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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총선에서 국민들은 열광했다. 시민들이 행사한 표로 인해, 여론조사가 뒤집히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애초 여론조사에서는 새누리당이 180석 가까이 석권 한다는 결과가 주류를 차지했다. 한 술을 더 떠서, 새누리당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에 대한 전망도 쉬울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을 정도다.

하지만 20대들의 열정적인 투표참여, 58%에 달하는 투표율로 결과는 뒤집혔다. 80석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예측을 뛰어넘고, 더불어민주당이 123석을 차지하여 원내 1당을 차지했다. 반대로 새누리당은 122석으로 굴러 떨어지고, 탈당파들을 영입해도 130석이 채 되지 않는다. 16년 만에 국회가 여소야대로 굴러가고 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에 상당히 기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모두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 중에는 새누리당의 지지자였으나, 더불어민주당을 찍은 이들도 상당하다. 그렇다면 이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민중의 힘으로 정국을 크게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민중들의 투표가 역사를 바꾼 것이다. 이 때문에 민중들은 역사를 바꾼 '시민의 힘'에 크게 열광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프랑스 혁명사에도 찾아볼 수가 있다.

프랑스 민중은 바스티유 점령 때 열광했다. 민중이 조직한 민병대가, 왕의 군대를 물리치고 정치범 수용소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왕의 힘을, 민중들이 꺾었다. 루이 16세는 이를 계기로 국회로 찾아가 시민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줬다. 왕과 민중의 싸움에서 민중들이 최초로 승리한 뜻깊은 사건이다.

이 때문에 이 '바스티유 점령'은 프랑스 혁명의 시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세계사 교과서나, 대부분의 세계사 책에서는 이 '바스티유 점령'을 '매우 신성하다'라는 식으로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

그에 대한 근거로는 당시의 민중들이 바스티유 요새에 수감된, 왕에게 대항한 '전제주의의 희생자'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행동했다고도 서술했다. 민중들이 바스티유를 점령한 이후의 모습들은 대부분 '자유'를 위한 행동으로 표현되는 편이다. 또한 시위대의 '바스티유 점령' 이후로 국왕 루이 16세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서술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후 베르사유에 있던 루이 16세 일가가 파리로 떠날 때의 모습은 어떨까.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서적에서는 '민심을 배반한 국왕을 분노한 시민들이 사로잡아서 끌고 가는 모습'으로 표현하기 일쑤다. 이 때문에 그렇기에 결국에는 '바스티유 점령'으로 분노한 민심이 루이 16세의 목을 쳐내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는 현실이다. 실제로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 <프랑스 혁명사 제2권 1789- 평등을 잉태한 자유의 원년>(주명철 저, 여문책 펴냄)에서는 그것들이 사실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통념적으로 알려진 사실과 달리, 실제 역사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바스티유 점령', 실제로 많은 정치범들을 구출했을까?

프랑스 혁명사 2권 표지
 프랑스 혁명사 2권 표지
ⓒ 여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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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유 점령을 떠올리면 어떤 모습이 떠오를까? 우선 시위대가 바스티유의 감옥 문을 열어서 '왕에게 대항한 정치범'들을 무수히 많이 구출하는 것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부분을 인식했는지, 분명하게 당시 상황을 표현했다.

'1789년 7월 14일 역사적인 날, 정복자들은 감옥에서 수많은 정치범을 구출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겨우 일곱 명을 구출했다. 1757년 초 루이 15세를 칼로 찌른 다미엥 사건에 연루된 타베르니에는 1759년 8월 4일부터 30년 동안 갇혔다가 구출되었다. 비트 드 말빌 백작은 정신장애인이었기 때문에 샤랑통 병원에 보내야 했음에도 가족이 바스티유로 보낸 사람이다. 솔라주 백작은 죽어 마땅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뱅센 감옥에 갇혔다가, 이 감옥을 더는 쓰지 않게 되어 바스티유로 이감시킨 죄수였다. 나머지 네 명은 장 라 코레주, 장 브샤드, 장 앙투안 퓌자드, 베르나르 라로슈로 1787년 초에 사기죄로 갇혔다.' - P.130~131 중

