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발렌틴 역의 박정복 배우와 몰리나 역의 김주헌 배우가 열연 중이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발렌틴 역의 박정복 배우와 몰리나 역의 김주헌 배우가 열연 중이다. ⓒ 악어컴퍼니


머리 위에 곱게 틀어 올려진 진분홍색의 화려한 스카프. 마치 긴 머리카락을 어깨 한 쪽으로 쓸어 모은 것처럼 우아하게 내려와 있다. 스카프의 주인 몰리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발렌틴에게 표범여인에 대한 영화 이야기를 들려준다. 스카프를 풀어 이리저리 흩날리는 몰리나의 몸짓에 영화가 눈앞에서 그려지는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하면 표범으로 변해 상대를 죽이게 된다는 표범여인 이야기. 발렌틴은 분석하고 비판하더니 끝부분만 알려달라고 말한다. 반면 몰리나는 영화 한 장면 장면의 인테리어, 헤어스타일까지 음미하면서 영화 그 자체를 즐긴다.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는 발렌틴처럼 분석하려들지 말고 몰리나처럼 그 자체를 따라가며 보는 걸 추천한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상반된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지독한 감옥에서 만난 상처받은 두 영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빌라 데보트 감옥. 한 방에 갇혀있는 몰리나와 발렌틴. 본인이 여자라 믿는 남자 몰리나는 사회로부터 외면 받다 성문란죄 혐의로 들어왔고, 발렌틴은 불합리한 세상을 바꾸고자 정치 조직에서 투쟁하다 잡혀왔다. 과거 세상의 감옥들이 대부분 그랬듯 그 곳도 인간 본연의 욕구와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 끼니 때 오는 변변찮은 꿀꿀이죽, 정치범에게 행해진 끔찍한 고문들. 이 지독한 현실은 두 사람을 더 옥죈다. 자기절제와 투쟁으로 똘똘 뭉친 발레틴도 허기를 참지 못해 음식만 보면 짐승처럼 돌진하게 됐고, 몰리나는 아픈 생각들을 멈추기 위해 영화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시간이 지나며 점차 둘은 각자의 아픔을 간직한 채 조금씩 서로의 삶과 방식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심각한 복통에도 '정치범은 의무실에 가면 안 된다'며 불신 가득했던 발렌틴은 몰리나에게 속마음을 털어놨다. 몰리나는 감옥 소장으로부터 석방을 해 줄 테니 발렌틴의 정치 조직 정보를 캐내라는 협박까지 받았으나 오히려 기지를 발휘해 소장에게 음식을 얻어 아픈 발렌틴에게 신선한 음식을 준다.

서로의 진심을 깨닫다

슬픈 사랑의 주인공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극 초반 두 사람은 서로 으르렁거리기 바쁘다. 몰리나는 발렌틴을 치기 어린 혁명가로 여겼고, 발렌틴은 "네가 매일하는 좋고 예쁜 생각만 하는 그거 아주 위험한 거야"라며 영화 이야기를 할 때 마다 트집 잡았다. 이랬던 두 사람이 서로의 모습을 '진짜'라고 인정한 두 가지 중요한 일들이 있다.

 마주 보고 서있는 발렌틴 역의 송용진 배우와 몰리나 역의 이명행 배우.

마주 보고 서있는 발렌틴 역의 송용진 배우와 몰리나 역의 이명행 배우. ⓒ 악어컴퍼니


사건1. 조건 없는 친절 받아들이기

어느 날 자신의 책상을 치워주고 음식을 나눠주는 몰리나의 모습이 거슬렸던 발렌틴은 건네준 체리케이크를 사정없이 던져버린다. 문에 부딪쳐 이리저리 범벅 돼 흩어진 체리케이크. 잠시 뒤 몰리나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한테 잘해줬다면 그건 내가 너에게 잘해주고 싶어서야. 나는 우리 엄마한테 잘해. 왜냐면 우리 엄마는 좋은 사람이거든. 발렌틴 너도 좋은 사람이잖아. 항상 남을 위하잖아. 이기적이지 않잖아."

