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간다는 건 죽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해가 뜨고 나면 지듯이, 무엇이든 태어나면 반드시 사멸한다. 그러나 필연이라 해서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죽음을 외면하려 발버둥질치는 이의 모습을 우리는 흔히 목격하게 된다. 흐르는 세월에 저항하고 다가오는 죽음에 맞서려는 이들의 분투가 대단하게 느껴질 때도 없지 않지만, 그보다는 처절하고 어리석게 여겨질 때가 많은 것은 왜일까.
 
살아 있는 생명이 다가오는 죽음을 반길 수는 없는 일이다. 특히 제게 가까운 이의 죽음은 쉽게 잊히지 않는 고통이 되고는 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죽음들이 있지만 유독 아끼는 이들, 또 좋은 사람들의 죽음이 가슴에 박히는 것도 그 때문일지 모르겠다. 때로 어떤 사람에겐 더 많은 시간이 주어져야만 했다고 목을 놓아 소리치고 싶은 순간을 누군들 겪어보지 않았겠는가.
 
노년이 된다는 건 죽음에 더 익숙해지는 일이다. 가까이 지냈던 친구가, 혹은 가족이 세상을 떠나 어느 순간 만날 수 없게 되는 일을 수도 없이 견뎌나가야 하는 때문. 누구는 떠난 친구들의 사진을 오려서 눈에 띄지 않도록 한다. 또 누구는 저도 어서 그 곁으로 가려 한다며 그들 가까이 다가서기도 한다. 그중 무엇이 삶과 죽음을 대하는 더 나은 방식인지는 쉽게 가려낼 수 없는 일이다.
 
빛 스틸컷

▲ 빛 스틸컷 ⓒ 반짝다큐페스티발

 
좋은 사람들은 빨리 죽더라
 
김정원의 <빛>은 제2회 반짝다큐페스티발 개막식에서 두 번째로 상영된 작품이다. 노년의 할아버지들이 함께 산길을 걷는 모습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그들의 뒤를 따르며 그들 사이 오가는 대화를 주의 깊게 담아낸다. 서로가 아는 이의 안부를 묻고 그중 적잖은 수가 세상을 떠났음을 확인하는 과정, 그 속에 담긴 죽음의 친숙한 등장이 수십 년의 시차를 두고 낯설게 다가온다.
 
주인공은 배회장이라 불리는 사내, 배영민이다. 그가 세 명의 친구들과 운동 삼아 산길을 걷는다. 어느덧 가까운 이들을 하나둘 떠나보냈을 나이, 이들은 서로가 함께 아는 이들의 죽음들을 떠올린다. 그들이 말한다. 제게 잘 해주었던 이의 죽음은 유별나게 아프다고. 왜 아닐까. 죽음이란 한 육신과 정신의 종말, 다시는 어느 존재를 만날 수 없게 되는 일이다. 일상을 공유하던 누군가의 죽음이 결코 메울 수 없는 틈이 되어서는 계속 살아가야 하는 마음들을 시리게 파고든다.
 
"나한테 잘해준 놈들이 빨리 죽더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또 다른 영화를 떠올린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다. 이 영화 가운데 유독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이 있다. 주인공인 돼지가 술집에 들어가 옛 동료들을 떠올리던 장면, 돼지는 "좋은 녀석들은 언제나 죽지"하고 혼잣말을 씹어 뱉는다.
 
빛 스틸컷

▲ 빛 스틸컷 ⓒ 반짝다큐페스티발

 
아내도, 자식도 먼저 보낸 이의 죽음
 
그렇다. 좋은 이들은 모두 죽는다. 세상 사람이 죄다 죽는다지만 좋은 이들의 죽음은 유독 큰 상실감을 남긴다. <붉은 돼지> 속 돼지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 시절, 나는 가까이 지내던 친구를 병으로 잃었다. 노인들에게나 빚어지는, 또는 재수 옴팡지게 없는 이들에게나 벌어지는 일인 줄로 알았는데 나 가까이 곁에 있는 젊은 녀석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죽어버릴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로부터 이따금 아까운 죽음들을 나는 겪어냈다. 가정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도시에서, 나라와 세상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아까운 이들이 황망하게 숨져갔다. <빛>의 배회장에게도, 또 다른 할아버지에게도,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마찬가지의 죽음들이 몇쯤은 있었을 테다.
 
산행 뒤 할아버지가 빨래를 하고 그 빨래를 옥상에서 너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영어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한 남자가 있다는,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고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남자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가 만든 것이 모두 죽었고 이제는 그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삭막하게 들려온다. 말하자면 그는 아내 뿐 아니라 자식까지 저보다 앞세웠다. 세상의 모든 고통 가운데 가장 괴로운 일이라는 참척의 아픔을 그는 일찌감치 겪었던 것이다. 아내와 자식까지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남은 노인의 삶이란 감히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다.
 
<빛>은 13분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죽음을 가까이 느끼는 이의 상실감을 전한다. 할아버지들의 만남 가운데서 죽음과 일상의 거리를 되새기게 하더니, 후반부에 이르러선 배회장이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애틋하게 펼쳐낸다. 아내를 생각하며 직접 쓴 것처럼 보이는 편지글이 독백처럼 읽히는 가운데 그가 죽은 가족들의 무덤과 납골당을 찾는 모습까지를 가만히 담아낸다. 아들의 유골이 든 병을 쓰다듬는 모습이 애처롭고, 제가 묻힐 자리를 돌아보는 모양이 쓸쓸하다.
 
빛 스틸컷

▲ 빛 스틸컷 ⓒ 반짝다큐페스티발

 
죽음 밀어두는 나라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일
 
'내 영혼이 잠들 자리에 어둠이 드리우면 무릎을 모아 당신을 마주할 수 있기를'하는 글귀를 마지막으로 배회장의 이야기가 막을 내린다. 전반부의 산행과 후반부의 독백 사이 무거운 음악과 병원에서 옮겨지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영화의 또 다른 결말처럼 다가선다.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태어나고 죽는 일은 피할 수가 없는 일, 영화 속 배회장보다 그저 몇 걸음 쯤 뒤에 걷고 있는 관객들이 이 영화로부터 무엇을 가져갈지 나는 그 감상들이 궁금하였다.
 
제2회 반짝다큐페스티발은 김정원의 <빛>을 신승우의 <1000>, 김예랑의 <그녀는 왜 사과를 따먹었을까> 사이에 배치해 개막식 세션에 선보였다. 영화제의 첫인상을 결정하는 중요한 세션에 이 영화를 불러 앉힌 이유가 궁금해진다. 무겁고 진중한 시선으로 죽음을 대하는 노인의 모습은 여러모로 죽음을 삶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놓으려는 한국의 최근 경향과 극명히 대비된다.

죽음이란 삶 가운데 있어서는 안 될 것, 제사는 성불평등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유골함은 저 멀리 근교 납골당에 놓아두는 나라, 조상의 무덤 또한 특별한 날이 아니면 돌아볼 일 없는 한국의 문화는 이색적이게도 유교의 영향권 아래 있는 나라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어째서 한국은 죽음을 그토록 멀리 하는 것일까. 일생토록 죽음을 멀리 하다가는 갑자기 찾아온 친구며 가족들의 죽음을 마주하고, 화들짝 놀라 비로소 죽음을 진지하게 바라본다. 그럼에 한 발짝이라도 앞서 죽음을 진중하게 바라보는 작품을 접하는 건 의미 있는 일이다. 반다페 개막식 두 번째 작품으로 <빛>이 선택된 데도 그런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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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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