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국내 여행도, 국외 여행도 모두 좋아하지만 특별히 국외 여행의 매력이 크다고 느낀다. 국외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은 다름을 마주한다는 것이다. 언어와 문화, 풍습과 종교가 전혀 다른 이들과 마주할 때면 그들을 이해하게 되는 만큼 우리를 돌아보게도 되는 것이다. 다른 이를 깊이 경험한 뒤에야 비로소 나를 알게 되듯이, 다른 문화를 마주하고서야 나를 둘러싼 것의 특징을 깨닫게 되는 법이다.
 
나의 여행이 다른 이의 여행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몇 있다. 그중 하나는 죽음을 즐겨 찾는다는 것이다. 나는 한 사회가 죽음을 대하는 방식만큼 삶에 대한 태도를 잘 드러내는 것이 없다고 여긴다.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어차피 거기서 거리라고들 여기지만, 실상을 돌아보면 나라마다 저의 죽음과 가족이며 친구의 죽음, 또 장례의 방식이며 떠난 이를 기리는 방법이 천차만별임을 알게 되고는 한다.
 
이제껏 십수 개 나라를 돌아보며 그 죽음에 대해 알아본 바, 한국은 가히 세계에 흔치 않은 방식으로 죽음을 대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격리다.
 
 <기억의 공간들> 스틸컷

<기억의 공간들> 스틸컷 ⓒ 반짝다큐페스티발

 
죽음을 멀리 밀어두는 나라
 
한국만큼 죽음을 삶과 떼어두고 멀리하는 나라가 없다. 사상적으로 유학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은 4개 나라, 즉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과 베트남, 일본 가운데서도 한국의 방식만이 유독 남다르다. 흔히 일본이나 중국에서 제작된 드라마와 영화를 보다보면 위패며 영정, 유골함을 집 안에 모셔두고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를 기리는 모습을 자주 마주한다. 이는 실제로도 그러하여 이들 나라는 떠난 이의 흔적을 집 안팎 가까이에 두고 자주 살피며 그를 떠올린다.
 
위패와 영정, 유골함이 집 안에 있는 것도, 죽은 이의 사진을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는 것도, 심지어 논과 밭 한 가운데 묘를 쓰는 것도 이들 문화권에서 자주 발견되곤 한다. 죽음은 산 사람 가까이에 있다.
 
그러나 한국은? 한국에서 죽음은 아주 멀찍이 떨어져 있다. 서울 시민이 죽어도 화장터는 근교가 되는 경우가 많고 요즘에는 멀리 천안 인근까지도 내려가는 경우가 수두룩하다고들 한다. 안치되는 시설 또한 마찬가지. 제 집에 위패며 영정, 유골함을 두는 경우를 나는 거의 본 적이 없다. 매장을 한다 해도 매장터는 집에서 아주 먼 곳에 위치하는데, 그마저도 몇 차례 되지 않는 성묘며 제사는 성차별적인 주제로만 소환되어 소모적 전선에 놓일 뿐이다.
 
유교문화권이 아니래도 공동묘지를 생태공원처럼 조성하여 산 이들이 수시로 드나들게 하는 문화가 곳곳에 널리 있다. 이상적 사례로 꼽히는 독일 함부르크 공원묘지를 비롯해 유럽 각지에서 흔히 목격되는 것인데, 한국에선 묘지로 나들이를 가고 데이트를 하는 모습을 떠올리긴 어려운 일이다.
 
 <기억의 공간들> 스틸컷

<기억의 공간들> 스틸컷 ⓒ 반짝다큐페스티발

 
참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적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참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긴밀히 닿아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나는 자주 참사가 있던 장소로 여행을 떠나 그 흔적을 살피고 유산의 가치를 헤아려 보고는 한다. 해외에선 이와 같은 여행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해 '다크투어리즘'이라고도 불리는데, 인종말살이 이루어진 홀로도모르와 홀로코스트 현장, 2차대전 중 폭격을 당해 불타버린 건물들, 체르노빌과 히로시마 같은 대참사의 흔적들을 보존해 일반에 개방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한국에선 유독 이와 같은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한국이 부정적 잔재를 대하는 방법은 그와는 전혀 다른 무엇이다. 이를테면 전 국민이 생중계로 보는 가운데 총독부 청사를 폭파한다거나, 대구 지하철이 어느 날부터 도시철도로 이름을 싹 바꾼다거나, 위령비며 위령탑 같은 것은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외진 곳에 놓인다거나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한국인들은 이와 같은 것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나머지 그를 문제 삼는 경우가 얼마 되지 않는다. 마땅히 기억되고 평가되어야 할 사회적 참사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그를 다룬 콘텐츠 가운데 이를 일깨우는 작품을 흔히 만나기는 어려운 일이다.
 
