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뮤지컬 <베르테르>와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뮤지컬 <베르테르>의 한 장면.

뮤지컬 <베르테르>의 한 장면. ⓒ CJENM

 
베르테르가 발하임의 법관 알테르트의 부인 롯데를 짝사랑 해오다 결국 총으로 자살했다. 몇 년 전 발하임에 방문한 베르테르는 인형극 '자석산의 전설'을 노래하던 롯데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이후 그녀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을을 떠났으나 다시 찾아와 롯데의 남편에게 총을 겨누는 등 난동을 부렸다.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의 선처로 풀려났지만 결국 여행을 떠나 롯데에게 빌린 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손목에는 롯데에게 선물 받은 노란 리본이 묶여 있었다.
 
베르테르 자살 사건을, 객관적 사실만을 토대로 '가상 기사'로 작성해보았다. 만약 이 사건을 이런 기사로 접했다면 그의 사랑을 비난할 수도 있었겠다. 허나 뮤지컬 <베르테르>를 보면서 그의 감정을 따라갔기에 그가 울 때 같이 울었다. 공연장을 나와서도 알 수 없는 먹먹함과 허탈감이 느껴졌다. 가슴에서 뭔가가 덜컥 내려간 기분. 그건 뭐였을까.
 
독일의 문학가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원작으로 2000년 초연한 창작 뮤지컬 <베르테르>. 놀랍게도 이 이야기엔 약혼자가 있는 여자를 사랑했던 괴테의 실연 경험이 녹아있다.

책은 1774년 발표되자마자 많은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단순히 책만 잘 팔린 게 아니었다. 베르테르의 아픈 사랑에 공감하며 옷차림을 따라하는 사람들이 생겼으며 급기야는 베르테르를 모방한 자살 사건들까지 일어났다. 이에 '베르테르 효과'는 '유명인의 자살 사건이 알려진 후 일반인들이 자살을 따라하는 현상'을 지칭하는 말이 됐다.
 
사람들이 베르테르와 자신을 심리적으로 동일시 한 이유는 '지독한 공감'이었으리라. 사랑은 지구상 모든 사람들이 공감한다. 특히나 '짝사랑'은 해본 사람만 알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겪어보는 것이니. 많은 사람들이 베르테르를 통해 '나의 사랑이 이만큼 아프다', '나의 사랑은 정말 간절하다'는 걸 느꼈을테다.

지독한 공감의 시작, 베르테르의 사랑   
 인형극을 하고 있는 롯데를 그리고 있는 베르테르. (베르테르 역 유연석)

인형극을 하고 있는 롯데를 그리고 있는 베르테르. (베르테르 역 유연석) ⓒ CJENM


아름다운 발하임 마을을 방문해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베르테르. 손에 나무 인형을 든 채 수레와 함께 나타난 롯데는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 마을 사람들은 롯데의 인형극이 익숙한 듯 몇몇은 그녀로부터 나무 인형을 받아 들고 인형극에 참여했다. 이윽고 롯데는 베르테르에게도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나무 인형을 줬다. 베르테르는 해맑고 상냥한 롯데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사랑에 빠진 건 그녀가 시를 읊을 때쯤이었을까. 처음부터였을까.
 
롯데는 작품 속에서 해맑고 싱그러운 사람으로 묘사된다. 특히 롯데가 베르테르에게 책을 선물하는 장면을 보면 왜 그토록 롯데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의 초상화를 선물해준 베르테르에게 답례를 해야 한다며 책을 건네는 롯데.

"포장을 해서 드려야 하는데…" 걱정하다가 "어?" 이내 자신의 머리 장식인 노란 리본을 풀면서 꺄르르 웃는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포장지를 이 리본이 매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정신없이 귀여움과 해맑은 기운을 뿜어낸다. 책에 리본을 묶으면서 베르테르의 눈을 슬쩍슬쩍 쳐다보는 롯데를 보면 왜 베르테르가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랑은 숨겨도 숨겨지지 않는다. 베르테르가 말하지 않아도 마을 사람들은 모두 베르테르가 롯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꺾은 꽃들을 소중히 들고 다니며 헤벌쭉 웃는데 누가 모를까. 롯데 앞에서는 부끄러워 말도 이상하게 튀어나오고 걷는 것도 삐그덕거린다. 이렇게 뮤지컬 <베르테르>는 사랑의 설렘과 순수함, 바보같음을 귀여우면서 현실적으로 담았다.
  
 롯데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베르테르가 바닥에 주저앉아 슬퍼하고 있다. (베르테르 역 유연석)

롯데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베르테르가 바닥에 주저앉아 슬퍼하고 있다. (베르테르 역 유연석) ⓒ CJENM

   
"돌뿌리에 걸려 넘어졌어요"
 
흐느껴 우는 관객들이 많을 정도로 짝사랑의 아픔도 잘 표현했다. 먼저 돌뿌리 씬. "돌뿌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너무 아프다"며 술집에서 베르테르가 우는 장면이다. 대극장 뮤지컬에서 나올 법한 고음을 지르는 노래가 나오지도 않고 세트가 화려하지도 않다. 오로지 베르테르의 연기로만 채워진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용기내 고백하러 갔는데 약혼자가 있었다니.

