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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소유 소련제 탱크가 시가지를 누비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소유 소련제 탱크가 시가지를 누비고 있다.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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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6일,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임종을 지켜본 친척들은 '편안하게 돌아가셨다'라는 말을 하셨죠. 그러나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저는 너무나도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충열이 너를 계속 찾으셨단다."

하관식을 하면서, 제사를 지내면서, 집에 돌아오면서, 계속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겁니다. 외할아버지와의 약속. 그것은 외할아버지의 '알려지고 싶은 이야기'를 기사로 기고하는 것입니다. 그 약속, 뒤늦게나마 지금이라도 지킬까 합니다.

인민군 횡포에 '반공유격대', 국군 만나 '노무자'로

외갓집은 참 특이한 이력이 있습니다. 외증조할아버지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일하기 위해 월경을 하던 중, 일본군에게 붙잡혀서 되돌아온 전적이 있는 분이죠. 외할아버지는 1934년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하남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제강점기였음에도, 몰래 한글을 공부할 정도로 투철한 애국심을 지닌 집안에서 자라셨습니다.

'도둑놈처럼 찾아온 해방' 이후로 전쟁의 기운이 고조되었습니다. 이때 집집마다 한 사람씩 동원이 됐는데, 당시 16살이었던 외할아버지도 동원되어 38선에서 호를 팠다고 합니다. 외할아버지는 "당시에 1개 중대가 경계를 담당했는데, 담당구역이 너무 넓어서 초소당 1, 2명에 불과하다"고 회상하셨죠.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인민군이 물 밀 듯이 들어왔다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할아버지가 살던 인제군 기린면 하남리는 워낙에 깊은 산에 있던지라, 인민군들이 그냥 지나쳐갔다고 합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로 상황은 급변합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했고, 인민군은 패퇴하죠. 이때 인민군들은 상당히 악랄한 행동을 벌입니다. 집집마다 들이닥쳐서 식량을 약탈하고, 마을주민들을 길잡이로 내세운 뒤, 입막음으로 죽입니다. 결국에 기린면 청년들은 무기를 들었습니다. 인민군들이 버리고 간 따꿍총(모신나강) 등을 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인제군의 여러 마을에서 청년들이 일어났고, 3개 소대병력을 갖췄다고 합니다. 당시 이 반공유격대는 홍인철이라는 사람이 이끌었는데, 인민군 장교에게서 권총을 빼앗아서 차고 다닐 정도로 대담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반공유격대는 약탈을 하는 인민군을 처단하거나 국군에게 넘겼고, 국군을 도와서 패잔병들을 소탕했지요. 그러나 오래가지 못합니다.

중공군이 개입하고, 국군과 유엔군은 속수무책으로 다시 밀립니다. 외할아버지 역시 도망쳐야 했습니다. 잡히면 틀림없이 죽으니까요. 그렇게 도망치던 외할아버지, 이번에는 국군을 만납니다. 국군은 처음에 할아버지를 징병하려고 했답니다. 이에 외할아버지는 미성년자임을 근거로 거부했죠. '부모님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요. 그러자 국군은 외할아버지를 노무자로 징발합니다. 노무자는 군대를 따라다니면서 식량과 탄환을 나르거나, 이외의 잡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실 노무자도 그리 안전하지는 않습니다. 총알이 비처럼 쏟아지는 고지에 식량을 짊어지고 중대본부에 나르는 일들이 잦았다고 하죠. 하여튼,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휴전 이후 자원입대, 그런데 5년이 넘도록 전역을 안 시켜줬다

휴전 이후인 1954년. 20살의 외할아버지는 자원입대합니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이 있죠. 본래 1954년 6월 25일에 입대를 하려고 했으나, 6.25전쟁 날짜이기에 거부됐다는 겁니다. 여하튼 그래서 외할아버지는 이틀 후인 1954년 6월 27일 입대합니다. 당시 동기 중에서 한글과 한문을 모두 읽을 줄 아는 인재들은 육군본부로 갔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방으로 향했습니다. 외할아버지 마찬가지로 '펀치볼 전투'로 유명한 강원도 양구로 발령받죠. 휴전을 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전방은 위험천만한 곳이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이렇게 회고하며 치를 떨었죠.

"당시에 북으로 넘어가는 사람도 많았고(북파공작원), 남으로 내려오는 공비들도 많았단다. 공비들이 내려와서 국군 소대장 목을 따가는 일도 많았고. 아주 위험했지."

구타도 장난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루 차이로 입대한 이등병 사이에서도 구타가 심각했을 정도죠. 그런 상황에서 외할아버지는 '애국심을 바탕으로'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고 자부하셨습니다. 군대가 다 그렇듯, 속된 말로 '짬이 차니까' 그제야 좀 사람같이 살았다고 하면서요.

그러던 중에 사고가 발생합니다. 제무시 트럭(M35트럭)을 타다가, 차량이 전복되어 큰 부상을 입었죠. 몸의 절반이 시커멓게 멍이 들 정도로 심각했는데, 군에서는 결국 의병전역은 시켜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다시 군에 계신 겁니다. 아무리 군대에서 사람 목숨이 개 값이라고 한다지만, 이건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렇게 5년. 1959년이 됩니다. 외할아버지의 계급은 이등중사. 동기들은 벌써 전역을 했죠. 하도 전역을 시켜주지 않아서 외할아버지는 당시 1군사령부로 직접 찾아가기도 했답니다. 그러자 돌아온 말은 놀라웠습니다. '전역날짜가 누락'됐다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군대는 예나 지금이나, 참 엉망이라는 점이요.

그렇게 1959년 7월 15일. 외할아버지는 이등중사 계급으로 전역하셨습니다. 파란만장한 5년간의 군복무가 그렇게 끝난 겁니다.

만신창이가 된 몸, 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전역 이후로 외할아버지는 군 복무를 지낸 강원도 양구에 눌러앉았지요. 당시에는 별다른 문제는 없었습니다. 뒤늦게야 참전용사 제도가 생겼습니다. 반공유격대나 노무자도 증명만 가능하면 인정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타지에 눌러앉았기에 이를 증명해줄 사람은 없습니다. 외할아버지는 그 점을 매우 후회하셨습니다. 국가에게 인정받지 못했으니까요.

나이가 드시면서 후유증도 찾아왔습니다. 트럭전복사고로 다친 몸의 절반이 문제가 생긴 거죠. 이것도 아무런 조치를 받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하시는 와중에 외할아버지는 골병이 심해져서 통증을 잊고자 소주를 들이켰습니다. 저는 외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다짐했습니다.

"반드시 이 내용을 기사로 써서, 제가 사람들에게 알릴게요!"

그러자 외할아버지는 제 손을 붙잡고 연신 고맙다고 말씀하셨죠.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큰 욕심이 없습니다. 그저 국가로부터 자신의 고생을 인정받고 싶었을 따름이죠. 이런 사례는 참으로 많습니다. 외할아버지 외에도 수많은 분들이 참전용사로 인정받지 못하고, 군 복무 중에 상해를 입었음에도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하죠.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한민국에는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수많은 외할아버지들'이 계시다고요. 지금이라도 국가에서는 '잊힌 참전용사'를 찾도록 노력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애국자는 잊혀서도, 불행해서도 안 됩니다. 국가는 그에 대한 합당한 예우를 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다시는 외할아버지와 같은 '잊힌 불행한 애국자'가 나와서는 안 됩니다!


태그:#고충열, #외할아버지, #애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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