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편집자말]
와인에 갓 관심을 가지게 된 시절의 나는, 빈한한 작가 나부랭이 주제에 저렴한 와인에 대한 선입견으로 가득 차 있었다. 1만 원대 와인을 손수레에서 아무렇게나 파는 번데기, 다슬기처럼 얕잡아 보았달까. 그래도 와인이 3만 원 정도는 되어야 제구실하지 않겠나 싶었다. 그러한 판단의 근거는? 전혀 없었다.

그랬던 내 편견이 여지없이 깨진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2015년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마트에서 수입사 직원의 추천으로 구매한 1만 원대 와인 한 병이 천덕꾸러기인 마냥 싱크대 밑 수납공간에 널브러져 있었다, 3만 원대 와인은 셀러나 냉장고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데도 말이다. 종이컵에 담아 먹는 번데기나 다슬기 취급을 한 게지.

마침 전날 먹다 남은 감자전, 애호박전이 주방에 있길래 허기를 채우려고 젓가락으로 야무지게 집어서 우적우적 씹는 중이었다. 전 특유의 느끼하고 기름진 맛을 나름 우아하게 씻어내려고 싱크대 밑의 그 녀석을 무작정 열어서 마셨다. 가격이 가격인지라 별 기대가 없었는데 예상을 뛰어넘는 맛에 놀라 라벨에 그러진 양의 얼굴을 새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1만 원대 초반 와인도 꽤 맛있구나. 아무렴. 좌판에서 파는 번데기나 다슬기도 맛있고 말고.

애호박과 잘 어울린 와인, 이번에도?
 
전날 먹다 남은 감자전, 애호박전과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 르 그랑 누아 피노 누아 전날 먹다 남은 감자전, 애호박전과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 임승수

관련사진보기

 
그래서, 그 와인 이름이 뭐냐고? '르 그랑 누아 피노 누아'다. 르 그랑 누아는 제품명이고, 피노 누아는 포도 품종이다. 특히 애호박전과의 궁합이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애호박전 특유의 촉촉한 질감을 좋아한다.

깻잎전, 육전 같은 것들은 계란옷 내부에 육덕지고 뻑뻑한 질감의 내용물로 그득하지만, 애호박전은 치아가 계란옷을 파고들면 애호박이 품고 있는 촉촉한 물기와 만나게 된다. 그것이 마치 육수 품은 샤오롱바오처럼 인상적이다. 그 특유의 질감은 따뜻한 물에 족욕을 하는 것과 같은 나른한 느낌을 주는데, 육체파 전의 섭취로는 체험할 수 없는 힐링의 맛이다.

애호박전 특유의 부드러움과 촉촉함을 여유롭게 탐닉한 후 섬세하고 부드러운 피노 누아 한 잔을 살포시 들이켠다. 오! 족욕 후 제공되는 부드러운 마사지라고나 할까. 그 순간 전신안마의자에 몸을 의탁했을 때나 지어질 법한 미소가 머금어진다.

물론 인간의 기억은 그렇게 신뢰할 만한 게 아니다. 온갖 해괴한 미사여구를 동원해 묘사한 애호박전과 1만 원대 피노 누아의 저세상 궁합도 무려 8년 전 일이다. '내가 소싯적에'로 시작하는 회고담 따위가 얼마나 신뢰도가 떨어지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상당 수준의 기억 왜곡 혹은 미화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란 어렵다.

그리하여 검증 작업에 들어갔다. 가까운 마트에서 르 그랑 누아 피노 누아를 구매하고 배달앱으로 모듬전(애호박 포함) 주문을 넣었다. 배달 오기를 기다리며 8년 전 마우스필의 추억을 되새기다가 문득 재밌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레드와 화이트 중 어느 쪽이 전과 더 잘 어울리는지 대결을 붙이자. 얼마 전 마셨던 1만 원대 화이트 와인이 참 괜찮았지. 돼지고기와 찰떡궁합이었는데 과연 전하고는 어떨까? 마침 한 병 더 사놓은 게 냉장고에 있어서 냉큼 꺼냈다.

언제나처럼 식탁 맞은편에는 아내가 앉아 있다. 이제 전을 섭취한 후 레드와 화이트를 각각 마시고 품평에 들어갈 순간이다. 부부가 두 병을 다 마시기는 좀 버겁지 않냐고?

뭐가 걱정인가. 주량껏 마시고 남은 와인은 보관했다가 며칠 후 다시 마시면 되지. 하루만 지나도 와인이 산화되어 맛과 향이 한풀 꺾이는데? 와인을 좀 아는 분이구먼. 하지만 나에게 다 대책이 있다. 보르미올리 스윙보틀만 있으면 된다.

