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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가까워지니 간간이 명절에 어디로 가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다보면 열에 아홉으로부터 의아하다는 반응도 받는다.

"이제 곧 추석인데, 어디가?"
"서울로 갑니다."

"부모님이 서울에 계셔?"
"아니요. 요 옆 아파트에 사세요."

"어디 놀러라도 가는가 보네."
"아니요. 와이프 친정이 서울입니다."

"....... 처가를 먼저 간다고?"


명절에 처가를 '먼저' 간다는 것이 의외라는 반응이다. 집에 제사도 없고 차도 안 막혀서 반대로 움직이는 거라고 하면, 그제야 "그것도 괜찮겠네"라며 수긍한다. 물론, 와중에 몇 사람은 "그래도..."라며 말꼬리를 흐린다.

"그래도 아들인데, 부모님 댁부터 가야 하지 않나?"
"그래도 부모님이 서운해 하실 텐데, 괜찮나?"


다 듣지 않아도 말줄임표에 들어갈 말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오래도록 그래왔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으니. 그런데 이 대화에서 놀라운 것은 명절에 '어디 놀러가는 것'은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여기는 듯한데 '처가를 먼저 가는 것'은 쉽게 접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명절에 다른 곳으로 놀러 가기도 하는 시대에 처가에 먼저 가는 것 정도야 아무렇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나 역시 사람들의 반응에 모순이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놈의 고정관념.
 
결혼 후 첫 명절 계획

  
2022년 추석 연휴 첫날. 서울 서초구 잠원IC 부근 경부고속도로 부산 방향의 모습.
 2022년 추석 연휴 첫날. 서울 서초구 잠원IC 부근 경부고속도로 부산 방향의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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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첫 명절은 추석이었다. 추석이 가까워진 어느 날, 간만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어머니가 명절 계획을 물으셨다.

"단양 안 가고 서울로 간다고?"
"그래야죠."

"언제 올라 갈 낀데?"
"모르겠네요. 당일 차 많이 막히려나?"

"억~~쑤로 막히지. 전에 TV 몬 봤나?"
"그 다음날 올라가면 좀 낫지 않을까요?"

"또~~옥~~같다. 당일부터 막히지 계속 막히지."
"흠...."

"고마 서울부터 갔다 온나. 제사도 없는데 그라믄 되지."
"...... 어머니, 천재?"


나도 생각해보지 못한 해결책을 어머니가 제시했다. 지내는 제사도 없고 가까이 있으면서 종종 뵈어서인지 어머니는 쿨내 진동할 정도로 태연하게 말씀하셨다. 놀랍게도 어머니가 가진 생각의 틀은 딱딱하지 않았다. 유연하고 합리적이었다.

하루 이틀쯤 이르거나 늦으면 어떠냐고 말씀하시던 어머니. 어디까지나 마음씀씀이와 태도에 중점을 둔 어머니의 결단은 아들 내외의 편안함이었다. 그러고 보니 외할머니 생전에 올케들에게 제사 준비가 부담스러우면 제사 음식을 사라고 한 것도 어머니였는데, 참... 멋지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명절에 나눠먹으려고 부친 꼬치전
▲ 스팸 꼬치전 명절에 나눠먹으려고 부친 꼬치전
ⓒ 장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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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깔끔한 정리 덕분에 명절이면 맘 편히 처가를 먼저 들른다. 보통은 우리 가족이 도착할 때쯤이면 꼬치전을 만들기 위해 분주한데,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나면 모두가 둘러 앉아 꼬치전을 만들기 시작한다. 예외 없이 바로 노동력 투입이다. 반가움의 진의가 살짝 의심된다.

어느 정도 꼬치가 쌓였다 싶으면 옆에서 계란과 밀가루를 입혀 바로 구워낸다. 솔솔 올라오는 먹음직스런 냄새에 일하는 손이 다 즐겁다. 그러다 갓 구워낸 꼬치전을 한입 베어 물면... 한 잔 가득 따라져 있던 맥주가 어느샌가 사라져 있다. 그렇게 명절이 시작된다.

걱정거리였던 명절을 즐기다

자주 들르지 못하는 탓에 명절 연휴 동안은 서울에서 지내다 온다. 그리 오래 있으면 불편하거나 심심하지 않느냐는 질문도 받지만, 하나같이 둥굴둥굴한 분들이라 불편하기는커녕 함께하는 것이 즐거워 심심할 틈이 없다. 생각해보면 나로서도 신기한 일이긴 하다.

