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금융시장의 실패를 얘기한 후 금융업의 개선 방향을 논의할 때에는 금융당국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는지 먼저 성찰하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금융업의 시장실패가 자본주의의 구조적 원인에 의한 면이 있다 하더라도, 그 치유는 국가가 우선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은 시장을 분석하는 연구기관이 아니라 실제 금융시장의 실패를 예방하고 발생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곳이다.

로버트 쉴러(Robert J. Shiller) 예일대 교수는 "금융시장의 실패가 곧 금융위기, 사고의 역사라고 할 때 금융회사의 잘못된 성과 체계에 따른 탐욕, 효율적 시장 가설의 맹신에 기반한 위험 관리 실패는 감독 정책의 실패와 공통 분모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정책 결정자의 업무는 금융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을 줄이고 경기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이다"라고 하며 금융당국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금융당국은 첫째, '국가 위험관리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 번개가 잦으면 천둥이 울리듯 금융사고 전에는 여러 징후가 있다. 재해와 관련해서 널리 알려진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이 있는데, 이는 하나의 대형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위기를 보여주는 29번의 사고가, 그 전에 경미한 위험신호가 300번 있다는 통계 법칙을 말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에도 은행의 과도한 대출 등에 대한 경고가 있었고, 우리나라의 2019년 부실사모펀드 사태 전에는 KIKO 파생상품, 다른 펀드 부실판매의 위험신호가 있었다. 이와 같이 금융위기, 사고 전에 여러 징후가 있었음에도 감독당국은 그 신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는 시장에 대한 과도한 믿음 외에 공직자 업무처리의 '경직성'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시장이 잘못되고 있는 것을 알더라도 내 책임은 아주 일부분이고, 하던 일을 계속해서 하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경로의존 성향과 책임분산 의식이라 할 수 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무사유(Thoughtlessness)'라는 개념에서 "권위에 순응하며 자신의 행동을 보통이라 여기는 평범한 사람들의 행동이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무비판적 사고의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위기분석 전문가인 나심 탈레브(Nassim N. Taleb)는 2008년 금융위기가 사전에 인지되고도 별다른 조치가 없었던 것은 금융시장에서 위기의 책임자들이 인맥으로 얽혀 있어 그랬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이 미국에만 해당한다고 우리는 떳떳이 얘기할 수 있을까? 우리도 금융시장에서 주요 참여자들이 집단적 사고에 익숙한 건 아닐까? 시장을 왜곡하는 것은 개인의 부도덕보다는 폐쇄적 집단주의의 문제일 수 있다. 사회는 금융시장에 집단주의, 연고주의가 만연해 있다는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금융당국자들은 감독 업무를 평소 아무리 잘해도 문제가 생기면 온갖 비난을 받는 일임에도 금융시장의 안정을 지키고 금융소비자를 보호하는 임무라는 사명감을 갖고 헌신적으로 일을 하고 있다. 그 결과 금융시장이 대부분의 경우 안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사고가 나서 수습하기보다 예방이 중요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고 예방에 보상이 돌아가는 경우는 드물다. 사회는 어쩌다 발생하는 금융사고의 파장이 워낙 커 금융당국에 무척 엄정한 잣대를 들이댄다.

금융시장 위험관리에서 또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내용이 '규제 정책'이다. 과거 대부분의 금융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금융업 발전기회 창출을 위한 무분별한 규제완화 또는 규제조정의 실패가 있었다. 금융당국은 시장 상황에 대한 상시적 모니터링, 그에 따른 규율체계의 면밀한 검토와 조정이 유기적으로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째, 금융당국은 금융시장에서 '공정한 심판자'로서의 역할을 올바르게 수행해야 한다. 감독당국은 위기 상황에서 감시견(Watch Dog)의 역할을 잘해 예방 시스템이 작동하도록 해야 할뿐만 아니라 금융시장을 공정하고 엄정하게 관리해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

2023년 2월 6일 튀르키예에서 발생한 강력한 지진으로 남동부 지역 대부분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에르진이라는 도시는 사망자는 물론 무너진 건물도 없어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다른 도시와 달리 이 도시는 건축안전규정을 철저히 지켜 불법 건축물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러한 사례는 엄정한 공적 업무 수행이 위험 관리에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 사례라 할 것이다.
   
