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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살이 풋감 위에서 땡글땡글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줄줄이 엮은 소시지처럼 하얀 운동복 차림의 아이들이 운동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 중에 유달리 눈에 띄는 한 아이가 있었다. 낡은 청바지와 노란 티셔츠 차림의 명수였다. 가을 대운동회가 있는 날인데도 명수는 가방을 등에 메고 빈 깡통을 이리저리 차 돌리며 교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개회사가 있기 전에 학년반별로 간단한 인원점검이 있었다.
"누구, 결석한 어린이 없겠죠?"
선생님은 설마 대운동회 날에 결석한 아이가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 건성으로 아이들에게 물었다.

"선생님, 명수가 보이지 않아요."
"뭐? 명수가 보이지 않는다고? 차명수, 차명수 어딨니?"
모두들 서로의 얼굴만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데 한 아이가 다급히 외쳐댔다.

"선생니임? 명수가 저기 나무 뒤에 숨어 있어요."
선생님은 버럭 화를 내며 명수를 데려오라고 외치려던 참인데, 교장선생님의 개회사와 함께 운동회의 식전 행사가 시작되었다.

아이들이 청군, 백군으로 나뉘어 응원석 자리로 찾아가고 난 뒤 그때서야 선생님은 명수 생각이 났다. 운동장 후미진 곳의 커다란 플라타너스 뒤에서 고개를 수그린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명수에게로 다가갔다.

"명수, 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얏!"
"......"
아무 대답 없이 닳은 운동화 등에 굵은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는 명수를 보고서야 선생님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명수는 단칸 셋방에서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보조금으로 겨우겨우 살아가는 명수는 몇 푼 되지 않는 운동복마저 살 여유가 없었다. 남들처럼 온갖 맛난 음식을 해오실 부모님도 없었다. 그렇다고 미운 오리새끼처럼 달랑 혼자만이 평상복 차림으로 뛰어다닐 용기도 없었다.

명수는 오전 내내 응원석 맨 뒷자리에 시큰둥하게 앉아 있었다. 그렇지만 친구들이 엎치락뒤치락하는 100M 달리기 때는 저도 모르게 불쑥불쑥 일어서곤 하였다. 이런 명수를 보고 있는 선생님의 마음은 몹시도 아팠다. 아이들 하고 어울려 뛰면서 활짝 웃는 명수의 얼굴이 한껏 보고 싶었다. 하지만 상처투성이인 명수의 가난한 마음은 친구들의 환한 잔치에 쉬이 뛰어들지 못했다.

▲ 한 초등학교의 가을운동회(오마이뉴스 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이종호
뽀얗게 먼지가 아지랑이처럼 솟아오르는 점심 때가 되자 선생님은 명수를 부랴부랴 찾았다. 점심때만은 운동장 한 구석에 명수를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운동장 후미진 곳을 찾아다녔지만 명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안내방송을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 아침에 명수가 숨어 있었던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서 낯익은 녀석들이 보였다. 아이들 틈에 끼어 있는 명수의 얼굴도 보였다.

"아니, 너희들 여기서 뭐하니? 부모님들은 어디 계시는데 너희들만 여기 있는 거니?"
"네에 선생님, 우리끼리 모여서 먹는 밥이 맛있잖아요. 조금씩 가져와서 이렇게 함께 먹는 거예요. 참, 명수도 함께 먹고 있어요."

선생님은 갑자기 코끝이 시리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혼자 남은 명수 때문에 아이들이 잔꾀를 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 정말 맛있게 보인다. 선생님도 같이 먹으면 안 될까? 응? 한 번만 끼어주렴?"

"헤헤헤. 선생님 것도 가져오셔야 돼요. 헤헤헤."
"에구 요 녀석들. 조금만 먹을 게 한 번만 봐주라 잉?"
세상에서 이렇게 맛있는 점심은 처음이라는 듯이 허겁지겁 집어드시는 선생님의 눈에서 뽀얀 안개가 서리고 있었다.

오후 종목은 몇 개 남지 않았다. 전 학년 포크 댄스와 학년별 기마전이 남아 있었고, 마지막으로 선생님을 포함한 청군백군 대항 이어달리기가 남아 있었다.

선생님은 명수 운동복을 미처 마련하지 못한 무심함을 탓하면서 얼른 인근 가게에서 명수에게 맞는 운동복 한 벌을 사왔다. 포크댄스 연습 시간에 흥에 겨워하던 명수의 얼굴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지나가는 아이한테 명수를 찾아오라고 하였다. 무슨 일인지 모른 명수는 헐레벌떡 달려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명수야, 이 운동복 한 번 입어봐. 우리 명수는 인물이 훤하니까 참 멋있을 거야."

얼떨결에 운동복을 받아든 명수는 난처한 듯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아니, 명수야 왜 안 입어보는거야? 선생님이 사준 거라 창피해서 그러니?"
"저어. 선생님 그게 아니고요. 저기 친구들 좀 보세요."

포크 댄스를 하기 위하여 모여 있던 아이들을 쳐다본 선생님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5학년 3반 아이들 모두 다 하얀 운동복을 벗어버리고 울긋불긋 천연색 평상복 차림으로 서 있었다.

운동복이 없는 명수를 위하여 반 전체 아이들이 모두 운동복을 벗어버리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온 것이었다. 명수의 창피스럽고 남세스러움을 감추어주고 함께 운동장에서 뛰놀고 싶은 아이들의 따뜻한 마음 때문이었다.

갑자기 운동장 내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행사 진행을 맡고 있던 선생님은 운동복 차림이 아닌 학생들을 나무라는 소리를 확성기를 통해 쏟아냈다. 맨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르던 선생님이 들고 있던 운동복을 던져버리고 부랴부랴 단상으로 뛰어올라갔다.

"학생 여러분....우리 학교를 상징하는 꽃이 무엇이죠?"
"국화꽃이요!"
아이들은 갑작스런 물음에 황당해 하면서도 입을 맞춰 대답을 하였다.
"네, 맞아요. 그러면 오늘 포크 댄스는 국화꽃 모양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5학년 3반 아이들은 가운데 꽃술이니까 다른 학생들은 뺑둘러서 하얀 꽃잎 모양으로 모아주세요."

네모난 틀에 짜여서 기계적으로 움직이기를 반복하였던 아이들은 신기한 듯 꽃 모양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단상 앞에 앉은 귀빈들이나 주위에 서 있던 어머님들도 처음에는 당황스런 눈치가 역력하였으나 예쁘게 펼쳐지는 꽃 모양에 저마다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곧 이어 확성기를 통해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굳은 표정으로 춤을 추던 아이들의 입가에는 환한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서로의 팔짱을 끼고 사뿐사뿐 돌아가는 아이들의 춤사위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국화꽃으로 변했고, 선생님의 뺨과 명수의 뺨 위로는 하얀 꽃물 같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새롭게 연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작고 보잘것 없는 이야기들이지만 이 이야기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따뜻한 징검다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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