 <기억의 공간들> 스틸컷

<기억의 공간들> 스틸컷 ⓒ 반짝다큐페스티발

 
저열하기 짝이 없는 도전 앞에서
 
제2회 반짝다큐페스티발 폐막작인 <기억의 공간들>은 드물게 죽음과 참사를 대하는 우리의 모습을 일깨운다. 이현주 감독의 58분짜리 다큐는 세월호 침몰참사 이후 그를 기억하는 공간을 지켜온 이들을 카메라 앞에 세워 그들이 느낀 점을 담아낸 작품이다.
 
몇몇 이의 인터뷰가 영화의 뼈대를 이루는 가운데, 그저 지나칠 수 없는 장면들이 툭하고 튀어나와 마음을 쓰이게 한다. 세월호 침몰참사 뒤 광화문 광장을 지켰던 추모공간은 서울시의회 앞 작은 공간으로 옮겨온 지 오래다. 자식 잃은 이가 직접 거리로 나와 싸우지 않으면 무엇도 해결되지 않는 나라, 그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란 걸 모르는 이 없는 세상이다.

노동운동의 대모가 된 전태일 열사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를 비롯하여 위험의 외주화를 사회문제로 발돋움하게 한 김미숙 김용균재단 대표, 아들의 죽음 뒤 수술실CCTV 법제화에 공헌한 이나금 의료정의실천연대 대표 등이 모두 자식을 잃고 사회활동가가 되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세월호 침몰참사 유족 또한 마찬가지다. 밀려나고 잊힐 수 없어 거리로 나와 투쟁하게 된 이들이 남과 연대하며 사회운동가가 되어가는 모습을 우리는 수도 없이 보아오지 않았던가.
 
영화는 투쟁의 공간이 기억의 공간으로 전환되는 모습을, 그러나 정부가 그마저 저지하며 설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모습을 그린다. 서울시의회 앞 세월호 기억공간과 단원고 416 기억교실, 팽목항 컨테이너 같은 공간이 하나둘 참사흔적을 지우려는 이들의 압력을 받는 과정이 살펴진다. 시간이 되면 전기를 끊어버리고, 거듭 철거를 요구하며, 온갖 이유를 들어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모습이 비춰진다. 저열하기 짝이 없는 도전 앞에서 어떻게든 지켜내려는 이들의 모습이 비장하다.
 
 '반짝다큐페스티발' 포스터

'반짝다큐페스티발' 포스터 ⓒ 반짝다큐페스티발

 
한국 정치의 무능을 질타하는
 
그렇다면 사라질 위험에 처한 것들은 과연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기억의 공간들> 가운데 짚어낼 것이 꼭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를 건너 대구지하철을 지나 세월호와 제천스포츠센터, 오송참사 등에 이르는 길고 오랜 참사들을 살핀다. 참사의 흔적을 지우는 데 급급할 뿐 그를 되새기지 않는 무관심과 무심함으로부터 나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죽음을 멀리 밀어두고 그를 다시 돌아보지 않으려는 태도, 온갖 부정적인 것을 멀찍이 치워버리면 그만이라는 쉬운 인식에 우리는 맞서야만 하는 것이다.
 
필요 이상 길고 단조로운 인터뷰에 의지하는 전개, 또 굳이 끼워넣지 않는 편이 나았을 20대 여성의 위협감에 대한 이야기, 기타 조금 더 다가섰으면 좋았을 순간들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난다. 그만큼 <기억의 공간들>이 실마리를 붙들고 선 참사와 시민 사이 맞닿음의 중요성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왜 한국은 제 상처를 드러내어 살피지 못하나. 어째서 유족들이 거리로 나와 싸우지 않으면 무엇도 바꿔내지 못하나.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를 함께 탓하는 이 영화는 무엇도 바꿔내지 못하는 한국 정치의 무능 또한 그처럼 세차게 질타한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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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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