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 기록화.
 1894년(고종31)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 기록화.
ⓒ 한국문화재재단 월간 문화재 갈무리

관련사진보기

 
최시형이 동학을 정비하며 삼례와 보은집회를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을 시기를 전후하여 조선사회는 각지에서 민란이 속출하였다. 왕조의 누적된 실정, 지방관들의 탐학과 거듭되는 흉년, 특히 1876년 개항 이후 양곡이 일본으로 밀반출되면서 백성들은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민란 발생의 큰 요인이었다.

1890년부터 발생한 민란을 살펴보면, 1월 경기도 안성에서 군수 최낙주의 학정으로 민란발생, 8월 경상도 함창에서 농민들이 수령을 추방하고 관아를 점령, 1891년 3월 제주에서 민란발생, 8월 강원도 고성에서 민란, 1892년 3월 함경도 함흥에서 민란, 1893년 6월 인천 어민들 감리서 습격, 7월 황해도 재령에서 농민들, 감옥을 부수고 죄수를 탈옥시킴, 11월 황주ㆍ강계ㆍ회령ㆍ운산ㆍ양주 등에서 민란, 이 해에 전국 각지에서 65건의 민란이 발생하였다. 

조선왕조는 민생의 안정이 곧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유방본(民惟邦本)'의 민본이념에 따라 억울하고 분통하는 백성의 소리를 여과없이 듣고자 나름의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조선왕조의 소원제도(訴冤制度)는 『경국대전』에 실려있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호소하려는 자는 서울은 당상관에게 올리고 지방은 관찰사에서 올린다. 그렇게 한 뒤에도 원억(冤抑)이 있으면 사헌부에 고하고 그리하고서도 원억이 있으면 신문고를 두드린다." (주석 1)

억울한 일이 있으면 지방관→사헌부→국왕(신문고)을 거치는 3단계 소원 절차를 두었다. 뿐만 아니라 별도로 상언(上言)이란 제도를 두었다. 억울한 백성들이 임금의 행차 시에 꽹과리나 북을 쳐서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임금에게 직소하는 방법이다. 

또한 대궐 앞에서 엎드려 호소하는 복합상소의 제도가 있었다. 동학지도부가 택한 방법이다. 하지만 통치자가 영ㆍ정조 등 성군일 때는 기능이 활성화되고, 연산군 때나 조선후기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리면서 소원제도는 형해만 남았다. 

동학의 합법적인 복합상소에 국왕이 거짓 어칙을 내린 데 이어 보은집회에는 해산을 명하면서 호조참판 어윤중을 양호도어사(충청ㆍ전라도 도어사)로 임명하여 보은으로 내려보냈다. 고종이 어윤중에게 내린 칙유문 역시 소원제도의 본질에 역행하는 내용이다.

                                칙  유  문

임금으로서 너희들에게 이른다. 근자에 동학도들이 무리를 선동하여 거짓말로 현혹시키고 있다. 지난 번에도 방자하게 자리를 펴고 대궐 앞에서 부르짖어 이미 이런 무엄을 저질렀다. 

학 한다는 것이 무슨 글이며 모인 까닭이 무엇인가. 설사 충성하려거나 신원하려거든 각 지방에 장관도 있고 방백도 있는데 어찌하여 실정에 의거하여 소를 올려 거쳐서 임금에게 알리지 않고 바로 이처럼 동류를 불러 모아 무리를 지어 작당해서 마을에서 선동하며, 헛소문으로 세상 인심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만일 칙유가 있은 뒤에도 조심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때때로 충청도와 전라도에 모여 사리에 어긋나게 허세만 떨치니 이 어찌 화를 즐기는 사된 무리라 아니할 수 없으니 바로 이들은 몰지각한 백성일 것이다. 국법이 있으므로 제거하고 다스림에 어찌 어려우랴마는 모두가 나의 백성이라 먼저 가르치고 후에 형벌함이 어진 정치에서 우선해야 한다.

경으로 하여금 양호도도어사로 삼으니 곧바로 모인 곳에 이르거든 임금에 충성하고 백성을 아끼는 의리로 효유하여 각기 돌아가도록 하여 생업에 안락케 하라. 만일 뉘우치지 않으면 이는 항명이니 경은 즉시 장계를 올려 스스로 처리할 방도를 마련하라. 경에게 마패 하나를 주니 곧 생각대로 처리하라는 뜻이다. 또한 살피도록 하라. (주석 2)

보은에서 전국에서 모인 도인들을 설득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낸 최시형은 다시 보따리 하나만 들고 경상도 각지를 전전하였다. 민심을 듣고 도인들을 위로하는 행로였다.

먼저 경상도 칠곡 율림리 곽우의 집에 머물다가 인동의 배성모의 집을 거쳐 김산 편사언의 집에 이르니 벌써 무더운 7월이었다. 

그가 전과 같이 짚세기를 삼고, 노끈을 꼬며 묵고 있을 때 호남쪽에서 이상한 소식이 들려왔다. 보은회중 해산시에 반대하던 남접 두령들이 돌아가서는 여전히 각지에 깃발을 세우고 접소를 열어 기세를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관가에서 이들을 습격하여 잡으려 하면 곧 자기들끼리 재빨리 연락을 취하여 여러 곳이 호응하여 서로 구출하므로 관가에서도 어쩔 수 없다고 하였다. (주석 3)


주석
1> 『경국대전(經國大典)』 권5, 형전(刑典) 소면조. 
2> 『동학농민 전쟁사료 총서』, 2권 「취어(聚語)」. 
3> 최동희, 앞의 책, 31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월 최시형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해월, #최시형, #최시형평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한국 근현대사'를 고쳐 쓰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