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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 생가인 경북 안동 임청각. 임청각 복원을 위해 일제시대 설치되어 최근까지 기차가 오가던 철길 해체 공사가 한창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 생가인 경북 안동 임청각. 임청각 복원을 위해 일제시대 설치되어 최근까지 기차가 오가던 철길 해체 공사가 한창이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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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룡은 구한말 나라가 지극히 어려워져가고 있는 시기에 태어났다.

안동 김씨의 세도가 문중의 아흔아홉칸 대저택 임청각(臨淸閣)에서 아버지 승목(承穆)과 어머니 안동 권씨의 3남3녀 중 장남으로 출생한 것이다. 보물 제182호로 지정된 이 저택은 조선500년의 유풍(儒風)과 높은 기개 속에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소이다.

국가적으로는 어느 때보다 어려운 시기에, 그러나 가문과 가통으로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안동 김씨의 집권세력인 노론 벽파처럼 시세를 추종하면 금수저는 유지되거나 더 늘리고, 남인 시파처럼 양심에 때라 저항하면 유배되거나 몰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노론 계열 중에는 이항로와 같은 척사운동을 일으킨 인물도 있었다. 안동지역은 남인계열에 속하여 중앙 진출을 못하고 그 대신 향촌사회를 장악하였다. 

이상룡의 가문이 안동에 자리잡은 것은 15세기 후반이다. 개국공신 이원(李原)의 7형제 중 여섯째로서, 김종직의 문하로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진해와 영산의 현감을 지낸 이증 때부터이다. 이상룡의 19대조이다. 

의협심이 남달리 강했던 이증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쫓아내고 왕위를 찬탈하는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불의한 군주의 녹을 받고 살 수 없다 하여 영산현감을 버리고 안동으로 들어왔다. 이와 같은 곧은 절조는 집안의 가풍이 되었다.

이상룡의 아버지도 1871년 3월 대원군에 의해 서원철폐령이 내리자 반대 상소문을 올려 시정을 촉구했다. 만동묘의 철폐를 시작으로 왕이 친히 이름을 지어 현판을 준 47개의 사액 서원을 제외한 모든 서원이 철폐되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서원이 크게 늘어나 전국에 679개에 이르고, 더러는 백성들에 대한 폐단이 적지 않았으나 문화적으로 기여한 바도 없지 않았다. 

이상룡이 태어나고 자란 임청각은 18대 선조인 이명이 의흥 현감의 직을 버리고 안동으로 들어와 지은 집이다. 당시로서는 아무나 시도하기 어려운 아흔아홉칸의 대저택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 생가인 경북 안동 임청각. 임청각 복원을 위해 일제시대 설치되어 최근까지 기차가 오가던 철길 해체 공사가 한창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석주 이상룡 선생 생가인 경북 안동 임청각. 임청각 복원을 위해 일제시대 설치되어 최근까지 기차가 오가던 철길 해체 공사가 한창이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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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태어난 1858년 이후의 시대사를 살펴보자.

1860년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고, 1862년 진주를 시작으로 익산·개령·함평 등에서 임술민란이 일어났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정권을 장악했다. 1864년 최제우가 처형당하고, 만동묘 철폐령이 내리자 유생 2천여 명이 반대상소를 올렸다. 경복궁 중건이 시작되고,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병인양요가 거푸 일어났다. 1868년 1월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이 시작되었다. 

국내외적으로 많은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이런 사건·사태들은 이상룡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암초가 되거나 과제의 시발이 되었다. 

명문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상룡은 어릴 때부터 대범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글공부에도 재능을 보여 6, 7세에 한시를 지어 어른들을 놀라게 하였다. 10세를 전후하여 사서삼경을 읽고 이해하였으며 친척인 평담(平潭) 이전(李銓)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는 이상룡 소년이 대장부가 될 수 있도록 키워준 스승이었다. 

당시 조혼 풍습에 따라 열 네살 때에 이웃마을 천전리에 사는 의성 김씨 진린(鎭麟)의 장녀와 결혼하였다. 부인은 이후 평생을 파란 많은 남편을 따라 수발하면서 가정을 지켰다. 결혼한 지 1년 후 아버지가 불시에 돌아가셨다. 아직 15세의 소년으로 부친의 죽음을 맞기란 쉽지 않았다.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셨으나 큰 가문의 장남으로서의 역할은 만만치 않았다. 

부친의 3년 상을 치르고 아버지 대신 어린 동생들을 보살피면서 가문의 대소사에 정성을 다하였다. 너무 일찍 세상물정을 익히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서산(西山) 김흥락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에 매진하였다. 그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은 한학자였다. 
  
김흥락은 28세 되던 해에 <입학오도(入學吾圖)>라는 책을 저술해 학문의 방법을 체계적으로 구성하고 제시한 학자였다. 그는 이 책에서 학문을 닦는 방법에는 뜻을 세워야 하고, 예의가 바르고, 이치를 잘 따질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어야 한다는 네 가지 기본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학문하는 사람은 마음을 잘 닦아 깨끗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상룡은 김흥락의 학문에 대한 사상을 마음 깊이 새기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주석 2)


주석
2> 채영국, <서간도 독립군의 개척자>, 18쪽, 역사공간, 2007.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암흑기의 선각 석주 이상룡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이상룡, #석주이상룡평전, #이상룡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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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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