우리들이 알고 있던 '바스티유 점령'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습은 대체로 다음과 같을 것이다. '압제자'인 루이 16세의 부하들을 시위대가 처형하고 감옥 문을 열어서 '핍박받던' 수많은 정치범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 이것이 우리들이 알고 있을 '바스티유 점령'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바스티유에 수감되어 있던 이들은 '압제자'인 왕에게 대항한 '정치범'과는 거리가 있는 이들이다. 숫자 또한 고작해야 일곱 명에 불과하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바스티유에서 풀려난 이들이 '부당하게 갇힌 사람들'이 아님을 분명히 명시했다.

'바스티유 정복자들은 그 감옥에는 부당하게 갇힌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겠지만, 그날 구출한 일곱 명 중 어느 한 명도 "전제주의의 희생자"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그들은 해방되었다. 사기죄를 지은 사람 네 명은 그 길로 자취를 감추었다. 나중에 그들을 다시 잡아들이려고 했지만 이듬해에도 잡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국은 더는 그들을 추적하지 않고 사건을 덮어야 했다.' - P.131 중

풀려난 일곱 명 중에서 네 명은 왕에게 대항한 '정치범'이 아닌 사기를 친 '범죄자'였다. 별도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아마 흥분한 군중들은 '범죄자'들을 '정치범'으로 생각해서 무작정 풀어주지 않았나 싶다. 이후에 '범죄자'들을 다시 체포하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정치범'들을 구출했다는 '바스티유 점령'의 통념적으로 알려진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사실이다. 그렇다면 '바스티유 점령' 직후의 모습은 실제로 어떨까. 과연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자유를 위해 싸운 거룩한 투쟁'이 맞을까.

'1789년 7월 15일 수요일 밤 0시 30분……, 우리는 남성의 시신 7구가 샤틀레 마당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첫 번째 시신은 머리가 없고, 정장차림에 조끼와 고급 내의를 입고 검은색 비단양말을 신었으며 신발은 신지 않았다. 두 번째 시신은 머리가 없고 붉은색 상의에 난징무명으로 짓고 단추를 단 퀼로트를 입고, 푸른색 바탕에 검은색 작은 점이 골고루 찍힌 비단양말을 신었다. 세 번째 시신도 머리가 없고 셔츠와 퀼로트를 입고 흰색 양말을 신었다. (중략)

네 번째 시신도 머리가 없고 피범벅이 된 셔츠, 퀼로트, 검은 양말. 다섯 번째 시신은 셔츠, 푸른 퀼로트, 흰색 각반, 갈색 머리에 나이는 40세쯤. 손목에 칼자국과 목에 심한 타박상. 여섯 번째 시신은 셔츠에 흰 각반, 목에 심한 타박상. 일곱 번째 시신은 셔츠, 퀼로트, 검은 비단양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뭉개짐.' - P.129~130 중

당시의 시체공시소의 서기가 작성한 등록부이다. 저자는 이를 통해 직접적으로 "학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특히 포로로 사로잡힌 바스티유 사령관 르네 후작에 대한 시위대의 처우를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시위대는 르네 후작을 끌고 가면서 모욕을 주었다. 온갖 욕설, 발길질, 주먹질, 몽둥이찜질, 여러 가지 방식으로 모욕을 한 뒤, 차라리 죽여 달라는 후작을 요리사가 칼로 찔러 죽였다.

흔히 접하는 매체에서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거룩하고 신성한' 모습은 없고, 이는 오히려 '무질서하고 폭력적이고 허점이 많은' 모습이다. 또한, '바스티유 점령' 당시에 정복자들에 의해서 수많은 문서가 훼손당하고 반출되는 점을 지적했다. 분명히 이 사건이 '혁명'의 시작점이 되는 사건이기는 하나, 마냥 거룩하고 신성하고 깨끗한 투쟁이 아님은 분명하다.

