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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산책
 공원 산책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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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다

사이다가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속 시원하고 가슴을 뻥 뚫어줄 도구가 필요한 순간이. 뭔가 답답한 장면을 볼 때마다 사이다라는 단어를 체증해소의 신흥종교처럼 읊조릴 만큼 반어적으로 우리에겐 아직 소화되지 못한 채 가슴속에 남아있는 응어리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이야기겠지요.

정말이지 그런 '사이다'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날에 한 잔 들이켜고 나면 묵은 체증이 내려가고 새 몸 새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할 수 있게 도와주는 마법의 음료수가 말입니다. 그러면 원치 않는 감정의 찌꺼기들로 새해를 새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을 방해하는 일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해가 바뀌어도 삶은 연속된 과정이지 하루 끝에 마감되고 새날에 시작되는 일간지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때때로 해답이 없는 문제에 직면한 듯한 기분이 들곤 합니다. 다행히 새로운 하루보다 새로운 해가 가지는 의미는 힘이 세서 '어려움' 보다 '해결의 의지'에 더 마음이 실립니다. 그래서 가슴 한편에 남아있는 불편함을 안은 채로 밖으로 나갑니다. 

불편함의 크기를 힘찬 발걸음으로 줄이면서 걸어갑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렇게 걷다 보면 그제야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시리게 푸른 하늘과 겨울을 온몸으로 맞고 서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펼쳐집니다.
      
동병상련
 
겨울 나무 사이로 비추는 햇빛
 겨울 나무 사이로 비추는 햇빛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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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100년도 못 사는 인간이 몇 백 년 사는 나무를 가엽게 여기는 것이 자고자대(自高自大)가 따로 없지만 말입니다. 나무는 상관없다는 듯 위안을 줍니다. 연초록의 싱그러운 잎들이 돋아날 때에도, 짙푸른 초록잎을 살랑거리며 넉넉한 그늘로 품어줄 때에도, 심지어 잎을 모두 떨구고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있을 때에도 말입니다.  
    
 저 멀리, 공원을 관망할 수 있는 정자가 보입니다. 계단을 반쯤 올라가니 한 중년의 여성이 기도문을 외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녀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발걸음을 돌립니다. 그토록 간절한 목소리로 드리던 기도는 무슨 내용이었을까요? 마음의 무게가 목소리만으로도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부디 새해에는 그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져 그녀가 짊어진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봅니다.

 정자의 계단을 내려오는 길, 공원의 풍경이 사방으로 펼쳐집니다. 키가 작은 들풀과 겨울 야생화들. 당연지사이지만 살아있는 것에는 생명력이 깃들어있고, 또 다른 존재에게 생명력을 전달하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흙을 밟으며 걸으면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존재라는 것이 실감(實感) 나기도 합니다. 제가 자연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이 말입니다. 
   
죽음을 생각합니다.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상기하면, 역으로 용기가 생깁니다. 못할 것도 없고, 겁날 것도 없습니다. 문득, 어릴 적 집에 걸려있던 '가훈'이라고 적힌 액자를 떠올립니다. 성실, 최선이라는 단어 밑에 쓰여 있던 '용기'라는 단어를 생각합니다. 

제가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거실 벽 한 면을 차지하고 있던 그 액자를 마주하면, 저는 성실·최선이라는 단어가 용기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지혜라던가 신의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혹은 성공이나 행복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면 좋을 것 같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용기라는 덕목의 가치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에서야 저는 가훈의 마지막 단어로 용기를 적어놓은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살아가는데 용기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덕목인지를 말입니다.
    
코끝을 스치는 겨울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집니다. 청량한 겨울 냄새를 힘껏 들이마셔 봅니다. 자연 속을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내일도 깨어있는 마음으로 산책할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태그:#산책, #걷기, #공원, #새해,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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