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한 주택이 골목을 가득 메운 대전시 문화동을 걷다 보니 새하얀 외벽에 초록지붕을 얹은 2층짜리 건물이 보인다. 지붕 위에 펼쳐진 '자유롭게 꿈꾸는 공간 청소년 문화살롱 초록지붕'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절묘한지 슬며시 웃음이 지어진다. 청소년의 놀이터 역할을 하는 초록지붕은 사회적협동조합 '청소년이랑'이 운영하는 곳이다.
'나'라는 주체성을 확립하는 시기에 놓인 청소년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공간이자 아이들이 마음껏 하고 싶은 일을 펼치도록 친구가 되어 이야기를 들어주는 공간이다. 초록지붕을 드나드는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이곳에서 친구를 만나고, 꿈을 키우고, 타인에 대한 신뢰를 쌓아간다.
통제하지 않는 건강한 성인 롤모델이 되다"저희 사업의 핵심은 소통입니다. 초록지붕이라는 공간에서 아이들이 대화를 나누고, 주체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정하고, 그 활동을 펼쳐 나가도록 친구가 되어 주는 게 저희 일이에요. 이곳의 중요한 원칙이 프로그램을 구체화하거나 아이들을 통제하지 않는 것이죠." - 정진희사회적협동조합 '청소년이랑'에서 활동가로 함께하는 정진희, 정진영, 지혜영 씨는 입을 모아 초록지붕을 아이들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라 말한다. 세 사람은 사회가 사회문제로 꼽는 청소년문제의 시작이 청소년을 위한 건강한 성인 롤모델이 없고, 아이들에게 주체성을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청소년기를 우울하게 기억하는 모습을 보면서 청소년들과 함께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저도 주체적이지 않은 학생이었어요. 사회가 말하는 대로 열심히 했는데 되돌아서 청소년기를 떠올려 보니 신나거나 즐겁지 않았어요. 청소년기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많이 고민하는 시기잖아요. 그런데 그런 고민을 들어주고 대화해주는 어른이 없었어요. 그래서 공간을 마련해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요." - 지혜영수많은 대화가 오가고, 세 사람은 소통이 결여된 아이들이 자유롭게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했다. 3개월간 매주 한 번씩 모여 회의를 진행했고, 문화동에 제법 넉넉한 공간을 마련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초록지붕을 제집처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까.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아이들은 언제나 배고프다는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요즘 아이들이 학교와 학원 등 바쁜 일상에 치여 아침밥을 거르기 일쑤인 만큼 아침밥을 함께 먹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매주 목요일 진행하는 아침밥 프로젝트 '굿모닝, 초록지붕'이 시작됐다.
"청소년은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하잖아요. 마음의 건강은 우리가 책임지는데 몸은 어떻게 책임지지? 매일은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아이들의 아침을 책임져야겠다고 생각했죠. 아이들이 하나둘씩 아침을 먹으러 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아이들이 오면 여기는 밥만 먹는 곳이 아니라 자유롭게 놀고 생활하는 공간이라고 말해 줬죠. 차츰차츰 아이들이 방과 후에 놀러 오고, 친구를 데려오고, 지금은 만남의 장소 같은 곳이 됐어요." - 정진영이제 아이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노래를 부르고, 하고 싶은 일을 찾는다. 누구의 잔소리 없이도 숙제를 하고 소란한 틈에도 공부까지 한다.
믿음만큼 아이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지난 4월 24일, 1주년을 맞은 초록지붕에 많은 손님이 찾아왔다. 아이들은 용돈을 모아 마련한 케이크를 전달했고,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된 초록지붕 출신 청년도 인사차 초록지붕을 찾았다. 목이 좋지 않아 1년도 못 버틴다던 주민들도 축하의 말을 전하기 위해 이곳을 드나들었다.
이제 막 1년이 지났을 뿐인데 초록지붕에서는 수많은 일이 일어났다. 작년 8월에 처음으로 시작한 바자회 '소꿉장난'은 오는 5월 8일로 3회 차를 맞이한다. 뜬구름 잡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진짜로 실현해 보자고 시작한 뜬구름잡기프로젝트는 계곡여행, 1박2일 캠프, 공연, 청소년잡지 발행, 벽화그리기 등으로 펼쳐졌다. 이외에도 청소년자치활동으로 진행한 영화 상영과 피자파티, 보드게임대항전까지 모두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기획하고 진행한 일이었다. 아이들이 일상에서 나눈 대화는 프로젝트가 되었고, 아이들은 소꿉장난하듯 즐겁게 역할을 나누고 근사하게 제 몫을 해냈다.
"아이들은 어른의 생각보다 재능이 많아요. 어른이 믿어 주면 맡은 일을 멋지게 해내요. 실수가 생겨도 선생님(활동가)이 커버해 줄 테니 하고 싶은 거 다 해 보라는 게 저희의 생각이에요. 요즘은 아이들이 자기 입으로 '초록지붕에선 안 되는 게 없어'라고 말해요.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활동하게 하는 방법, 딱히 없어요. 기다려 주는 것. 이게 전부예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호응하며 관심을 가져 주면 스스로 주체성을 회복하더라고요." - 지혜영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을 뿐인데 아이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다가와 선생님의 일을 도와주고,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자기 생각과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던 아이도 친구와 어울려 그럴싸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사회인이 된 한 청년은 동생들에게 한 끼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며 '굿모닝, 초록지붕'을 위한 기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얼마 전 초록지붕을 졸업한 아이를 만났어요. 직장동료들에게 여기에서 했던 활동 이야기를 했대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자기를 신기해했다는 거예요. 정말 희귀한 경험을 많이 했다고요. 자신은 참 특별한 사람이라고 은근히 자랑하더라고요." - 정진영정진희, 정진영, 지혜영씨가 아이들과 보낸 시간은 아이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스스로 기획한 프로그램을 통해 쌓은 작은 성공 경험으로 아이들은 자존감을 회복했다. "너는 무엇을 잘하니?"라고 물으면 "전 잘하는 게 없어요"라고 대답하던 아이들이 하나씩 자신의 특기를 찾아 나갔다. 이렇게 다져진 내적 힘이 거친 세상에 뿌리를 내리는 원동력으로 변해 갔다.
"저희가 바라는 건 이곳이 지역의 공간이 되는 거예요. 지역주민이 우리의 가치에 동의하고 마을이 아이를 같이 책임지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주민들이 '굿모닝, 초록지붕'에 참여해 아이들에게 한 끼 식사를 대접하고, 건강한 롤모델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 거죠.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청소년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청소년을 통제하려는 어른들의 인식을 개선하고 싶어요." - 정진영오늘도 많은 청소년이 초록지붕을 드나들었다. 한 아이는 등굣길에 잠시 대 놓았던 자전거를 찾으러 왔고, 남학생 한 무리는 지나가는 길에 목이 말라 제집처럼 불쑥 초록지붕에 발을 들여놓았다.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선생님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 후, 이곳에 올 때처럼 불쑥 사라졌다. 그렇게 몇 번이고 초록지붕의 문이 열렸다.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히 움직이는 존재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