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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좀처럼 카페에 나오지 않는 아내가 요즘 들어 부쩍 카페 출입이 잦아졌습니다. 하! 저 사람이 장사가 잘 되지 않는 카페 사정을 어떻게 알았지? 아무튼 사람은 오래 겪어보고 볼 일이야. 그래, 고마워. 당신 손님도 꽤 있을 거야. 당신을 만나러 오는 사람도 있을 거야. 그렇지?

며칠을 가만히 두고 보니, 제법 만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내가 언제 저렇게 사람들을 많이 알고 지냈지? 의아해 하면서도 가슴 한 편으로는 뿌듯합니다. 꿔다 논 보릿자루인 줄만 알았는데 제법 사람을 만나는 모습이 부티나고 폼이 납니다. 지긋이 상대방을 바라보는 눈매는 지성미가 넘치고요. 말끝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짓는 미소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폭 빠져드는 묘한 감정을 갖기에 충분합니다. 상대가 여자들이었기에 망정이지 남자였더라면 큰일날 것 같습니다. 천만다행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아내는 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메모지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기록하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곁눈질해 보면 자신에 넘치는 표정을 짓기도 하고 어떨 때는 양쪽 미간을 내리깔며 호소 섞인 측은한 표정도 짓기도 합니다.

아니 저 사람이 무엇 때문에 저렇지? 참말로 이상도 하다. 오늘 저녁에는 기필코 알아보아야지. 궁금해서 복장이 터질 지경입니다. 커피 마시다 리필을 주문하면 살짝 곁귀로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을라치면 그만 뚝 대화를 그치고 내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물어 보아도 시원한 대답이 없고 그냥 얼버무리는 것이 분명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게 분명합니다.

우연찮게 기회가 왔습니다.뒷 좌석에 앉은 ㅂ형이 잠깐 나 좀 보잡니다. 지난 번 '우리 카페에서는 티켓다방 아가씨에게 차배달을 않는다'고 거절했던 일이 있던지라 서운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벌주 한 잔 받으라는 거지요. 지은 죄(?)도 있고 해서 자리에 앉아 술 한 잔 받았습니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앞 좌석에 앉은 아내의 무리(?)들의 대화내용을 듣게 되었습니다.

"선희 엄마, 이제 이해가 되지? 이건 참 쉬운 사업이야."
"아니, 그래도 좀 미심쩍은 부분이 많은 것 같아. 그게 진짜로 효과가 있을까?"
"에그 참, 선희 엄마는 여태 무얼 들은 거야? 자자, 다시 한 번 들어봐. 응?"
"그게 150만원이지만 실제로 아픈 곳이 낫는다니까? 그러고 그걸 자기 라인에 여덟 명만 심어 놓으면 한달에 이삼백만원은 그냥 통장에 들어온다니까. 아니 세상에 아픈 몸 말끔히 낫고 또 거기다 돈까지 버는데 이런 사업을 마다할 거야?"
"그래도... 그게 참..."

"선희 엄마도 참 내가 선희 엄마를 언제 속인 적 있었어? 나 몸 아픈 거 다 알잖아. 나도 그 속옷을 입고부터 그 고질병이 완전히 나아 버렸다니까."
"그리고 내 윗라인은 이번 달에 천만원의 배당금이 나왔대. 내 이 두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니깐."
"그래요? 그게 참말이에요?"

"아! 이 사람아 술을 눈으로 마시는 거여, 귀로 마시는 거여? 빨리 잔 돌려 이 사람아."
"아이쿠! 형 미안해요. 저 잠깐만 실례할게요."
그 쓴 술을 한 잔 벌컥 들이키고 ㅂ형한테 술잔을 권해 드리고 그 좌석에서 빠져 나왔지만 망치에 둔부를 얻어맞은 듯 한참을 그대로 그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 순진하기만 하던 아내가 다단계판매에 빠져든 것 같습니다.몇 년 전에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제도적으로 금지하였다가 얼마 전에 다시 합법적으로 허용된 다단계판매인 모양입니다. 아무리 합법적으로 허용되었다고 하지만 저로서는 그 제품이며 판매방식이 영 못마땅합니다. 대부분 그 제품이 수입품목이고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점입니다. 아니 세상에 150만원짜리 속옷을 입다니요? 그것도 시장에서 만원짜리 겉옷 하나 사면서 오백원, 천원을 깎으려고 별의별 수단을 쓰던 아내가 손으로 쥐면 한 웅큼 만한 150만원짜리 속옷을 입고 있다니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짜고짜 그 좌석에서 아내를 잡아끌고 안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영문을 모르던 같이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런 사태에 바들바들 떨면서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밖으로 서둘러 나가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잡혀 있던 손을 확 뿌리치면서 쏘아붙입니다.

"여보 왜 이래요? 찬찬히 말로 하세요."
그러나 이 일은 도저히 이성적으로 풀어나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당신.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야, 엉? 뭐, 속옷이 어쩐다고? 얼릉 바른 대로 말을 해 봐. 어성!"

다짜고짜 밀쳤더니 침대에 쓰러진 아내는 어이없다는 듯이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얼굴을 묻고 서럽게 울기 시작합니다.
"뭘 잘했다고 우는 거야. 엉? 뭐 150만원짜리 속옷을 팔아 얼마를 벌었다고? 내가 당신보다 돈을 벌어오라고 했어? 어디 그 잘난 입으로 말을 해 봐, 어섯!"

