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페낭 섬에서의 며칠을 뒤로 하고 떠난 곳은 말레이시아의 수도인 쿠알라룸푸르였습니다. 한때 아시아에서 가장 긴 다리였던 페낭대교를 지나, 다섯 시간 가까이 차를 타고 달려야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만난 풍경도 페낭에서 제가 받은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자로 된 간판이 늘어서 있는 건물 사이, 숙소에 찾아가니 인도계의 아저씨가 카운터를 지키고 앉아 있습니다. 숙소에 짐을 풀고 걷다 보면 멀리 쿠알라룸푸르 타워가 보이고, 높은 첨탑에서 울리는 아잔 소리도 여전합니다.

하지만 쿠알라룸푸르는 수도 치고는 조금 독특한 도시이기는 합니다. 일부러 행정수도로 건설한 도시가 아닌데도, 국가의 역사에 비해 상당히 짧은 역사를 가진 도시거든요.

끝없는 반동과 반목의 역사
 
쿠알라룸푸르 센트럴 마켓
 쿠알라룸푸르 센트럴 마켓
ⓒ Widerstand

관련사진보기


쿠알라룸푸르는 영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만들어진 도시입니다. 말레이 반도 내륙에서 주석 광산이 발견되며 영국의 주도로 광산 개발이 시작되었고, 이를 위한 배후 도시로 건설된 것이 쿠알라룸푸르였습니다. 처음 도시가 만들어진 것이 1857년의 일입니다. 주석 광산과 고무 플랜테이션을 기반으로 막대한 수익을 내던 쿠알라룸푸르는 곧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중국계나 인도계가 쿠알라룸푸르에, 나아가 말레이시아 전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물론 중국계의 경우 오래 전부터 동남아시아와 무역을 이어가며 정착해 왔던 인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대규모는 아니었죠.

영국은 광산과 항구에서 일할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중국인 노동자를 정책적으로 이주시켰습니다. 인도계는 주로 플랜테이션 농업에 활용하기 위해 이주시켰죠. 누군가는 경제적 이유로, 누군가는 강제로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쿨리(苦力)'라 불리던 이들이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현재까지도 말레이시아 인구의 25%를 차지하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과 7~8%를 차지하는 인도계 말레이시아인은 이렇게 말레이 반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쿠알라룸푸르의 경우 현재까지도 중국계가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도시입니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말레이계가 중국계보다 많아진 것은 2010년대에 들어온 뒤의 이야기죠.
 
쿠알라룸푸르의 차이나타운
 쿠알라룸푸르의 차이나타운
ⓒ Widerstand

관련사진보기


말레이시아의 독립 이후에도 상황은 이어졌습니다. 말레이 반도는 2차대전기 일본의 지배를 받았지만 종전 이후 다시 영국의 치하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식민 지배자에 대한 반발은 거셌습니다. 영국 내부적으로도 경제 사정은 파산에 가까웠죠. 결국 새로 들어온 노동당의 애틀리 정권은 식민지의 점진적 독립을 추진하게 됩니다.

말레이 반도에는 1946년 말라야 연합(Malayan Union)을 거쳐 1948년 자치국인 말라야 연방(Federation of Malaya)이 건설되었습니다. 그리고 1957년 8월 31일, 말라야 연방이 완전한 독립국으로 승격되면서 말레이시아는 식민지 역사를 청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곧 보르네오 섬에 있는 영국 식민지, 사바 주와 사라왁 주도 말라야 연방 가입을 결정합니다. 현재의 동말레이시아죠. 이미 독립한 싱가포르도 여기에 함께했습니다. 그렇게 1963년, 말라야 연방에 세 개 주가 추가로 가입합니다. 국호도 현재와 같은 '말레이시아'로 변경되었습니다. 이렇게 근대국가로서의 말레이시아가 탄생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레이시아의 독립을 알리는 신문기사
 말레이시아의 독립을 알리는 신문기사
ⓒ Widerstand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이 과정이 평화적이기만 했을 리 없습니다. 말레이시아는 그 연방제 국가의 틀 안에 누구라도 들어올 수 있는 개방과 융합의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말레이시아의 건설은 그에 대한 끝없는 반동과 반목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1946년 영국이 처음 말라야 연합을 만들었을 때부터, 영미법의 전통대로 출생지주의에 따라 국적을 부여하자 수많은 말레이인이 반발했습니다. 중국계와 인도계에게 국적을 줄 수 없다는 것이었죠. 말라야 연방이 건설된 뒤에도, 모든 인종의 평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말레이 공산당은 몇 년 동안 게릴라전을 펼치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중국계와 인도계에게 국적을 부여하는 형태로 말레이 연방은 만들어졌지만, 1963년 편입된 세 개 주는 또다른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사실 지난번 글에서 언급했던 대로, 동말레이시아의 연방 가입은 말레이계의 인구를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지목되기도 합니다.

