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건 변한다. 확고한 것만 같던 신념도, 변치 않을 것만 같던 성격도 조금씩 변하게 마련이다. 매일 쓰는 일기도 한참이 지나서 돌아보면 지금 나와는 다른 누가 쓴 것 같아 보이곤 한다. 때로는 성장을, 때로는 쇠락을, 또 때로는 그저 모습을 바꾸는 변화들은 이처럼 자연스레 삶 가운데 깃든다. 하물며 취향일까.
 
어떤 영화는 처음엔 좋았으나 훗날 보면 보잘 것 없다. 반면 어느 영화는 처음엔 아쉬워도 훗날엔 그 가치를 새로이 보도록 한다. 전자는 과거를 추억할 수 있어 좋고, 후자는 새로이 좋은 것을 알게 되어 좋다. 특히 뒤의 경우엔 보는 이에게 색다른 감상을 안기곤 한다. 어째서 그땐 알지 못했을까 싶은 감동을 자연스레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당연히 내게도 그와 같은 경험이 있다.
 
마틴 브레스트는 늘 좋아하는 감독 목록의 상단에 놓던 인물이다. 최애배우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던 알 파치노가 주연한 <여인의 향기>는 어린 시절 내게 낭만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다. 그로부터 수차례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도 나는 이토록 매력적인 영화가 세상에 몇 편이 더 나올 수 있을까를 궁금해 하였을 뿐이다. 질리지 않는 명작의 매력, 볼 때마다 감탄케 하는 이 낭만적인 영화를 보며 나는 언젠가 나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만들 수가 있을까 기대하고는 하였다.
 
 영화 <조 블랙의 사랑> 포스터

영화 <조 블랙의 사랑> 포스터 ⓒ 유니버설 픽쳐스

 
감독도 아쉬워했던 전설적 영화
 
차기작 <조 블랙의 사랑>이 개봉한 건 1998년이었다. 이 영화가 비디오로 정식 발매되기를 손꼽아 기다린 나는 발매일이 되자마자 동네 비디오가게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렇게 비디오를 집어 들고 돌아온 나는 곧장 3시간 가까운 이 영화를 TV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몹시도 실망스러웠다. 휴가 나온 저승사자가 한동안 속세에 머물면서 인간세상을 경험하는 이야기,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이 이야기가 전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뿐인가. 영화는 어찌나 길었는지 중간 중간 몹시도 지루했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야기는 아직 사춘기가 오지 않은 소년에겐 이해도 관심도 가지 않는 것일 뿐. 하물며 당대 최고의 미모를 구가하던 브래드 피트에 비해 상대역 여배우는 이게 뭐람, 이렇다 할 매력이 없었다.
 
이러한 감상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마틴 브레스트는 영화 크레딧에 실명 대신 '알란 스미시 Alan Smithee'라는 가명을 붙였다가 논란이 되었다. 할리우드의 규제로 지금은 사용치 못하게 됐지만 알란 스미시는 감독들이 공공연히 사용하던 가명이다. 알란 스미시가 할리우드 통산 가장 많은 영화를 만든 감독으로 기록돼 있을 정도. 영화사의 압력이나 기타 여러 이유로 영화를 제 마음대로 만들지 못했을 때 주로 쓰던 이름인데 자연히 감독이 포기한 수많은 졸작들에 이 이름이 붙게 마련이었다.
  
 영화 <조 블랙의 사랑> 스틸컷

영화 <조 블랙의 사랑>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안소니 홉킨스와 브래드 피트의 조우
 
마틴 브레스트는 <조 블랙의 사랑>에 알란 스미시란 이름을 붙였다. 운항시간에 맞추어 무단으로 편집됐다는 <여인의 향기> 비행기판에도 알란 스미시란 이름을 붙였다 알려져 있는데, 두 번째로 이 가명을 제 작품에 붙였던 것이다. 뿐인가. 감독이 참여한 시사회에서는 대놓고 쿨쿨 졸아서 비아냥을 사기도 했다. 제목엔 사랑을 붙였으나 <조 블랙의 사랑>은 저를 낳은 이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고 태어난 것이다.
 
당대 할리우드 키드에게 전해진 이 같은 정보는 가뜩이나 실망스럽던 감상에 나름의 설득력을 부여했다. 역시 이 영화는 별로였던 거야 하고 말이다.
 