"제가 넘어졌는데 돌뿌리에 걸렸어요." 베르테르는 술집 주인 오르카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꺼냈다. 관객도 오르카도 그의 상황을 알기에 더 슬픈 대사다. 불과 얼마 전 이 술집에서 롯데와 함께 꺾은 꽃다발을 자랑하며 행복해했는데. 그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진다. 그러다 감정이 북받친 베르테르가 "막!! 아팠어요" 소리치며 운다. 사랑 앞에 좌절한 모습을 돌뿌리, 상처 등으로 은유한 표현들. '어쩜 저런 표현을 하지' 감탄을 마치기도 전에 그의 슬픔이 깊숙이 파고들어 관객들의 마음도 왈칵 무너진다.
 
특히 베르테르 역을 맡은 유연석 배우의 섬세한 연기가 빛이 났다. 돌뿌리 씬에서 그는 바닥에 주저 않아 "아팠다"며 테이블에 머리를 찧는다. 롯데와의 미래를 행복하게 캔버스에 그렸는데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서 검은 물감을 부어버린 것처럼. 북받치는 슬픔을 온몸으로 뿜어낸다.
  
 베르테르 역 유연석

베르테르 역 유연석 ⓒ CJENM


유연석 배우는 극 내내 표정으로 내면을 보여주며 관객들을 설득했다. 짝사랑을 인간화 시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롯데에게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러 간 날 약혼자를 맞이하려 들뜬 롯데의 모습을 본 그의 표정도 잊을 수 없다. 얼굴에 절망이라고 써 놓은 듯했다. 이어지는 노래의 가사마저 "뭐였을까 가슴에 뭐가 떨어졌는데" 였기에 그의 사랑이 금기라는 걸 머리로 이해하면서도 베르테르의 사랑에 지독하게 공감 돼 버렸다.
 
글을 사랑하는 베르테르였기에 사랑을 표현하는 말들도 구체적이고 서정적이었다. 롯데를 잊으려 발하임을 떠나 있던 때에 "롯데가 너무 보고싶었지만 곁에 갈 수 없어 손깍지만 잡았다"는 말도. 롯데에게 빠져 그녀 곁을 맴돌고 자꾸만 집에 찾아가면서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그대에게 홀리어 이 곳까지 와버렸네"는 말도. 롯데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내 마음은 납처럼 가라 앉는다"는 말도 그랬다. 언어로는 사람의 마음을 다 형언할 수 없다. 마음을 그대로 말과 글로 옮길 수 없으니 '사랑' '그리움' '슬픔' 따위의 단어들로 표현할 뿐. <베르테르>를 보며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우리 모두 공감하는 가슴 속의 감정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 아닐까.

왜 베르테르는 자살을 해야만 했나
 
베르테르의 사랑은 단 둘이 있는 것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별을 할 때도 단숨에 '끝'하고 돌아서는 사람, 한번에 돌아서기는 하나 잊는데 오래 걸리는 사람, 본인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상대를 잡아보는 사람이 있다. 베르테르의 사랑과 이별은 모든 걸 바쳐야만 했다. 죽음.
 
오 황홀경이여
오 타올라 사라질 세상의 생명들아
내 말에 귀 기울여라
 
가령 말하자면
내가 죽을지라도, 죽어 사라질지라도
오로지 그대는 나와 단둘이만 함께 있어다오
 
자석산의 전설 Reprise 中
 
그의 마지막이 죽음인 이유는 베르테르가 말하는 '황홀경' 시에서 암시된다. 또한 '카인즈' 캐릭터를 통해 베르테르의 사랑을 빗대어 표현한다. 베르테르는 카인즈의 죽음을 통해 사랑을 완성하는 법을 깨달았다.
   
 카인즈가 마음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고 있다.(카인즈 역 송유택)

카인즈가 마음 사람들에게 환호를 받고 있다.(카인즈 역 송유택) ⓒ CJENM

 
카인즈는 발하임의 정원사다. 미망인이 된 저택의 여주인을 사랑했지만 "미천한 네가 무슨 사랑을하냐"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 탓에 실의에 빠졌다. 그런 카인즈의 사랑을 응원해준 유일한 사람이 바로 베르테르였다. 베르테르는 "상심하지 말아요 간절한 열정 사랑은 자신도 모르게 슬며시 온몸 적셔버린다"며 사랑을 하라고 그를 마음 깊이 응원해줬다. 그리고 마침내 카인즈는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베르테르가 발하임으로 돌아왔을 때 카인즈는 큰 곤경에 처해있었다. 카인즈가 살인을 저지른 것. 죽은 남편에게 학대를 당했던 여주인을 또다시 친오빠가 때렸고 그 광경을 본 카인즈가 참지 못하고 일을 치렀다. 카인즈는 "나의 죄는 참회하지만 그녀는 아프면 안된다"며 자신의 "행동에 후회는 없다" 말하며 잡혀갔다. 그 모습을 보며 우는 베르테르. 아마도 이때 베르테르의 '인생 결말'이 정해졌지 않을까. 모든 걸 바치고 불태우는 사랑의 절정은 죽음이라고.
 