"당신이 내가 허리 아프다고 해서 약이라도 한 첩 지어줘 봤어요? 어디 말 좀 해 보세요. 흑흑흑..."
"뭐라고? 이 사람이 그래도 잘했다고 말대꾸 하는 거여? 허리 아픈 거하고 속옷하고 무슨 상관 있는 거여?"

이렇게 윽박지르기는 했지만 내심 마음이 아픕니다. 그렇습니다. 아내는 아동복 가게를 하였습니다. 서울 남대문까지 새벽시장을 보기 위하여 한 달에 네 번씩 꼬박 오 년을 버스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기도 하고 버스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허릿병이 난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잠결에서도 고통을 호소하였지만 낮에는 멀쩡하기에 뭐 나이가 들면 생기는 병이라고 치부해 버리고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무심한 남편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제가 그 비싼 속옷을 입었겠어요? 효과 없으면 반품해도 된다기에 이렇게 입었던 거예요. 그리고 당신 카페도 장사가 신통치 않은 것 같아서 기왕이면 돈벌이도 된다기에 시작한 거란 말이에요."

"이 사람아 그런 속옷이 있으면 이 세상에 속병 없는 여자들은 하나도 없겠네. 그렇다고 당신이 무슨 책임을 지려고 다른 사람들까지 그 일에 끌어들이고 있는 거야. 혹시나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감당할려고 그러는 거야?"

허릿병 때문에 입었다는 흐느낌에 더 이상 큰 소리를 칠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의 잘못된 생각보다는 남편으로서의 아내에 대한 무관심이 훨씬 민망스러웠으니까요. 그때서야 나는 차분히 조목조목 이야기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보, 미안해. 당신 허릿병에 무관심한 내 잘못이 커. 그렇지만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쉽게 큰 돈을 벌려고 하였던 거야? 그 속옷의 원가가 얼마나 되겠어. 당신이 말하는 당신 밑의 라인으로부터 돈을 받고 있는 거나 다름 없잖아. 안 그래? 우리가 꼭 그렇게 돈을 벌어야만 하는 거야?"

"잘못했어요. 당신말을 듣고 보니 당신이 그렇게 화낼 만도 하네요.그 속옷이 제 허릿병에 좋다고 하니까 저도 혹하였나봐요. 또 돈이 궁한 요즘에 쉽게 돈을 번다니까 나도 모르게 그만... 그리고 그 속옷이 설령 병을 낫게 한다고 해도 쉽게 다른 사람들의 수고를 얻어 돈을 벌려고 했던 제 생각이 너무 짧았네요. 미안해요. 여보."

그때서야 갑자기 아내에게 얽혔던 미움이 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이고, 난 여태 당신의 속옷을 시장에서 산 몇 천원짜리 속옷인 줄 알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금테두른 속옷이었네? 우와 150만원짜리 속옷 입어본 소감이 어때? 말 그대로 몸매가 이뻐졌어? 그건 그렇고 당신이 뿌려놓은 씨앗은 당신이 거둬야지. 당신이 소개한 사람들한테 우리 입장을 잘 설명해 드리고 이해시키도록 해. 그리고 그 속옷 입는 거는 당신 소관에 맡길게."

배시시 웃는 아내를 뒤로 하고 카페로 나간 뒤 나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래? 그 속옷이 정말 허릿병을 고친다고? 그럼 한 번 입어봐. 그깟 150만원이 대수야?'
그러나 난 그러지 못했습니다. 한 번쯤 오 년 동안 끙끙 앓고 있는 아내를 위해 속는 셈치고 객기를 부려볼 만도 하였는데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150만원을 주고 속옷을 산다는 정서가 없습니다. 저마다 경제가 밑바닥인지라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한 어려운 이웃들이 얼마나 많은데 감히 그 비싼 속옷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제품이 진짜로 그런 효능을 가지고 있다면 왜 꼭 다단계판매로 소비자에게 다가서야 하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앞선 탓도 있었습니다.

'부인병 퇴치 속옷 판매! 이 속옷을 입으면 몸매가 정말 날씬해져! 입어보고 효과 없으면 반품 책임져!'하고 플래카드를 걸고 광고를 하면 훨씬 잘 팔릴 것 같은데 참 이상하네요.

새벽 세 시가 되어서야 영업이 끝나고 안집에 들어가니 아내는 눈가에 눈물자욱 그려 놓은 채 비스듬히 누워서 잠이 들었습니다. 아마 꿈 속에서는 내일 자기가 저질러 놓은 일들을 수습하려고 진땀을 흘리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가끔씩 끙끙 앓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 허릿병이 밤마다 찾아오는 탓이겠지요. 아내의 욱씬거리는 허리에 가만히 손을 얹어봅니다. 아 따뜻한 아내의 체온이 가슴을 베고 지나갑니다.

이 밤이 지나면 시장에라도 나가보렵니다. 아마 몸에 좋다는 가물치 몇 마리 푹 고아서 약이라 하고 먹여 볼랍니다. 물론 150만원짜리 속옷보다는 훨씬 싸고 보잘 것 없는 가물치이겠지만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이 그 속옷보다도 몇 백배 더 큰 약발로 다가설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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