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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정말 이사하기 싫습니다.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이삿짐 보따리가 차지해버린 방바닥에는 딱히 누울 만한 자리가 없습니다. 마지막 남은 좁은 이불 속에서는 네 식구의 그렁그렁한 잔 숨소리가 덜커덕 목울대에 걸리고 맙니다.

잠들어 있는 식구들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자니 남모를 슬픔이 앞섭니다. 두 돌이 채 안된 막내딸 ‘햇빛’의 다리가 등허리에 걸쳐있습니다. 그 솜방망이 다리가 걸쳐 있는 등허리는 왜이리 시리고 무거운지요. 또, 가위 모양으로 엉켜 잠들어있는 큰 얘들의 서리꽃 입김은 왜이리 눈물이 나는지요.

단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통석유를 사서 붓던 아내의 잣대가 빗나가, 채 밤이 가기도 전에 보일러가 멈추어 버렸습니다. 그 탓에 내 발등을 물고 있는 아내의 발가락 또한 시리도록 차갑습니다. 다만 낡은 세간들이라도 살갗을 다치게 하면 안 된다고 부산을 떨던 아내의 손만이 내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습니다.

석유 한 통이면 만원인데 그 만원마저 아끼려고 이삿날을 맞춰가며 보일러 기름통에 부어 가던 아내의 가난한 마음, 나는 그녀의 가난한 마음에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을 안겨주고 말았습니다.

무턱대고 경험 없는 카페를 열고 이 년 쯤 장사를 하였을까요. 그만 건물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몇 푼 안 되는 보증금이야 받았지만 보증금보다도 훨씬 많은 시설비의 대부분은 받지 못하고 가게를 비워주어야만 합니다. 바로 내일이 이사해야만 하는 그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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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 세입자에게 유독 불리한 우리나라의 임대차 법을 나무라기도 싫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건물을 맘대로 사고팔고 하는 가진 자들의 횡포를 원망하기도 싫습니다. 올바른 가게 하나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이렇게 쫓기듯 나가야만 하는 내 잘못을 탓할 뿐입니다.

부족하고 여린 가장의 밤은 무겁고 길기만 합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우리 식구들은 잃었던 것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가게에 딸린 단칸 골방에서 부대끼면서 찾아들었던 소소한 행복이 그것입니다.

단칸 골방이 얼마나 좁던지 방 안에서 한 발짝만이라도 내딛을라치면 서로 몸을 부딪쳐야만 비켜갈 수 있습니다. 또, 서로의 눈동자를 마주치지 않으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습니다. 속삭이기만 해도 시끄러운데 감히 큰 소리를 내며 싸울 수 있겠습니까.

자기의 잇속만 내세우던 아이들도 이 단칸 골방에서만은 서로서로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장아장 걷는 막내딸 ‘햇빛’이의 양육도 아이들 몫입니다. 새벽까지 술손님 시중을 드는 엄마, 아빠의 빈 자리를 메워야 하는 생활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말수 없는 나와 아내에게 있어 가장 큰 행복 하나는 소중한 이웃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옆 건물에서 번듯하게 돈 잘 버는 사람들이 결코 아닙니다. 가게 앞에서 수년 째 진을 치고 있는 노점의 가슴 따뜻한 사람들이기에 더욱 살풋한 것입니다.

병원 담벼락의 생전장수 털보아저씨는 유난히 막걸리를 좋아합니다. 막걸리 판을 거나하게 펼쳐야만 마수걸이가 시원하게 뚫린다는 지론을 가지고 계신분이죠. 이사 하면 걸쭉한 막걸리처럼 구성진 육자배기가 생각나 한동안 잠을 못 이룰 것 같습니다.

그 옆에 야채 아줌마의 후한 인심은 장사치의 계산법은 아예 뒷전에 구겨놓기 일쑤입니다. 안주거리 과일을 돈 만원어치 사면 덤으로 무며 파, 양파까지 곁들여 한 보따리 안겨주는데 언제 비바람 들이치지 않는 번듯한 가게 하나 얻을 수 있을까요.

참, 그 분들 중에서 한때 참말로 미워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손수레를 끌고 잡동사니를 파는 맹인 부부입니다. 새벽에야 겨우 자는 꿀잠을 송두리째 깨버리는 그들의 닐리리 맘보 확성기 소리가 무척 싫었던 거죠. 그렇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그들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편한 잠을 자지 못하게 된 걸 어떡합니까.

그리고 어묵 파는 할머니는 정말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그 할머니를 천사할머니라고 부릅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며칠 간 매운 연기 맡아가며 어묵을 팔았던 돈 가방을 두 번이나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성냄보다는 돈 가방을 훔쳐간 아이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수천만 원을 날려버렸다 하더라도 나는 절대로 아깝지 않습니다. 바로 천사 할머니의 간절하게 용서하는 마음을 나와 아이들에게 뿌리 깊게 심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막 걸음마를 뗀 ‘햇빛’이에게 유일하게 붕어빵 세금을 바치고 있는 빵굽는 아줌마하고, 한 평짜리 칸 속에다 구두 수선방을 차린 아저씨도 잊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지어놓은 귀닳고 남루한 포장마차의 색깔까지도 쉬이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제 날만 새면 이 소중한 이웃들 하고 매일매일 마주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가끔씩 바람처럼 지나치다 차창 밖으로 인사말 몇 마디 오가고 말겠지요. 더러는 장날에나 겨우겨우 만나 옛정을 어루만져볼 뿐이겠지요. 이 가슴 훈훈한 사람들을 자주 찾아볼 것이라 다짐하지만 그게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사람 사는 것이 몸 떨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틀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낮에 불현듯 이삿짐을 꾸리다 말고 찹쌀 몇 되 사다가 방앗간에 떡을 맞춰 놓았습니다. 그들의 시린 손 위에 김 모락모락 나는 인절미 한 움큼씩 안겨주고 떠날 작정입니다. 아까운 돈 다 못 받아 나간다고 혀를 끌끌 차며 눈물짓는 어묵 할머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저려옵니다. 정말 이사 가기 싫은데 자꾸만 새벽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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