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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 : 유격대 국가에서 정규군 국가로> 책표지.
 <북조선 : 유격대 국가에서 정규군 국가로> 책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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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가 보고 싶다. 이렇게 말하면 뭐 잘못 먹었냐는 반응부터 종북이냐는 추궁, "아들아, 나는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는 어머니의 절규 등등 좋은 소리 못 들을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한 번쯤 가 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나랑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데다가 고작 몇 시간정도 차를 타고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 북한이다. 톨게이트를 지나듯 여권 보여주고 도장을 쾅 찍고 우리말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 한 뒤 '남의 나라'로 넘어가 보는 거, 괜찮지 않나.

북한이 흥미를 끄는 것은 이 나라의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 본 사람도 별로 없고. 가 보고 싶다는 것도 생각 뿐이지, 사실 뭐 특별한 일 있지 않고서야 북한 땅 밟아볼 수 있겠나. (별 일 없이 갔다 오면 체포된다.) 내가 아는 과장님은 전 직장에서 회사 일 때문에 평양에 한 번 갔었다고 말하는데, 일단 술 자리에서 "내가북한에 갔을 때 말이야"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게 된다. 뭘 알아야 끼어들지.

가 볼 수 없고 볼 만한 무슨 영상도 많지 않으니, 북한은 대체 어떻게 안 망하고 유지되는 걸까 하는 무식한 질문에서부터 공산당 내 계파를 분석하고 어쩌고 하는 어려운 내용에 이르기까지 글을 통해 공부할 수 밖에 없다. <북조선 : 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 국가로>는 '글로 북한 엿보기'의 좋은 출발이 될 것 같다. 정치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북조선>은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와다 하루키 교수가 쓴 책이다. 그의 제자인 고 서동만 교수, 남기정 교수는 번역을 맡았다. 널리 인정받는 학자들의 합작품이 되겠다. 게다가 책이 술술 읽힌다. 서장 격인 1장 "북조선을 어떻게 해독할 것인가"는  무슨 수필 같다.

구 소련을 연구하던 저자가 북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나 도쿄대에서 북조선 세미나를 열었지만, 참여한 학생이 딱 한 명 밖에 없었다는 에피소드, 북한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미국과 한국, 북한의 학자들과 소통하게 된 경위 따위를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문제의 제기" 두둥하면서 도무지 페이지 넘기기가 어려운 학술서들과는 영 느낌이 다르다. 북한 사회의 기원과 정체에 관한 친절한 교양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 내는 책이다.

이 책은 왜 쓰여 졌나

이 책은 북한 체제를 이해하는 '틀'을 제시하기 위해서 쓰여 졌다. 이 나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질문이 책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 분석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북한 건국의 아버지, 김일성을 위시한 핵심 권력집단이다.

이들의 기원과 변천 과정을 추적하여 규정한 뒤 그것을 한 국가의 정체성으로 확장하는 것 - 이게 와다 교수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의 상당 부분이 권력 상층부에서 벌어진 쟁투의 양상과 결과, 즉 김일성이 어떻게 북한의 일인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지,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무얼 했는지 설명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우리는 해방 직후 등장한 김일성이 단숨에 북한을 장악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와다에 따르면 196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에게 익숙한 김일성 유일체제라는 게 성립됐다. 그 사이에 북한정부수립(48년)-한국전쟁(53년)-박헌영숙청(55년)-종파사건(56년)-김일성 개인숭배 시작(67년) 등 굵직굵직한 정치적 사건들이 있었고, 김일성은 이 권력 투쟁의 모든 과정에서 승리하기 위해 어지간히 똥줄을 태웠다.

이중 김일성을 가장 코너로 몰아세웠던 것은 (한국전쟁을 제외하면) 아마도 1956년 8월의 종파사건이 아니었을까. 전쟁이 끝나고 박헌영을 필두로 하는 남로당을 숙청한 뒤, 김일성은 재건에 필요한 원조를 구하기 위해 평양을 떠났다. 그런데 이 사이에 주로 중국 공산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연안계' 사람들이 '소련계'와 힘을 합쳐 김일성 축출을 목적으로 음모를 꾸민 것. 그런데 사극에서 흔히 보듯이 이 음모는 평양에 남아있던 김일성파 인사들에 의해 발각이 되고 만다. 당 중앙위원회 결의를 통해 김일성을 끌어내리려고 했던 계획은 수포로돌아가고, 관련자들은 중국으로 피신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여기서 끝났으면 뭐 그냥 별일 아니었을지도 모르는데, 중국과 소련이 개입하면서 일이 커졌다. 중국에선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소련에선 부수상 미코얀이 북한에 급파됐다. 반 김일성파가 연안계과 소련계였으니 이유는 대강 짐작이 되고. 김일성은 부아가 치밀었겠지만 큰형이랑 둘째형이 와서 윽박지르는데 뭐 뾰족한 수가 있었을까. 출당조치, 당적취소 등 반 김일성파에게 내려졌던 중징계들은 모두 취소됐고, 김일성의 권위는 심각하게 훼손됐다.