줄이고 줄여도 3시간, 그마저도 충실히 매만지지 못한 영화는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북미 박스오피스에선 제작비의 절반도 뽑지 못할 만큼 저조한 기록을 올렸다. <여인의 향기>가 가져다 준 명성으로 안소니 홉킨스와 브래드 피트를 함께 캐스팅하며 주목받은 걸 고려하면 초라한 성적이다. 두 배우는 앞서 <가을의 전설>에서도 공연하며 세계적 화제가 되었는데, 당시 이 영화가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 <조 블랙의 사랑> 스틸컷

영화 <조 블랙의 사랑>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성공한 사업가 앞에 나타난 저승사자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 <조 블랙의 사랑>은 내가 아끼는 영화 중 하나가 됐다. DVD방에 다니던 시절, 러닝타임이 긴 영화 만큼 반가운 건 없었기에 오가며 제법 본 덕이기도 했다. 수차례 감상으로부터 나는 이 영화에 매력적인 구석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영화사의 설득으로 제 이름을 붙였으나 끝까지 애정을 드러내진 않았던 마틴 브레스트가 야속해질 만큼.
 
이야기는 언론사 사주로 크게 성공한 사업가 빌 패리쉬(안소니 홉킨스 분)의 65세 생일잔치를 앞두고 시작된다. 대규모 파티를 기획하는 맏딸(마르시아 게이 하든 분)은 좀처럼 아버지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 사업에 온 정신을 쏟고 있는 빌이 그래도 관심을 두는 건 둘째 딸 수잔(클레어 폴라니 분)이다. 빌을 닮아 똑똑한 수잔은 빌의 오른팔 격인 드류(제이크 웨버 분)와 교제하는 중이지만 둘 사이엔 이렇다 할 감정이 끓고 있진 않다.
 
이야기는 빌 앞에 특별한 존재가 나타나며 본격적으로 흘러간다. 죽은 이를 사후세계로 데려가는 저승사자(브래드 피트 분)가 바로 그로, 빌에게 그야말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 말하자면 빌의 수명이 이미 다했으나 제가 그를 연장해주겠다는 것이다. 대신 제가 인간세상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저를 안내해야 한다는 게 조건이다. 저승사자의 인간세상 휴가 가이드, 말하자면 빌이 맡은 책무가 그것이다. 몇 분, 몇 시간, 며칠, 어쩌면 몇 달이나 몇 년일 수도 있을 그 휴가 동안 빌은 저승사자와 함께 지낸다.
 
 영화 <조 블랙의 사랑> 스틸컷

영화 <조 블랙의 사랑> 스틸컷 ⓒ 유니버설 픽쳐스

 
무엇이 이 영화를 비범하게 하는가
 
정체를 숨긴 저승사자는 모든 게 처음이다. 땅콩버터를 처음 맛보고는 그 맛에 반해버리고, 빌의 딸 수잔에겐 그보다도 더 흠뻑 빠져버린다. 빌과 함께 다니다보니 그의 회사 사정도 속속들이 알게 된다. 갈수록 침체되는 언론계에서 빌의 회사는 새 시대에 접어들지 못하고 휘청거리고 있다. 그보다 덩치 큰 자본과 입수협상에 돌입한 것도 그래서다. 더 큰 자본으로 새 시대에 맞게 변신하는 게 회사의 계획이다.
 
드류가 주도하는 인수합병을, 그러나 빌은 탐탁지 않게 바라본다. 우선 협상대상자로 지정된 상대가 언론의 철학이며 사명을 지킬 만한 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후 영화는 조가 수잔과 가까이 지내며 관계를 맺는 이야기를 주축으로, 빌이 저를 물러나게 하려는 드류의 음모에 맞서는 과정으로 흘러간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아쉬운 점이 있는 게 사실이다. 사랑도, 입수합병 계획과 그 아래 깔린 음모도, 이를 막는 조치까지도 모두 어디서 수도 없이 보아왔단 생각이 든다. 그러나 <조 블랙의 사랑>은 분명 드문 매력을 지녔다. 그건 다름 아닌 배우들의 존재로부터 나온다.
 
눈앞에 나타난 저승사자에게 굴하지 않고 제가 사랑하는 것을 지켜내려는 빌을 안소니 홉킨스는 훌륭히 연기한다. 브래드 피트는 영화의 다른 무엇보다도 빛나는 매력을 발한다. 많은 이들이 브래드 피트가 가장 아름답게 나오는 영화로 이 작품을 꼽는 것도 당연하다. 드문 매력을 지닌 이들이 공력을 담아 연기하니 평범한 무엇도 비범하게 느껴진다. <조 블랙의 사랑>은 바로 그런 비범함을 지녔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이 영화를 아끼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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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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