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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5월 도쿄 영친왕 저택 공연 뒤 조선악극단 일행과 영친왕 부부
 1943년 5월 도쿄 영친왕 저택 공연 뒤 조선악극단 일행과 영친왕 부부
ⓒ 강윤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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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9월, 한국 대중예술 역사상 특기할 만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오케(Okeh)레코드와 조선악극단을 운영하며 이미 식민지 조선의 대중음악을 음반과 무대 양면으로 석권하고 있었던 이철이, 향후 안정적으로 대중예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사설 교육기관을 설립했던 것이다. 1940, 1950년대를 빛낸 많은 대중음악가와 무용가를 배출한 오케음악무용연구소의 출범이었다.

3년 동안 음악, 무용, 교양 수업을 무상으로 진행하고, 성적이 우수한 경우 조선악극단 무대에도 설 수 있다는 조건에 많은 10대 소녀들이 제1기생 모집에 응시했다. 용모와 재능, 발전 가능성을 고려해 선발된 최종 인원은 40여 명. 하지만 음악 이론과 성악의 기초, 동서고금을 망라한 다양한 무용 종목을 모두 섭렵하는 교육 과정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다.

3년 뒤 졸업한 이는 처음 40여 명 중 단 9명에 불과했다. 그 9명 가운데에서도 성악에 뛰어난 김백희와 함께 쌍벽을 이루었던 생도가 바로 지난 5월 12일에 타계한 무용가 강윤복 선생(1924~2015)이다.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었는데도 춤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강윤복 선생은 연구소 생도가 되기를 택했다. 집안의 반대가 거셌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남달랐던 재능에 열정까지 충만했던 강윤복 선생은 곧 가족의 염려를 불식할 만큼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1940년대 후반 K.P.K악단 공연 당시 김해송, 강윤복, 주리
 1940년대 후반 K.P.K악단 공연 당시 김해송, 강윤복, 주리
ⓒ 강윤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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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4월, 연구소 입학 반년 남짓 만에 조선악극단 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걸었고, 국내는 물론 만주, 일본, 중국을 누비는 조선악극단의 중추로 성장해갔다. 1943년 5월 도쿄 영친왕 저택에서는 김정구의 노래 <낙화삼천>을 들으며 눈물 흘리는 영친왕의 모습을 보았고, 1944년 6월 상하이에서는 조선악극단 단장 이철의 갑작스런 타계 소식을 들었다.

광복 이후 조선악극단이 쇠락을 거듭하자, 강윤복 선생의 무대는 1945년 12월에 첫 공연을 한 K.P.K악단으로 옮겨갔다. 조선악극단의 핵심 멤버였다가 중도 탈퇴한 작곡가 김해송이 조직한 K.P.K악단은 강윤복 선생을 비롯한 조선악극단 인력을 대거 흡수하여 사실상 그 계승자 위치에 서게 되었다.

1940년대 전반이 조선악극단의 시대였다면, 1940년대 후반은 K.P.K악단의 시대가 된 것이다. 악극 시장의 대폭 성장으로 K.P.K악단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공연단체 무대에 서기도 했던 강윤복 선생은, 안무가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6·25전쟁 발발로 김해송이 희생되어 K.P.K악단이 사실상 와해되고, 뒤이어 악극 자체가 급속히 몰락해갔지만, 당대 대중무용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이던 강윤복 선생의 활동 무대는 오히려 한층 더 넓어졌다.

악극을 대신한 각종 쇼와 195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미8군 쇼는 물론, 역시 미군이 대거 주둔하고 있던 일본 오키나와에서도 강윤복 선생의 무용이 필요했다. 또 베트남전쟁에 한국군 파병이 결정된 뒤에는 동남아시아 쇼 무대가 또한 선생을 필요로 했다.

1950년대 후반 극장 쇼에 출연한 강윤복
 1950년대 후반 극장 쇼에 출연한 강윤복
ⓒ 강윤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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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 이후 주로 무대·방송 안무가로 활동하며 후진 양성에 힘쓰다 1970년대 후반에 현업에서 물러나기까지, 근 40년에 걸친 강윤복 선생의 활동은 그대로 한국 대중무용 역사의 중추가 된다. 지금은 대중무용이라는 분야가 과거에 비해 많이 축소돼 있기는 하나, 강윤복 선생의 삶과 예술은 대중무용의 범위를 뛰어넘어 한국 근현대 공연예술 전체 역사의 공백을 메우는 데에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때문에 국립예술자료원에서는 지난 2003년부터 진행해온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사업'에 강윤복 선생의 참여를 수차 요청했고, 거듭된 고사 끝에 지난 달 15일 최종 승낙을 받을 수 있었다.

행정 관련 서류 작업을 마치고 6월 초부터 정식 구술채록을 시작하기로 모든 준비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으나, 전혀 예상치 못하게 강윤복 선생께서 돌아가셨다. 아직도 많은 부분이 알려져 있지 않은 조선악극단, K.P.K악단 등에 관해 소중한 증언을 해줄 수 있던 가장 중요한, 사실상 최후의 증인이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개인의 죽음이 한 시대 기억의 상실로 이어지는 경우를 이따금 보기는 해왔지만, 이처럼 눈앞에서 안타까움을 겪기는 또 드문 일이다. 그러나 강윤복 선생께서 남긴 말씀과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므로, 아쉬운 대로 그것을 수습해 지난날 화려하던 무대의 빛과 그림자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 편집ㅣ최규화 기자



태그:#강윤복, #조선악극단, #K.P.K악단, #악극, #대중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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