중국과 소련은 이 정도에서 만족했던 것 같다. 김일성을 다른 지도자로 교체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게 김일성의 첫 번째 운이었고, 1957년부터 중소갈등이 본격화되었던 것이 그의 두 번째 운이었다. 중국과 소련은 서로 치고받고 싸우느라 북한에 간섭할 여유를 잃었다. 외려 북한의 지지가 아쉬워졌다. 두 형님 나라는 북한에 내정 간섭했던 것을 몇 번이나 사과했고, 김일성은 1957년부터 종파사건의주인공들을 아주 그냥 처절하게 숙청하기 시작했단다.

만주와 유격대 국가

김일성이 북한을 장악하고 운영해가는 과정을 관찰한 뒤 와다 교수가 내리고 있는 결론은, 그러니까 북한 체제를 이해하기 위한 틀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바로 '유격대국가'라는 개념이다. 이 유격대국가야말로 이 책이 내걸고 있는 브랜드이고, 또 저자의 오랜 북한연구가 맺은 중요한 결실 중 하나다. '유격대국가론'은 북한 공식 문헌에 등장한 "항일 유격대처럼" 운운하는 지침을 인용한 것이란다. 일제시대 김일성이 이끌었던 항일유격대의 정당성이 북한을 떠받치고 있고, 북한정권은 유격대의 생존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하고자 한다는 뜻 되겠다.

유격대국가론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북한 정치체제의 기원을 20세기 전반부의 만주라는 시공간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시기 만주는 독립운동의 공간이었다. 김일성은 만주에서 항일무장조직을 이끌던 젊은 리더였다. 만주에서 태어났고 만주에서 자라서 만주에서 정치적 활동을 시작한 것.

이 시기 김일성의 경험은 20세기 후반부 한반도 북녘에 사는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북한을 '유격대국가화'함으로써 김일성은 정권유지의 근간을 마련했다. 독립운동영웅 - 김일성에게 이것만큼 중요한 정당성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만주에서 동고동락했던 '만주파'가 권력투쟁 때 든든한 지원세력이 되어 주기도 했다. 이 '만주의 기억'은 북한 정권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변주된다. 김정일로 권력이 이양되었을 때도 그랬을 테고 김정은이 집권하게 된 지금도 마찬가지 아닐까. 

지난대선 전에 한참 화제가 됐던 <기시노부스케와 박정희>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서 강상중과 현무암은 '만주'가 해방 이후 한국과 전후 일본에 남긴 유산을 살폈다. 그런데 <북조선>을 읽고 나면 한국과 일본 뿐 아니라 북한도 만주의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책 <남과 북은 만든 라이벌>에서 저자인 박명림은 만주를 두고 "남과 북 공동의 자양"이라는 별칭을 붙였는데, 그 말마따나 1930년대의 만주가 없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두 한국의 역사는 영판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북한의 미래

와다 하루키의 <북조선>은 '유격대 국가'라는 개념을 앞세워 우리를 북한 체제와 사회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의 길로 안내한다. 이 책이 출간된 지 좀 되다보니 김정은 시대까지 커버하지는 못하고 이미 지나 버린 김정일 시대도 마지막에 살짝 건드리는 정도지만, 앞서 말씀드렸던 대로 좋은 출발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북한 정치에 대한 저자의 '전망'을 짚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와다 교수는 2014년 10월에 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북한이 유격대국가(김일성 시대)와 정규군국가(김정일시대)를 넘어서 정규국가, 당 국가체제(김정은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유격대국가 시절의 정당성이 희석되고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렸던 탈냉전과 대기근의 1990년대를 군대를 강조하는 선군정치로 버텼던 북한이, 이제 군대보다 당이 우선되는 집단지도체제의 정상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북한이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진지한 의도를 갖고 있다는 분석도 곁들였다.

남북관계하면 답답한 소식만 들려 온 것도 벌써 몇 년이다. 북한이 점차 대화할만한 상대가 되어갈 거라는 와다 교수의 지적이 적확한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한층 더 품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이 책에 대한 내용은 독서공방 기자들의 팟캐스트 <역사책 읽는 집>에서 더욱 상세히 들을 수 있습니다. 주소 : http://www.podbbang.com/ch/5579

* <북조선 - 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 와다 하루키 (지은이) | 서동만 | 남기정 (옮긴이) | 돌베개 | 2002-02-28



태그:#독서공방, #지상현, #정대훈, #서평, #역사책 읽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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