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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장이 직권상정한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한 야당의원들의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 8일째인 1일 오후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필리버스터를 진행하고 있다. 의장석에는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이석현 국회부의장이 앉아 있다.
 국회의장이 직권상정한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한 야당의원들의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 8일째인 1일 오후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필리버스터를 진행하고 있다. 의장석에는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이석현 국회부의장이 앉아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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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이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 진행 방해) 중단을 사실상 결정했다. 이종걸 원내대표는 1일 오전 성명에서 "오늘 중으로 '테러방지법'에 대한 무제한 토론을 마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어 오후 6시 30분 의원총회를 열고 "의견을 수렴하겠다"라고 했지만, 결정이 바뀔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춘석 원내수석부대표는 "의원들의 양해를 구하는 의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필리버스터를 중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역풍'이다. 더민주는 필리버스터가 진행된 지난 8일 동안 지지층 결집과 여론의 관심을 모으는 것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지속될 경우 선거법 처리 지연 등에 따른 책임론이 야권에 덮어씌어질 수 있다는 '공포'가 더민주를 휘감고 있다. 또 오는 10일까지 필리버스터를 진행해도 결과적으로 테러방지법을 막을 수는 없다는 '현실론'까지 더해진다.

그러나 이 같은 이유로 필리버스터를 중단한 결정은 어렵게 얻은 지지층 결집과 호남에서의 지지를 말아먹는 또 다른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어떠한 협상도 허용하지 않는 새누리당의 몰정치는 가려지고 '무능력한 야당'의 이미지만 남을 가능성이 크다. 필리버스터가 결코 법안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아니더라도 그동안 쌓은 점수를 유지할 '출구전략'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더민주가 필리버스터를 중단하려는 이유

국회의장에 의해 직권상정된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한 야당의원들의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 8일째인 1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 방청석이 방청온 시민들로 가득하다.
 국회의장에 의해 직권상정된 테러방지법을 막기 위한 야당의원들의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 8일째인 1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 방청석이 방청온 시민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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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필리버스터를 중단하려는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번 결정은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와 박영선 의원 등 현재 비대위의 헤게모니를 쥔 인사들이 주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대표는 전날 심야 비상대책 회의에서 "여기서 더 하면 선거가 이념 논쟁으로 간다, 경제 실정을 이야기할 수 없다"라며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노리는 것"이라고 이 원내대표를 설득했다고 한다.

더민주는 테러방지법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지적해 왔다. 이에 새누리당은 '야당이 국민의 안전을 볼모 삼고 있다'는 프레임으로 맞섰다. 김 대표의 지적은 시간이 더 지나면 새누리당의 공세가 강화되고, 결국 '안보 대 비안보'의 이념 논쟁이 총선을 주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이념 논쟁으로 끌고가면 당에 좋을 게 없다, 경제 문제로 프레임을 전환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총선 프레임 설정보다 현실적인 이유는 선거법 처리 지연에 따른 책임 문제다. 새누리당은 선거법 협상에서 지역구 의원을 늘리고 비례대표를 줄이는 안을 고집하면서 권역별비례대표제, 선거연령인하, 석패율제 도입 등 야당의 요구에는 귀를 닫았다. 새누리당의 몽니로 선거구 획정이 늦어졌지만 필리버스터로 선거법 처리가 늦어지면 그 책임을 야당이 '독박' 쓰게 된다는 우려가 커진 것이다.

이 같은 문제를 가장 강하게 제기한 건 박영선 의원이다. 이날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박 의원은 전날 비상대책회의에서 "내일(1일) 조간신문에 '선거법 발목을 잡은 야당'이라고 새까맣게 쓰지 않겠느냐. 오늘(29일) 자정에라도 필리버스터를 중단하자"라고 말한 것으로 한 회의 참석자가 전했다. 그는 "2012년 총선 때를 생각해봐라, 고집하다가 결국 선거에서 지지 않았느냐"고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판단 배경에는 하나의 '트라우마'가 작용한다. 당 관계자는 박 의원의 발언에 대해 "김용민 후보의 '막말' 논란에 미온적으로 대처했다가 선거 역풍을 맞았던 걸 말한 것"이라고 <중앙일보>를 통해 설명했다. 당시 김용민 후보의 거취를 빠르게 결정하지 못하면서 논란이 전국적으로 번졌고, 그에 따라 중도 지지층이 이탈했다는 것이다.

결국 더민주가 필리버스터를 포기하는 이유는 '총선 프레임의 유불리', '선거법 처리 지연에 따른 책임론' 이 두 가지로 요약된다. 여기에 새누리당이 버티는 이상 법안 수정이 어렵다는 점, 필리버스터가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실제 여론지형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점이 추가로 반영 됐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마이너스 요소가 필리버스터를 통한 플러스 요소를 앞질렀다는 판단이다.

역풍? 여론조사 어디에도 징후 없다

참여연대, 진보네트워크 등 '테러방지법 제정 반대 46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1일 오전 국회앞에 모여,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테러방지법 제정을 막기위해 8일째 진행되고 있는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에 반대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시민역풍은 두렵지 않나?" 참여연대, 진보네트워크 등 '테러방지법 제정 반대 46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1일 오전 국회앞에 모여, 더불어민주당 지도부가 테러방지법 제정을 막기위해 8일째 진행되고 있는 무제한토론(필리버스터)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에 반대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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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풍을 우려한 판단에는 또 다른 역풍이 뒤따른다. 당장 필리버스터 중단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사회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고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시민들의 불만이 표출되고 있다.(관련기사 : "역풍이 두려워? 진짜 정치 포기 말라" 46개 시민·사회단체 긴급 공동 성명) "역풍이 두려워 국민을 위한 최후의 수단을 포기하는 것은 정략적인 것이다, 정부·여당의 독주를 견제해야 할 야당의 책임을 저버리는 일"이라는 지적이다.

