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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가 뱅뱅 도는 저수지에 물수제비를 뜨다 말고 한 아이가 갑자기 물었다.

"니네들, 영권이 아저씨 보고 싶지 않니?"
"으응, 많이많이 보고 싶어."

입안에 맴맴 돌고 있던 목소리를 한꺼번에 와르르 토해내는 듯 모두들 한 목소리를 냈다. 아이들은 몹시도 영권씨가 보고 싶었는지 돌팔매질마저 그만두고 손을 탈탈 털어버렸다.

"아저씨가 없으니까 어려운 숙제가 있는 날엔 머리 아파 죽겠어."
"난, 재밌는 게임 가르쳐준다고 했었는데..."
"난, 토끼 새끼 치면 한 마리 준다고 했었는데...?"
"그래? 난, 내 가방끈 다시 가죽으로 달아매준다고 했는데... 아저씨는 언제나 볼 수 있을까?"

영권씨를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발끝을 따르는 들풀 수만큼이나 많았다. 영권씨는 다리가 불편한 노모를 모시고 학교 앞에서 조그만 가게를 하고 있는 총각이었다. 읍내에서 십여리 떨어져 있는 마을인지라 생활필수품이나 학용품을 살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영권씨 가게뿐이었다.

영권 씨와 아이들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주인과 손님의 관계만은 아니었다. 말간 저수지 수면과 그 수면 위에 그린 듯이 떠 있는 푸른 산과 같은 관계였다.

아이들은 아침이면 물빛에 제 몸을 담그기라도 하는 듯이 가게를 들렀고, 그런 아이들이 남기고간 향기와 푸른 그림자들을 하루 내내 주워 담고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영권씨였다.

동네 어른들도 영권씨를 착하고 믿음직한 막내 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농사일에 치여서 아이들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사는 부모 입장에서 보면, 숙제에서부터 아이들 용모까지 꼼꼼히 챙겨주는 영권 씨가 무척이나 고마웠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커가고 변해가는 모습들을 눈금자로 잰 듯이 지켜봐주고 챙겨주는 영권 씨의 아름다운 모습이 참으로 좋았다.

그런 영권씨에게 큰 아픔이 찾아왔다. 밤늦게 자동차를 몰고 읍내에 나갔다 오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내고 말았다. 다리가 불편해 거동하지 못하는 노모만 남겨놓고 경찰서에서 오랫동안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오다가다 군것질하는 재미를 행여나 잃어버릴까 하는 서운함도 있었지만 영권 씨를 한동안 보지 못한다는 슬픔이 더 컸다. 그날도 체념한 채 교문으로 들어서려던 아이들은 여느 때처럼 활짝 열려진 가게를 보고 깜짝 놀랐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앞다퉈 들어가 보았지만 할머니만이 안방 문턱에 걸터앉아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동네 어른들이 할머니께서 걱정하실까봐 사고 소식을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할머니는 언제나처럼 환한 얼굴로 아이들을 손짓해 불러들였다.

"얘들아, 아들이 며칠 서울 갔단다... 필요한 거 사고는 거기 상자에다 돈 넣어놓으렴..."
"네에, 할머니."

하루를 붙잡고 가게 문을 들락거리는 사람을 세어 보아야 열 손가락을 꼽기도 힘들겠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것이 만만치만은 않아서 저마다 걱정을 하였다. 그러나 가게는 며칠이 지나도 영권 씨가 있었을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 같았다.

동네 사람들은 물론이고 코흘리개 어린 아이들까지도 물건 값을 상자에 꼬박꼬박 넣어두고 나왔다. 할머니는 문턱에 걸터앉아 오는 사람들에게 말인사만 건넬 수밖에 없었지만, 동네사람들과 아이들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일일이 하얀 미소로 손을 흔들어주었다.