보르네오에 관심을 보이던 인도네시아는 이에 크게 반발했습니다. 그로 인해 말레이시아는 탄생 직후부터 인도네시아와 갈등해야 했습니다. 이 문제는 UN 표결에까지 부쳐졌죠. 자카르타에서는 말레이시아 대사관에 대한 습격도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문제였겠죠. 

모두들 아시다시피 싱가포르도 곧 갈등의 중심에 섰습니다. 중국계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싱가포르의 인구 구조 때문이었죠. 결국 1965년, 연방 가입 2년 만에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에서 사실상 축출됩니다. 반대표 하나 없는 말레이시아 의회의 만장일치 결정이었습니다.

1969년에는 5.13 사건이라는, 말레이계와 중국계 사이의 대규모 무력 충돌 사건도 발생합니다.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했습니다. 말레이시아의 초대 총리였던 압둘 라만은 이 사건으로 결국 퇴임했습니다.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의회의 기능은 정지되었습니다. 충돌 과정에서 최소 184명이 사망했고, 이 가운데 140명 이상이 중국계였죠.

말레이시아의 다양한 국민들
 
쿠알라룸푸르 타워와 거리 풍경
 쿠알라룸푸르 타워와 거리 풍경
ⓒ Widerstand

관련사진보기


그 이후 말레이시아는 여러 변화를 겪었습니다. 일본을 모델로 한 '향동학습(Look East)' 정책으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뤘죠. 한때 야당 인사 100여 명을 동시에 체포하고, 대법원장까지 체포한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은 사라졌습니다.

독립 이후 계속해서 집권해 왔던 국민전선이 2018년 선거에 패배하며 정권교체도 이뤘습니다. 여전히 온전한 민주주의는 요원하지만, 주변국 가운데 가장 안정적인 국가를 운영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말레이시아에 들어오고 며칠이 지났지만, 저는 이 이질적인 풍경에 아직 익숙해지지 못했습니다. 너무도 다양한 사람들의 옷차림과 얼굴들, 여러 문자로 쓰여 있는 건물의 간판 같은 것들에 말이죠. 아직도 문득 이런 풍경에 놀랄 때가 있습니다.

혹자는 말레이시아의 현대사를 이렇게 평합니다. 말레이시아의 건설은 반공주의와 말레이어, 이슬람교를 기반으로 '말레이인'이라는 허구의 정체성을 창조해내는 과정이었다고요. 그 과정에서 중국계와 인도계는 언제나 배제해야 하는 타자였고, 그 상처는 아직 다 아물지 못했습니다. 제게도 섞일 듯 섞이지 않는, 같은 골목 안에도 서로 묘하게 격리되어 있는 느낌이 다가오곤 합니다.
 
독립광장의 거대한 말레이시아 국기와 각 주의 깃발
 독립광장의 거대한 말레이시아 국기와 각 주의 깃발
ⓒ Widerstand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그렇게 몇 번의 세대가 지나고, 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말레이시아라는 국가의 국민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처음 이들에게 말레이시아는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온 이주지였습니다.

그 뒤에는 현대사의 격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고향을 기다리는 거주지였겠죠.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이제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말레이시아인으로 생애를 살아가는 수많은 중국계와 인도계에게, 이제는 이 땅이 고향이고 정착지입니다.

저는 오늘도 히잡을 쓴 여성과 두꺼운 수염을 기른 인도계 남성과 무거운 배낭을 멘 서양인 여행자까지 모두가 함께 탄 쿠알라룸푸르의 지하철에 올라탑니다. 서두에는 독특하다고 말했지만, 이제 보니 그 역사를 온전히 함께한 쿠알라룸푸르야말로 말레이시아의 수도가 되기 가장 적절한 도시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말레이시아의 현대사가 만들어 낸 다양성은 그간 분란과 갈등의 씨앗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말레이시아의 국민이고 쿠알라룸푸르의 시민이 된 지금, 이제 그 다양성이야말로 '말레이시아'라는 정체성이 될 수는 없을까요.

혹자의 평가대로 말레이시아가 건설되는 지난 세기의 역사가 '말레이인'이라는 정체성을 건설하는 과정이었다면, 다음 세기의 역사는 그 정체성의 벽을 허무는 과정이 되었으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 다양성이 '말레이시아인'을 이루는 정체성이 되는 날을 또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역사와 현장을 경험하지 못한, 스쳐가는 여행자의 속편한 소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쿠알라룸푸르의 풍경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이것이 꼭 말레이시아만의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쿠알라룸푸르는 언젠가 우리가 우리의 도시에서 만나야 할 풍경을, 조금 일찍 겪었을 뿐일 테니까요.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기록되지 않은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