롯데가 준 리본을 손목에 감고 그녀에게 빌린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겨누는 <베르테르>의 마지막 장면. 현대 관객들은 "자살 미화다" "롯데 입장에서 보면 섬뜩하다"라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이 말에 백퍼센트 반박하지는 않겠다. 다만, 모든 걸 바쳐야만 했던 베르테르의 사랑이 마음 아팠을 따름이다. 극중에도 베르테르가 이런 말을 한다. "당신에게 모욕을 줄 마음은 없어요 다만 내 고통을 어찌할 수 없어서." 베르테르는 자신의 사랑이 너무 아파 어찌할 바를 몰랐던 어린 사람이었다.
  
 롯데와 알베르트가 다정하게 서 있다. (롯데 역 이지혜, 알베르트 역 이상현)

롯데와 알베르트가 다정하게 서 있다. (롯데 역 이지혜, 알베르트 역 이상현) ⓒ CJENM

 
"다만 지나치지 않게요"
 
롯데와 알베르트의 사랑도 아프기는 마찬가지다. 롯데는 아름다운 발하임의 일상을 행복하게 여겼다. 들판에 핀 꽃들에 이름을 붙이는 일과 약혼자 알베르트가 편지와 함께 보내준 각지의 꽃씨를 온실에 심는 일이 롯데의 취미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만난 베르테르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행복을 맛보게 해줬다. 롯데의 시를 온전하게 이해하고 감탄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단숨에 친구가 되었고 알베르트와 집사들에게도 베르테르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했다. 다시 찾아온 베르테르를 만났을 때는 뛸 듯이 기뻐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롯데는 그런 베르테르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그의 지나친 사랑에 아팠다. 하늘을 향해 "왜 제 마음이 흔들리죠"라고 소리치며 복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나 자신의 마음 속에 금단의 꽃이 피었을까 두려워하면서도 베르테르를 영영 떠나보낼 생각을 하면 붙잡게 되는 마음이 롯데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자석산처럼 롯데와 베르테르는 끌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까. 영혼이 닮은 둘. 그래서 롯데의 사랑도 아리다.
 
"변한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알베르트는 어찌할 바 모르며 사랑과 상황의 소용돌이에 빠진 베르테르, 롯데와는 다르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 사람. 인생을 살아가며 자신이 정한 원리원칙을 중요시한다. 자신의 아내를 향한 불타오르는 사랑을 숨기지 않는 베르테르 앞에서도 유지하는 신사적인 태도. 그렇다고 알베르트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까지는 아니다. 살인을 저지른 카인즈를 충분히 무력으로 끌고 갈 수 있었을텐데도 그가 마을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할 시간을 충분히 줬다. 여행을 다녀올 때는 매번 집사들의 선물까지 한아름 사왔다. 그런 사람이 오직 롯데만을 삶의 불빛으로 여겼다. 자석산처럼 끌리는 롯데와 베르테르를 보면서 얼마나 인내했고 마음이 아팠을까.
  
마을 사람들은 카인즈의 됨됨이와 성실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기에 그의 살인 사건 소식에 달려갔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통 받자 폭발한 그의 분노를 공감했고 그가 안타까워 경찰들에게 무릎 꿇고 살려 달라 빌었다. 베르테르도 "이 세상에 살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죄는 무거우나, 지울 수 없는 검은 얼룩을 덮어쓰고 말았으나 그의 불쌍한 영혼을 봐달라"고 애원했다. 이때 베르테르와 카인즈가 겹쳐 보였다. 베르테르는 금단의 사랑을 하며 검을 얼룩을 썼지만 그의 숭고한 사랑만은 이해해달라고.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들렸다. 
  
 베르테르가 롯데에게 고백을 하기 위해 찾아왔다. (롯데 역 김예원, 베르테르 역 규현)

베르테르가 롯데에게 고백을 하기 위해 찾아왔다. (롯데 역 김예원, 베르테르 역 규현) ⓒ CJENM

20주년을 맞이한 뮤지컬 <베르테르>

뮤지컬 <베르테르>는 20주년을 맞아 쟁쟁한 배우들로 돌아왔다. 베르테르역에는 초연부터 함께한 엄기준을 비롯해 카이, 유연석, 규현, 나현우가 무대에 서고 롯데 역은 이지혜, 김예원이 연기했다. 알베르트 역은 이상현, 박은석 카인즈 역은 송유택, 임준혁 펍의 주인 오르카는 김현숙, 최나래가 맡았다.

1774년 출판된 프랑스 대문호 괴테의 서간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작가 고선웅이 한국 감성에 맞게 구현했다.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 등 현악기 10, 피아노 1로 구성된 11인의 실내악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30여 곡의 음악들은 절제된 감정선으로 국내 대표적 클래식 뮤지컬로 인정 받았다. 베르테르가 상심하는 장면에서 컵을 바닥에 '쿵' 떨어뜨리면서 무대가 전환되는 장면을 무대 연출로 나타내는 등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이기도 하다. 공연은 11월 1일까지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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