남은 와인을 보관하는 꼼수
 
스윙보틀에 와인을 가득 채우면 병 안에 유입된 공기량이 극히 적어 산화를 늦출 수 있다.
▲ 스윙보틀에 담긴 와인 스윙보틀에 와인을 가득 채우면 병 안에 유입된 공기량이 극히 적어 산화를 늦출 수 있다.
ⓒ 임승수

관련사진보기

 
사진 속 작은 스윙보틀의 용량은 250mL다. 와인 한 병이 750mL이니 스윙보틀 세 개에 옮겨 담을 수 있다. 스윙보틀에 와인을 가득 채우면 병 안에 유입된 공기량이 극히 적어 산화를 늦출 수 있다. 이렇게 냉장고에 보관하면 며칠 있다 마셔도 상태가 썩 괜찮다.

이런 꼼수를 쓰게 된 건 와인을 매일 한 잔씩 마시기 위해서였다. 누가 말하지 않았나.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며칠 간격으로 한 병을 마시는 것보다 저녁 식사 때 아내와 매일 한 잔씩 마시면 소소하나마 행복의 빈도가 잦아진다. 와인 한 병을 250mL짜리 스윙보틀 세 개에 나눠 담고 하나씩 꺼내어 먹는 그 꿀맛이란.

주문한 모듬전이 도착했다. 드디어 추억의 레드 와인을 개봉해 잔에 따라내어 한 모금 맛보았다. 어? 예전에는 드라이한 것 같았는데 오늘은 살짝 잔당감이 있네? 1만 원대임을 고려하면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뭔가 아쉽다. 8년 전 기억은 정녕 왜곡과 미화의 결과물이었던가.

일단 찝찝함은 제쳐놓고 레드와 화이트 비교 체험에 들어갔다. 묵직한 깻잎전 하나를 와구와구 씹은 후 레드 와인을 마셨다. 잠시 후 똑같은 방식으로 화이트 와인을 마셨다. 확연한 차이가 감지된다. 어느 쪽이 이겼냐고? 레드가 훨씬 낫다. 화이트에 비해 타닌과 바디감이 강한 레드는 깻잎전의 뻑뻑하고 묵직한 질감과 한층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그에 비하면 화이트와 깻잎전은 서로 서먹서먹하다. 스포츠에 비유하자면 깻잎전이 역도 선수고 화이트 와인이 피겨 스케이팅 선수인데, 무슨 일인지 한 체육관(구강)에서 두 종목 대회를 동시에 치르는 격이랄까. 어색하지 않을 리가 없다.

아내 역시 화이트보다 레드가 낫단다. 평소 화이트 와인의 열혈지지자인 아내조차 손을 들어줄 정도이니 레드의 완벽한 승리다. 이제 화이트는 저만치 밀어놓고 레드 위주로 술잔을 기울였다. 아내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덧 마지막 잔이 남았을 때였다.

분명 떫었는데... 갑자기 왜 맛있지?

이것 봐라? 갑자기 와인이 왜 이렇게 맛있어졌지? 갓 개봉했을 때보다 잔당감이 누그러들고 맛의 균형감이 몰라볼 정도로 좋아졌다. 어이쿠! 이 와인을 너무 섣부르게 판단했구나. 애초에 삼십 분이라도 브리딩을 하고 마셨다면 훨씬 나았을 텐데.

브리딩(breathing)은 와인을 개봉해서 공기와 접촉하게 만드는 행위를 의미한다. 와인은 대체로 개봉해서 바로 마셨을 때보다 일정 시간 동안 공기와 접촉하면 떫은 맛이 한결 부드러워지고 맛과 향의 밸런스가 개선된다.

특히 고급 와인의 경우는 그 차이가 더욱 극명해서 와인 애호가들은 마시기 서너 시간 전부터 애지중지 브리딩을 하기도 한다. 저렴한 레드 와인도 대체로 삼십 분 정도 브리딩을 하면 맛과 향이 개선되는데, 나는 갓 개봉해서 달랑 한 모금 마시고서는 기대에 못 미친다고 타박한 것이다. 3만 원대 레드 와인이었다면 더 신경 써서 브리딩 했겠지.

겸연쩍은 마음으로 라벨 속 양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내가 1만 원대 와인과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싶었다. 직업이 작가다 보니 또래 직장인들과 비교해 수입이 적은 편이다. 와인을 위해 여타 비용을 줄이다 보니 옷이라고는 몇 년간 제대로 사 입은 기억이 없다. 고로 행색은 수수함과 초라함의 경계를 넘나든다.

내 글이나 책을 읽은 극소수 독자가 아니고서야 누가 나를 1만 원대 와인 이상의 존재로 여기겠는가. 처음 만난 사람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서는, 내가 1만 원대 와인을 대했던 방식 그대로 나에게 했다면 분명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와인아. 서로 비슷한 처지인데 서운하게 대해서 미안하구나. 다음번에 또 만난다면 꼭 정성들여 삼십 분 이상 브리딩 할게.

태그:#임승수, #피노 누아, #애호박전, #모듬전, #스윙보틀
댓글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