이 때부터 발렌틴은 조금 온순해졌고 친절을 베푸는 몰리나에 대한 거부감을 줄였다.

사건2. 신념을 존경하게 되다

"네가 세상을 바꾼다고?" 몰리나는 자신의 신념을 쏟아내는 발렌틴을 향해 크게 비웃었다. 그러자 발렌틴은 무섭게 돌진하며 소리쳤다. "난 앉아서 정치하는 놈들과 달라. 내가 여기 감옥에 있는 거 보면 모르겠어?" 이 말을 들은 몰리나의 표정은 순간 멍해진다. 줄곧 발렌틴의 이상이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던 몰리나가 조금씩 발렌틴을 존경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 시점이 이 때부터가 아닐까.

다채롭게 극을 이끌어가는 힘

몰리나가 발렌틴에 대한 감정을 풀어내는 방식은 극에게 다채롭게 다뤄졌다. 우선 '영화 이야기'를 통해 발렌틴의 주의를 끌었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현실을 잊기 위함이었지만 점점 표범여인과 본인을 동일시했고 극에서 중요한 사건이 터질 때 마다 영화 이야기가 사용됐다.

극의 장치 중 빼놓을 수 없는 다른 하나는 몰리나의 스카프다. 특히 몰리나 역을 맡은 김주헌 배우가 이 스카프를 잘 활용했다. 유독 김주헌 배우는 영화 이야기를 할 때 턴을 하는 등의 무용 같은 몸짓들을 하는데, 이 때마다 스카프를 어루만지거나 높이 펼쳐 올려 시선을 사로잡는다. 또한 스카프를 두른 위치로 극의 전체 분위기를 구분했는데, 크게 머리와 허리로 나눌 수 있다. 초반부에는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나오지만 몰리나가 발렌틴을 사랑하게 된 이후로는 롱스커트처럼 허리에 스카프가 둘러져 있다. 이를 통해 발렌틴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을 드러냈고 몰리나의 여성성을 강조했으며 극의 분위기 반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진정한 사랑의 의미

상반된 사람들이 서로의 진짜 모습을 이해하는 것이란 이런 걸까. 이들의 사랑의 결말은 아름답지만 슬프다. 마침내 석방이 결정된 몰리나는 발렌틴과 작별 인사하며 정치 조직에 정보 전달을 해달라는 발렌틴의 부탁까지 들어주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감방을 나서는 몰리나의 얼굴은 환하다. 몰리나의 표정이 밝은 이유는 '내 사랑 발렌틴'에게 큰 선물을 줄 수 있어서다. 몰리나답게 오로지 사랑을 위해 스스로 내린 결정이다. 발렌틴도 그의 방식대로 계속 투쟁하고 고문 받으며 신념을 이어나간다.

 몰리나 역의 김주헌 배우가 스카프를 허리에 두른 채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몰리나 역의 김주헌 배우가 스카프를 허리에 두른 채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악어컴퍼니


당신에게 힐링을 전해줄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

해피엔딩, 새드엔딩, 사랑, 인간애.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는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그들의 사랑은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사랑이기도 하고 진한 우정, 인간애이기도 하다. 멀리서 보면 새드엔딩이지만 그들의 표정을 보면 해피엔딩이다. 또한 무엇보다 서서히 서로에게 물들어 가는 몰리나와 발렌틴을 보면서 위로 받는 힐링극이다. 몰리나의 따뜻한 말들을 가슴 속에 담아가거나 끝없이 자신을 절제하는 발렌틴을 보면서 의지를 다질 수도 있다. 상처로 갈기갈기 찢긴 두 영혼이 서로를 어루만지며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 극장을 찾는 이들도 용기와 사랑을 받아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몰리나에게 발렌틴이 남긴 말을 적으며 글을 마친다.

"그럼 이제는 네가 나한테 약속해. 사람들이 너를 존중하게끔 한다고. 누구도 너를 이용 못하게 한다고. 약속해. 네 자신을 폄하하지 않겠다고."

연극거미여인의키스 거미여인의키스 김주헌 김호영 박정복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