들어 주면 저런 것들은 관심 밖일 거야. 그렇지?”
“아이구 참, 당신은 햇빛이를 너무 모르네요. 저 까탈스런 성깔이 하루아침에 조분 조분해지겠어요?”

그렇게 걱정을 앞세우면서 새로 장만한 살림살이를 들고 이사 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으악! 여보, 햇빛이 좀 봐요. 왕거지에다 왕땅강아지가 따로 없네요.”
웬 날벼락 치는 소리인가 싶어서 화들짝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옴마야, 저 왕거지꼴로 도롱테마냥 뒹굴고 있는 얘가 우리 햇빛이란 말야?”

햇빛이는 눈만 빼꼼이 말똥말똥 뜨고 무엇인가 열심히 쥐어뜯고 있었다. 꼭 땅 속에서 푹 묻혀 있다가 이제 금방 밖으로 나온 땅강아지 같았다.
“당신은, 보고도 몰라요? 당신의 그 잘난 땅강아지 교육의 결과잖아요.”
아내는 조롱 섞인 말을 내뱉으며 부리나케 달려가 흙을 터는지 얘 궁둥이를 때리는지 모르게 소란을 피웠다.

‘하, 저 녀석 생각보단 훨씬 ‘흙’하고 친하게 잘 지내고 있네?‘
머리에서 발끝까지 흙으로 뒤범벅인 채로 온갖 허접쓰레기들을 마당 한가운데다 몽땅 모아놓고 있었다. 거기다가 너른 마당 전체를 난해한 그림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피카소의 추상적인 그림으로 보아줄만 하였다. 피카소나 햇빛이의 그림이나 이해하기 힘든 점에서 말이다.

그동안 옭아 세웠던 마음이 포옥 내려앉았다. 처음에 아내가 얼마나 걱정을 했던가. 채 두 돌이 안 된 우리 햇빛이가 마당에서 콩알만 한 돌이라도 집어삼키면 어떡하나.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히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아내는 창밖을 내다보며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있었나보다. 웃기도하다가 놀래기도 하면서.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로 이사를 하고나니 한순간 식구들의 낙담은 컸다. 도회지에 비하면 읍내는 조촐하기 짝이 없는데 그 읍내에서도 더 떨어진 곳이니 식구들의 서운하고 허전한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아마도 잘 짜여진 구도에서 갑작스럽게 밀려나버린 황당함과 소외감을 떨쳐버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이들이야 별 문제가 없었지만 아내는 더 유별난 것 같았다. 평소에도 말이 없는 성격인데 거기에서 말수 몇 개는 더 잘라 내버린 것 같았다. 그런 아내에게 시골로 밀려나 버린 낙담을 위로해줄 위안거리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막내 딸 햇빛이의 괴팍한 오지랖을 고쳐놓겠다는 제안이었다. 무엇이든지 그 고사리 손에 걸리기만 하면 막된 말로 ‘아작’을 내버리는 우리 햇빛이가 아니던가. 된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보기도 하고 볼기짝을 때려보기도 하였지만 막무가내였던지라 내심 반기는 눈치였다. 한편으로는 미심쩍은 눈초리가 역력하였는데도 말이다.

“그게 다 도회지 병이야. 딱딱한 시멘트하며 무서운 자동차 때문에 아이들이 맘대로 뛰어놀 수가 있어야지. 자꾸만 제지만 당하다보니까 아이들도 반발심에서 화풀이하는거라구.”
“맞아요, 생각해보니 햇빛이 꽁무니만 쫓아다니며 자꾸만 손 뿌리치는 법만 가르쳤던 것 같아요.”

살짝 둘러대는 말이 아니었다. 가게에 딸린 단칸방에 살면서 얻은 것도 많았지만 우리 햇빛이에게만은 잃은 것이 더 많았던 것이 분명하다. 아장아장 걷는 걸음이 그냥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밖에 여겨지지 못했다. 비척거리면서도 조금 넓게 나아가는 마음을 열어주지 못했던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우리, 이참에 햇빛이를 마당 맨 땅에서 실컷 놀라고 한 번 풀어줘 보자구. 흙이나 풀들하고 더러는 개미나 지렁이들과도 친하게 만들어 보자구. 땅강아지의 화려한 외출처럼말야.”
아내는 미심쩍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흔쾌히 대답했다.
“모처럼 당신 생각에 동감이 가네요. 그렇지만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니네요.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죠?”
“그놈의 감기 한 번 걸리면 어때? 걱정하지 말라구......”

그렇게 안타까워하면서도 ‘요절복통 햇빛이 땅강아지로 길들이기’는 시작되었다. 며칠이 지나고 이제 한 달이 다 지나가지만 아내의 기우는 보기 좋게 빗나가버렸다. 신기하게도 겨울 내내 감기를 달고 살던 아이가 아직까지 무사 거뜬하다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쾌제를 불렀다. 거, 땅강아지가 감기 들었다는 소리 들어봤는가.

그리고 언제쯤이었을까. 반신반의했던 우리 햇빛이의 까탈스런 성격이 점점 변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예전처럼 산만하고 제 비위에 거슬리면 집어 던지고 보는 까탈스러움이 어느 순간부터 조분 조분해지기 시작했다.

밖에서 뒹굴며 가지고 놀던 사물과 집안에서 조몰락거리는 사물을 구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참으로 신기했다. 땅심과 인간의 교감을 차단해버린 시멘트 바닥이 없으니 금방 흙의 온유함을 닯아가고 있었나 보다.

거기에다 또 덤으로 깨달음 하나를 더 얻었다. 읍내에서 사는 동안은 햇빛이는 시멘트 바닥에 이리쿵저리쿵 하면서 상처투성이였다. 한 번 난 상처는 잘 아물지도 않았다. 반드시 화학약품을 발라줘야만 쉬이 아물었다. 알게 모르게 항생제를 비롯한 화학물질에 길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맨 흙을 뒹굴고 뛰어다니다가 혹 넘어져도 잘 다치지 않았고, 설령 다쳐다하더라도 금방 아문다는 점이었다. 따로 가슴 졸이며 약품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그게 바로 흙의 힘이고 땅심의 증거가 아닌가 싶었다.

겨울 햇볕이 따뜻한 날에 어린 딸 햇빛이는 뒤뚱뒤뚱 걸음으로 까르르르 웃으면서 맘껏 뛰놀고 있다. 넘어졌다고 조급함으로 달려가 일으켜 세우지도 않는다. 하늘과 바람과 땅과 풀, 그리고 우리 햇빛이가 도롱테처럼 또르르르 굴러가는 그림을 지켜만 볼 뿐이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