2023년 2월 10일 오전  튀르키예 하타이 안타키아 시내에서 지진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시민들이 거리에 앉아있다.
 2023년 2월 10일 오전 튀르키예 하타이 안타키아 시내에서 지진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시민들이 거리에 앉아있다.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금융당국이 시장을 공정하게 관리하기 위해서는 전문성 있는 권위인 '재량권'을 책임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금융감독의 재량권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선별적으로 사용하거나, 시장 참여자에게 불공평하게 적용해서는 안된다. 금융당국이 재량권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투명하고 원칙 있게 사용할 때 국민의 신뢰를 얻어 금융시장을 효율적으로 감독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정책은 국민의 이해와 수용성에 따라 성패가 결정된다.

금융당국이 공정한 역할 수행을 위해서는 시장 참여자와 유착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나, 그렇다고 시장과 소통하는 노력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책상에 앉아서 머리만으로는 현장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낫 놓고 기역자만 알고, 낫의 쓰임새를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소통하면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노력을 떠올릴 수 있는데, 그는 재임 기간 중 1천 회에 가까운 기자회견을 했고, 특히 라디오를 활용한 노변정담(fireside chat)이라 불린 소통을 통해 당시 여론에서 부정적이던 뉴딜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한다. 정책 집행은 이상적인 것과 가능한 것 사이에 일어나는 계속적인 협상 과정으로, 금융당국은 규제·감독을 수용하는 사람의 반응을 항상 생각하고 업무를 해야 할 것이다.

셋째, 금융당국은 '금융소비자를 적극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금융소비자는 시장의 주요 참여자임에도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렵고 금융사고에는 피해자로 등장하기 쉽다. 금융당국은 소비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감독당국의 민원창구를 통해 소비자의 어려움을 해결할 뿐 아니라, 제도의 미비점을 미리 발견하고 개선해 시장의 실패를 방지할 수 있다. 소비자의 불만 제기는 시장의 문제를 미리 인지하게 해주는 고마운 '리트머스 시험지'인지 모른다.
   
2021년 1월 15일 음식점, 호프집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이  서울 영등포구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코로나19 방역 조치에 따른 정부의 영업시간 제한에 항의하며 형평성 있고 합리적인 방역기준 수립해 달라고 요구했다.
 2021년 1월 15일 음식점, 호프집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이 서울 영등포구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코로나19 방역 조치에 따른 정부의 영업시간 제한에 항의하며 형평성 있고 합리적인 방역기준 수립해 달라고 요구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금융당국은 효율성과 성과주의가 지배하는 시장에서 특히 차별받기 쉬운 고령층, 자영업자 등 금융취약 계층에 대해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포용할 의무가 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고, 팬데믹 이후 금리 인상이 진행되고 있어 금융취약계층에 대한 보호의 필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금융시장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계층을 국가가 충분히 포용하지 못할 경우 이들에 대한 차별이 고착화될 수 있다. 국가는 사회적 약자의 보호와 평등의 가치를 실현해야 할 헌법적 의무가 있고, 이 기능은 국가만이 보완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이상에서 건전하고 안정된 금융시장을 위한 금융당국의 노력을 국가위험관리자, 공정한 심판자, 금융소비자의 적극적 보호자로서의 역할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서는 금융당국자에게는 금융시장 상황에 대한 올바른 판단력, 공정한 역할을 해내겠다는 의지, 책임의식이 모두 요구된다.

하지만 공직사회에 대한 낮아진 인식과 영향력, 높지 않은 처우 등으로 상대적 박탈감을 겪고 있는 공직자에게 고결한 '소명의식'만을 요구하는 것이 무리일지 모르겠다. 아무리 개인주의, 각자도생이 만연한 생존주의 시대라 하더라도 공직의 소중한 역할은 존중받아야 한다. 공직자가 긍지와 보람을 갖고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사회의 지원과 응원이 필요하다.

현재 자본주의 세상은 '시장의 힘'에 많이 경도되어 있다. 더욱이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주의의 확산에 따른 시장 우위의 시대에 공정한 금융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하지만 금융당국의 올바른 역할을 빼놓고는 공정한 금융을 상상하기 힘들다. 효율적이고 정의로운 정부가 가장 중요한 '공공재'라고 하지 않는가? 분명한 것은 금융당국이 금융시장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그 성과가 있다면, 공직자로서 스스로의 보람을 느낄 것이고 사회도 이에 정당하게 반응할 것이다.

태그:#금융당국의역할, #금융업시장실패, #폐쇄적집단주의, #금융감독재량권, #금융소비자보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2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금감원에서 30 여년을 근무하고 부원장보를 마지막으로 퇴직했습니다. 건전하고 공정한 금융질서 확립과 금융소비자보호라는 조직의 존재이유와 내 본성, 가치추구와의 어울림이 커 업무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올바른 금융시장을 위한 고민을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글을 쓰려고 합니다. 이 글이 금융업의 공정성제고를 위한 생산적 논의의 장이 되길 희망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