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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보수동 골목
 부산 보수동 골목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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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하고는 싶은데, 어디를 가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집 근처에 공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산책로도 없어서 마땅히 걸을 때가 없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저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목적도 없이 하릴없이 걸어 다니면 동네 한량이 된 것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야',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낮에 동네를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얼마나 할 일 없는 사람으로 볼까', '혼자서 걷는 건 왠지 창피해.'

이런 생각들이 불쑥 찾아와 산책을 하는 저의 마음을 어지럽히곤 했어요. 생각해 보면 웹서핑을 하거나 넷플릭스를 보는 시간을 줄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이 바로 산책이었는데 말이에요. 
  
저처럼 목적 없이 산책하는 것이 어려운 분들은 산책에 '목적'을 만들어주는 것도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우유를 한 팩 산다, 같은. 대신 집 앞 편의점이 아닌 집에서 한 20분 정도 걸리는 편의점까지 다녀오는 것이죠. 여유를 갖고 천천히, 어슬렁어슬렁 동네를 걸으면서요. 
 
부산 보수동 골목
 부산 보수동 골목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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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에 핑계가 필요했던 건 비단 저만의 문제는 아니었나 봅니다. 생전에 산책하기를 좋아했던 버지니아 울프도 산책을 위한 목적을 만들었다고 하죠. 잡화점에 가서 연필을 한 자루 산다, 같은. 그 시대엔 여자 혼자 거리를 자유롭게 거닐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핑계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러한 시대적 상황까지 일상에 녹여 글로 남기는 타고난 작가였습니다. 
 
연필을 꼭 손에 넣고 싶은 상황이 있다. … 런던 거리의 절반을 거닐기 위해 그 목적이나 목표, 핑곗거리를 찾으려는 순간들이다. … 시간은 저녁 무렵, 계절은 겨울이어야 한다. 겨울에 샴페인 색으로 빛나는 공기와 거리의 친화력이 상쾌하기 때문이다. … 홀로 자기 방에 있다가 나와서 그들과 어울리면 아주 유쾌하다. 자기 방에서는 기묘한 자기 기질을 끊임없이 드러내고 과거 경험을 억지로 떠올리는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나 문을 닫고 밖에 나서면 그 모든 것이 사라진다. 우리 영혼이 자기 집으로 독특한 형체를 마련하려고 분비한 조개껍질 같은 덮개가 부서진다. 그러면 온통 찌그러지고 거친 껍질 속에 든 굴 같은 지각력이, 거대한 눈이 남는다. 겨울의 거리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 버지니아 울프 '런던 거리 헤매기'

버지니아 울프처럼 몇 번의 핑계를 대며 산책을 하고 나면, 딱히 목적이 없어도 콧바람을 쐬려고 집을 나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천천히 걸으며 동네를 돌아보는 즐거움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이제 산책을 위한 산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산책에서 호기심은 중요한 요소입니다. 동네 산책을 하자고 하면 '매번 다니던 동네, 뭐 볼 게 있다고'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으니까요. 정말로 내가 사는 동네에 대해 모두 알고 있을까요?

동네 산책은 가족과의 관계하고 조금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보통 부모님과 형제자매에 대해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의 친구나 회사 동료, 이웃 보다 가족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고기 요리를 주로 하던 엄마가 사실은 해산물 킬러였다던가, 집에선 과묵하던 형이 남들을 웃기는데 소질이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관심을 소홀히 하기가 쉬우니 말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도 비슷합니다. 평소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물도 막상 그리려고 하면, 그 생김새를 잘 묘사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관심이 생기면 관찰을 하게 되고, 관찰하면 더 잘 그리게 됩니다. 그림 솜씨의 8할은 관찰을 얼마나 잘하는지에 따라 달려있다고들 합니다.
 
산책하다 만난 눈사람
 산책하다 만난 눈사람
ⓒ 김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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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가로수들을 들여다봅니다. 매일 지나치던 가로수의 수관이 원뿔 모양인지 반달 모양인지 가지는 몸통에서 두 갈래로 뻗었는지 아니면 몸통에서 잔가지들이 퍼져나간 형태인지 살펴봅니다. 자세히 바라보다 보면 비슷하게 보였던 가로수의 생김새가 모두 조금씩은 다르다는 사실이 새삼 재미있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익숙한 동네라면 매번 다니던 길로만 다니기가 쉽습니다. 지름길이어서 혹은 그 길로만 다녀봤다는 이유 때문에요. 매일 나서던 길, 여행자의 마음으로 걸어보면 어떨까요? 탐험자가 된 것 마냥 방향을 틀어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걸어 보는 겁니다. 오늘은 갈림길의 왼쪽을 선택했다면, 다음날은 오른편으로 걸어가 보는 식으로 말입니다. 산책을 위한 길은 한번 선택하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길이 아닙니다. 원하면 언제나 갈 수 있고, 돌아 나올 수도 있는 길이죠.
  
산책은 되돌아가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환기'해 줍니다. 길이 서로 통한다는 것도 말입니다. 그러니 낯선 길이라고 해도 겁을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원하는 대로 마음껏 걸어가다 보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을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산책하다 만난 눈사람
 산책하다 만난 눈사람
ⓒ 김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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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숲의 오피스가도, 주택가의 골목길도 모두 산책을 위한 길이 될 수 있습니다. 내 머릿속 어딘가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골동품이 되어가고 있던 호기심을 탁탁 털어 꺼내기만 하면 됩니다. 주식이나 집값, 자기 계발에 쏟아붓고 있는 관심을 쪼개어, 옜다 관심, 하고 산책길에 조금만 나누어주면 됩니다.

그렇게 몇 번의 시도를 하고 나면, 나에게 맞는 산책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차도를 끼고 사방이 탁 트여 안전한 길일 수도 있고, 아기자기한 가게가 붙어 있어 볼거리가 많은 길이거나 가로수며 화단이 잘 조성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길일 수도, 아니면 이 모든 코스를 포함한 길일 수도 있지요. 선택은 온전히 산책자의 몫입니다. 
  
자, 그러면 집을 한번 나서볼까요? 가깝고도 신기한 세계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고 말입니다. 오늘도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내일 산책도 기대해 보아야겠습니다.

태그:#산책, #걷기, #동네, #골목길,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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