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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군 동강면 노동리 죽산마을 노산공원앞의 제각과 서민호 선생 부친 생가는 후손들의 몰락으로 폐가가 되다 시피했다.
 고흥군 동강면 노동리 죽산마을 노산공원앞의 제각과 서민호 선생 부친 생가는 후손들의 몰락으로 폐가가 되다 시피했다.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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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호는 8세 때에 보성군 벌교에 있는 유신학교에 입학했다. 교장선생님은 개화사상과 반일정신이 투철한 분이었다. 국치 직후지만 일인들의 행패가 심해지면서 아직 어린 나이였으나 영민했던 그는 집과 학교에서 듣고 배운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올랐다. 그래서 일본에 가서 일본을 알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식민지 시대 11세의 소년이 일본으로 건너가겠다면, 세상 어느 부모가 흔쾌히 동의하겠는가. 아버지는 화를 냈다가 설득하기를 거듭했으나 아들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부자간에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아들은 작심했다.

내 사랑방의 문을 굳게 잠그고 안으로 문고리를 걸었다. 일체 식음을 전폐하고 이불을 둘러쓰고 누워 버렸다.

그때 어머님께서는 나를 달래거나 아버님의 눈치를 살피시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죽은듯이 이불속에 파묻혀서 흐느껴 울며 몸부림쳤다. 어머님께서는 문을 열라고 소리 치시고 아버님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하시면서 귀한 아들 죽이겠다고 통곡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배도 고프고 어머님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죄를 진 것만 같아 당장 그만두고 용서를 빌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이미 행동에 옮긴 이상 물러서기가 죽어도 싫었다. 이런 성격이 나의 제 2전성기가 되어버린 듯 하다. 

단식투쟁 사흘에야 아버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문밖에서 들려왔다. 허락하신다는 것이었다. 나는 얼마나 기뻤던지 어머님의 치마폭을 잡고 엉엉 울어버렸다. 

나는 이때 남자가 한 번 마음을 먹었으면 끝까지 밀고 나가라는 아버님의 말씀이 생활신조가 되어 지금도 나를 채찍질하는 것이다. (주석 4)

서민호가 일본행을 결심했던 것은 둘째 형 서채호(徐采濠)가 일본에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일본으로 건너갔다. 꿈은 일본에 가서 훌륭한 군인이 되어 포악한 일제를 꺾어놓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적을 꺾을 수 있는 방법은 그 길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 무렵에 읽었던 코르시카의 작은 시골에서 자란 나폴레옹처럼 되는 것이다.

형님의 안내로 도쿄에 있는 유년학교에 지원, 필기시험은 합격했으나 면접에서 떨어졌다.

"한국인이라는 불리한 위치에서 더군다나 친일파의 자제도 아닐뿐더러 일개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나에게 일반 시험관의 차가운 시선과 비웃음이 섞여 있는 질문을 뒤로 물리치고 나와버렸다. 어린 나의 가슴에는 일본인에 대한 증오와 경각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주석 5)

기왕 왔으니 여기서 학교에 다니는 것이 좋겠다는 형님의 의견에 따라 금화심상소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 머리가 좋았던 그는 시험에 1등을 하였으나 수석 자리는 일본인이 차지했다. 학우들로부터 조센징이라 멸시를 당하는 등 어린 가슴에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켜켜히 쌓여갔다. 어느 날 2년 선배인 주먹대장 와다나베가 한국 학생들을 모독하자 격투하여 오른쪽 이(齒) 두 개가 빠지는 부상을 당하면서도 끝내 그를 쓰러뜨렸다. 

싸우는 것을 본 담임선생님(일인)이 와다나베에게 호통치고, 서민호의 상처를 치료해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이국에까지 와서 이렇게 싸워서야 되겠느냐"고 설득하여 큰 감화를 받았다. 일인 중에는 이런 분도 계시는구나, 물리력보다 이해와 설득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한국유학생들의 모임이 자주 열렸다. 송진우 등 선배들이 강연과 토론을 하고 뜻을 모았다. 학교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해나가던 중학교 1학년 때 갑자기 어머님이 위급하다는 전보를 받고 서둘러 귀국하였다. 어머니 병환이 나아지자 서울로 왔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갈 요량이었으나 아버지가 지금 당장 결혼을 하고 가라는 성화에 이를 피하고자 서울행을 택한 것이다.

중앙학교에 입학하여 여러 가지 운동을 하면서 공부를 하였으나 학교의 사정은 한ㆍ일 두 나라 학생들 간에 살벌한 암투가 계속되고, 패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서민호는 의협심이 강한 데다 일본에서 숱하게 겪고 당했던 민족차별을 서울에서까지 참고 견딜 수 없었다. 공부보다 싸우는 일이 많아졌다.

결국 낙제생이 되고 말았다. 1학년을 마치고 낙제생이 되었으므로 학교를 바꾸었다. 보성고등보통학교 2학년 편입시험에 합격하였다. 이 학교 역시 일본인 교사와 학생들의 행패가 심했고 두 나라 학생들의 패싸움이 멈추지 않았다. 이 시절 그는 '보성 깜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일인 학생들과의 싸움에 앞장서고 떡 벌어진 체구에 윤기가 날 정도로 까만 피부 때문에 붙혀진 별명이었다. 

학업성적도 우수하고 민족정신이 투철하여 학생들 사이에 인기 있는 리더가 되었다. 그 시기 끝내 이름마저 알지 못한 채 혼자서 사모했던 여학생이 있었다.  


주석
4> 앞과 같음.
5> 앞과 같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 서민호, #월파_서민호평전, #월파서민호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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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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