어린 시절 나에게 명절은 걱정거리였다. 명절 새벽에 일어나 제사를 지내야하는 것이 싫기도 했지만, 어째서인지 하나부터 열까지 어머니의 모든 것을 타박하는 아버지의 화난 모습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시댁에 왜 더 일찍 가지 않았냐... 왜 일찍 돌아왔냐... 어려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른이 된 지금도 의문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는 어째서 모든 것이 불만이었을까. 내가 아빠가 되고 나서도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한 집안의 장남의 장남으로 태어나 제사가 있을 때마다 빠짐없이 할아버지 집을 향했지만, 친가 식구들과 즐겁게 웃고 떠든 기억이 별로 없다. 모이는 식구가 얼마 없기도 했지만 어른들의 묘한 기류가 무척이나 불안했다.

명절의 유일한 낙은 외가 식구들과의 만남이었지만 그나마도 시간이 길어지면 아버지의 눈치가 보여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언제나 농담이 오가는 느긋한 분위기가 참 좋았는데 그 시간만큼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나마 그 시간이 있었기에 명절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경험할 수 있었다.

이제는 명절을 즐긴다. 그리고 사위가 된 나는 처가에서 그렇게 싫어하던 제사를 지낸다.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되지만, 어째서인지 거부감 없이 상차림을 돕고 절을 올린다. 어쩌다 나는 그리도 부담스러웠던 명절과 귀찮아하던 제사를 거부감 없이 할 수 있게 되었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거기엔 '정해져 있지 않음'이 있었다.

음식 준비하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았고 치우는 사람도 때마다 달랐다. 지나치게 놀기만 한다 싶으면 타박을 서슴지 않았고 그 타박의 대상은 걸렸다는 듯 멋쩍어하며 몸을 일으켰다. 물론 무척이나 아쉽게도 사위인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편했다.

분명 같은 명절임에도 현저히 다른 분위기에서 즐거울 수 있는 이유는 결국 함께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관습의 큰 틀은 따르지만 명절을 어떤 시험대나 무언가를 증명하는 기회로 여기지 않는 태도, 누군가의 노동으로 몸이 편해지지 않으려는 태도, 늦거나 일찍 떠나야하는 각자의 사정에 수긍하며 비난이 아닌 아쉬움을 전하는 태도, 그런 태도들이 명절을 명절답게 만들었다.

명절, 시댁, 친정, 본가, 처가
 
명절을 앞둔 사람들의 심정
 명절을 앞둔 사람들의 심정
ⓒ MBC 무한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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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명절 친정", "명절 시댁" 혹은 "명절 본가", "명절 처가"라고 검색을 해보니 예상대로 갖가지 글들이 쏟아졌다. 어디를 먼저 가냐부터 언제 갔다가 언제 와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까지... 결혼 후 명절엔 친정가는 걸 포기했다는 이의 글도 보였다.

이런 저런 의구심과 불만, 그리고 결단의 글을 보며 관습 속 인간관계라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는 게 느껴졌다. 명절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의미를 되새기다 가족이라는 더 중요한 의미가 퇴색될까 괜한 걱정마저 일었다.

서로 간의 합의나 이해를 통해 조율할 순 없는 일일까. 다 좋자고 하는 일인데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나는 일하는데 누군가는 놀고만 있다. 우리 집엔 오래 있지 않으려 한다. 다 같은 부모고 다 같은 자식인데 이런 저런 것에서 형평성에 어긋난다. 결국 손해 본다는 생각이 사람을 힘들게 만드는 듯했다.

그런데 여러 글들에서 간절히 갈구하지만 뜻만큼 얻지 못한 것은, 일하지 않고 쉬는 시간도 자신의 집에 머무는 시간도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배려'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힘듦을 이해하는 따뜻한 말 한 마디, '원래'라는 말을 뺀 터놓고 나누는 대화와 계획, 마지못한 상황에서의 다독거림 같은 것 말이다.

얼마 있지 않아 추석이다. 벌써부터 갈 길을 걱정하고 명절 동안의 갖은 스트레스를 되새김질 하고 있진 않은지 모르겠다. 먼 길, 막히기까지 하는 먼 길을 달려서라도 만나야 하는 소중한 사람들끼리 부디 조금씩의 배려로 풍성한 한가위를 맞길 소망합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이제는행복한중년, #명절, #추석, #어디부터가나, #얼마나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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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렀지만 넌 또 모르잖아"라는 생각으로 내일의 나에게 글을 남깁니다. 풍족하지 않아도 우아하게 살아가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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