이러한 반발이 단지 지지층의 일시적 감정이라고 치부하기도 어렵다. 필리버스터가 일주일 이상 진행되면서 야권 지지자들은 '오랜만에 야당다운 야당을 본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들이 필리버스터의 한계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테러방지법을 처리해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끝까지 싸워 달라'는 게 이들의 요구였다. 현재 더민주의 '출구전략'은 이런 요구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필리버스터가 여론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중단해야 한다는 지적도 온당하지 못하다. 물론 필리버스터가 진행되는 일주일 동안 발표된 주요 여론조사에서 정당지지율에 큰 변화가 없다는 점에서 영향이 미비해 보인다. 오히려 새누리당의 지지율이 소폭 상승하며 보수층 결집의 '역풍'의 우려가 제기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조급함'이 만든 허상이다.

아직은 그 어느 지표에서도 '역풍'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변화가 감지되지 않는다. 지난 2월 26일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의 조사(새누리당 42%, 더민주 19%, 국민의당 8%)에서 더민주는 전주 대비 1%포인트 하락했다. (2월 23~25일, 전국 성인 남녀 1004명 유·무선 전화 임의 걸기 방식, 신뢰도 95% 수준에 표본오차 ±3.1%포인트)

같은달 29일 리얼미터의 조사(새누리당 43.5%, 더민주 26.7%, 국민의당 12.1%)에서는 전주와 동일한 지지율을 기록했다. (2월 22~26일, 전국 성인 2529명 대상, 전화면접(CATI) 및 자동응답(ARS) 방식(무선전화60%, 유선전화40% 병행) 임의걸기(RDD) 방식,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서 ±1.9%포인트) 이 조사에서 새누리당과 국민의당이 1~2%포인트 가량 상승했다.

결국 더민주는 0~1%포인트 가량의 지지율 변화가 있었다. 이것은 지난 몇 달 동안 이어진 경향이다. 문재인 전 대표가 인재 영입을 발표하며 주목 받을 때도 1~2%포인트의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어디에도 여론에서 '역풍'을 감지할 만한 요인이 발견할 수 없다. 반면, 필리버스터를 계속 해야 한다는 의견은 소셜미디어에 빗발치고 있으며 본회의장을 참관하기 위해 국회를 찾는 시민들은 여전히 줄을 잇고 있다.

2012년 총선 당시와 달리 지금은 총선까지 40여 일이 남았다. 10일까지 필리버스터가 진행되고 이후에 본격적인 선거전이 펼쳐진다고 해도 한 달이라는 시간이 남는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부동층이 아직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역풍'을 계산해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다.

자신의 싸움을 믿지 못하는 자의 후퇴일 뿐

여론조사에서 한 가지 유의미한 숫자를 찾자면 국민의당의 지지율 추락이다. 지난 2월 26일 한국갤럽 조사에서 한때 20%를 웃돌던 국민의당이 지지율이 8%라는 한자리로 떨어졌다. 더욱 주목해 봐야 할 것은 호남의 여론이다. 이 조사에서 국민의당은 더민주(32%)에 17%포인트 뒤쳐진 15%를 기록했다. (2월 23~25일, 전국 성인 남녀 1004명 유·무선 전화 임의 걸기 방식, 95% 신뢰수준에서 오차범위 ±10%포인트, 매주 유효표본 약 100명 기준) 더민주와 지지율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상황이다.

일부 의원들이 필리버스터에 나섰지만 국민의당은 필리버스터 정국에서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대표는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가 시작된 직후 "강행하는 여당, 막는 야당 똑같다"라며 양비론을 펼쳐 야권 지지층에게 지탄을 받기도 했다. 필리버스터는 적어도 야권 경쟁에서 더민주와 국민의당을 가늠하는 잣대가 됐던 것이다. 이제 그것이 사라진다.

필리버스터를 중단할 것이냐, 계속 할 것이냐를 선택하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인 것이 분명하다. 계속하면 총선 일정에 차질이 발생할 수 있고, 중단하면 테러방지법이 통과되는 '외통수'의 상황이다. 또 기울어진 언론지형에서 사태에 책임이 있는 새누리당과 국회의장은 사라지고 자신들만 화살을 맞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십분 이해한다. 아무리해도 테러방지법을 막을 수 없다는 허무함도 잘 안다.

그러나 지금의 판단이 총선 승리를 이끌어 준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박영선 의원은 "이념 전쟁으로 과거 선거에서 한 번도 승리한 적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스스로 자신들의 싸움을 '이념 전쟁'이라고 인정하는 꼴이다. 그러나 아니다. 160시간이 넘게 야당 의원들이 말한 것은 헌법 가치의 싸움이다. 필리버스터 중단은 결국 자신의 싸움을 믿지 못하는 야당의 후퇴로 기록될 것이다.


태그:#필리버스터, #테러방지법,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김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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