전교생이 삼십 여명도 채 되지 않는 조그만 학교인지라 영권 씨 소식은 금방 퍼져 나갔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영권 씨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이라곤 가끔 가게를 들려서 토끼밥 챙겨주는 게 고작이요, 흐트러진 물건 정리와 먼지 털어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할머니 혼자서 가게를 보신지 며칠 지나서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돈을 넣는 상자 옆에 눈에 띄게 큰 상자 하나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상자 안에는 곱게 접혀진 편지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 번 씩 영권씨를 위해 쓴 편지를 그 통 속에 넣기 시작했다. 며칠이 지나자 그 상자 안에는 곱게 접힌 편지들로 가득 찼다. 마지못해 한 일이 아니라 스스로 속마음을 꽃잎 따듯 곱게 따 접었다. 그렇게 아이들과 영권 씨를 잇는 마음의 끈은 차진 밥알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동네 어른들은 아이들 보기에 민망스럽고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영권씨가 가진 것 다 털었지만 얼마 되지 않는 돈만을 들고 피해자와 합의하려다 면박만 당하고 쫓겨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을 어른으로서 할 도리는 다했다는 듯이 아예 손을 놓고 있었던 자신들의 무심함을 아프게 꼬집을 수밖에 없었다.

눈코 뜰 새 없는 농사일도 뒤로 접어놓고 마을회관에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모두들 빈 쌀독에 쌀 털리는 소리만 나는 살림인데도 십시일반 돈을 모았다. 턱없이 부족하였지만 영권 씨가 내 놓은 돈과 합하여 다시 한 번 피해자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제시한 금액에서 단돈 일원이라도 부족하면 집안에 들여 놓지 않겠다며 펄쩍펄쩍 뛰던 피해 가족들이 동네 어른들을 고분고분 집안으로 맞아들였다. 갑작스런 변화에 당황하였지만 꼭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죄송합니다.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지만 마을 사람들이 힘 닿는 대로 모았습니다. 젊은이 한 번 살린 셈치고 합의좀 해주십시요."

예상보다 훨씬 적은 금액이었는지 세다 말고 피해 가족은 한숨만 내쉰 한참 후에 말을 조심조심 꺼냈다.

"처음에는 정말로 괘씸했습니다. 일부러 보상을 안 하려고 생떼를 쓰고 있나 싶어서였지요. 뒷조사 겸 젊은이가 운영한다는 학교 앞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가족이라고는 몸이 불편한 노모만 계시다는 걸 알았습니다."

매몰차게 내쫒던 지난번 얼굴과는 달리 참으로 따스한 눈빛으로 찬찬히 말을 이어나갔다.

"둘이 살기에도 빠듯한 살림이던데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준비하겠어요? 내 동생이 저렇게 다친 걸 생각하면 가슴 터질 일이었지만... 참, 그리고 그 돈통 옆에 놓여 있는 편지 상자 말이에요..."

"아! 그 아이들 편지 말이죠? 저희들도 처음엔 적잖이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손놓고 있다가 그 아이들의 마음이 하도 기특해서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찾아뵙게 됐습니다."
"아이들로부터 그런 마음의 편지를 받을 수 있는 젊은이라면, 합의금 없다고 나 몰라라 하는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아직 뭐라 해답은 못 드리겠습니다만, 며칠 후에 보험회사와 치료비 합의가 원만히 해결되면 그때 연락드리겠습니다. 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아! 예예...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얼마 후에 영권 씨는 가게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동네 어른들로부터 그간 있었던 얘기를 전해들은 영권 씨는 한참동안 편지 상자를 껴안고 있었다. 아이들의 마음 한 올 한 올이 가슴 깊숙이 뜸을 뜨고 있는 듯 뜨끔뜨끔 아려왔다.

문턱에 걸터앉아 지켜만 보고 있던 영권 씨 어머니는 아들 녀석이 서울 갔다 오더니만 에미는 본체만체하고 웬 상자 하나만 보듬고 있는 것을 보고 꽥 소리를 질러댔다.

"야! 이 녀석아. 서울 가느라 수십 일이나 집을 비웠으면 먼저 에미한테 인사부터 해야지... 원, 쯧쯧쯧... "
"아이고... 어머니 그 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그때야 영권씨는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어머니 앞에 덥석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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