바스티유 점령 이후에 민중의 분노를 산 루이 16세?

대부분의 책에서는 바스티유 점령 이후에 루이 16세가 민심을 잃었다고 언급한다. 하지만 저자는 실제 당시상황을 담아내어 놀라운 진실을 알리고 있다. 바스티유 점령 이후에도 루이 16세는 최소한 민중에게 분노를 사지 않았다. 시민들의 바스티유 점령, 파리와 베르사유에 주둔한 왕의 군대에 대한 문제로 루이 16세는 베르사유에 위치한 국회로 친위대도 없이 찾아갔다.

이후 파리와 베르사유에서 군대를 물리겠다는 약속을 한 루이 16세. 그가 베르사유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많은 민중들이 모여서 기뻐했다. 놀랍게도 민중들은 "왕 만세!"를 사방에서 외쳐댔다고 한다. 심지어 민중들은 궁까지 들어왔다. 그리고 2층 왕의 침실 발코니에 나타난 루이 16세 일가의 모습을 본 민중들은 외쳤다. "왕 만세!"

이를 본다면 루이 16세는 아직까지 민중들에게 적어도 미움을 사는 왕은 아니다. 저자는 이 장면을 "진정한 화합의 순간이었다"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이후 베르사유 궁에 있던 국왕일가를 시위대가 파리로 데려갈 때의 모습은 어땠을까?

사람들이 외쳤다. "왕은 파리로! 왕 만세! 국민 만세! 왕은 파리로!"
왕이 다시 발코니로 나와서 말했다.
"여러분은 과인에게 파리로 가자고 합니다. 나는 가겠소. 그리고 왕비와 아이들도 함께 갈 것이오." 그 말을 들은 시위대는 기뻐하면서 외쳤다.
"왕비 만세!" - P.320 중

심지어 이 당시에도 민중들은 '왕'인 루이 16세 뿐만이 아니라,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도 만세를 외쳐대고 있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이때까지도 민심이 국왕부부는 완전히 등을 돌리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이다. 하지만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와 같은 루이 16세의 모습을 언급하며, '제빵사' 노릇을 하러 파리로 끌려갔다고 표현했다.

이 외에도 민심이 루이 16세에게 등을 돌리지 않았으나, 왕의 힘이 점점 무력화되는 과정을 매우 상세하고 말끔하게 설명했다. 특히, 1년 전만 해도 '절대 군주'로 군림하던 루이 16세가 우유부단한 판단으로 인해 '제빵사'로 전락하는 과정이 매우 흥미롭다. 게다가 이후에 정말로 루이 16세가 민중에게 분노를 사는 것인지도 매우 궁금하다.

앞서서 '바스티유 점령'이 실제로는 상당히 폭력적이고, 무질서하다고 언급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바스티유 점령'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저자는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 여과 없이 옮겼을 뿐이다. 실제로 책에서는 '바스티유 점령' 이후, 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하는 과정을 100 페이지에 걸쳐서 매우 자세하게 설명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권선언' 등이 탄생한 것도, 바로 이 '바스티유 점령' 덕분이다.

게다가 이 '바스티유 점령'에서의 좋지 못한 면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열광했다. 그것은 왜일까. 바로 국가의 주인이 왕이 아니라, 국민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더불어민주당이 원내 1당을 차지하였기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주인이 소수의 권력자가 아니라, 국민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바스티유 점령'의 미화가 없어졌기에 적나라한 상황이 표현되기에 거부감을 가질 수가 있다. 하지만 이후 제헌의회에서의 헌법제정 과정을 본다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비록 무질서하고, 잔혹한 사건이었으나 굉장히 의미가 있는 사건이 아닐 수가 없다.

덧붙이는 글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 1789 - 평등을 잉태한 자유의 원년 (2권, 328쪽), 주명철 지음, 여문책 출판, 1만 8000원



1789 - 평등을 잉태한 자유의 원년

주명철 지음, 여문책(2015)


태그:#프랑스 혁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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