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은 그의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학생들을 데리고 답사여행을 하던 중 기차안에서 차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설명하며 "어떤 성씨의 집성촌이 있는 곳!"이라고 했더니 모두들 졸고 있는 와중에 유독 한 학생만이 눈을 반짝이며 듣고 있더란다. 물어보니 과연 설명했던 집성촌의 성씨와 같더란다.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운 그것... 바로 답사여행역사란 그런 것이다. 나와 상관없는 것일 때에는 한없이 따분하고 지겨울 수 있지만, 일단 손톱만큼이라도 인연의 끈이 닿아 버리면 결코 벗어 날 수 없는 중독과도 같은 것, 그것이 역사다. 조금 더 발전하면 나와 직접 관련이 없는 것이더라도 유쾌하게 그 시대와 대화도 나눌 수 있다.
사마천은 이를 위해 죽음보다도 더 불명예스러운 거세형도 마다하지 않았고 역사학자 E.H 카 역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까지 했다. 한 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운, 공부를 겸한 색다르고 묘한 취미, 그것이 바로 답사여행이고 그 정점에 폐사지 기행이 있으며 그 점에서 강원도 원주는 빼놓을 수 없는 곳 중 하나이다.
원주는 그 옛날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로 역사와 문화, 교통의 요충지로서 오랜동안 그 중심에 서 있었다. 그래서 원주 사람들은 국토의 배꼽을 자처하며 높은 자긍심을 갖고 있는데 요사이 '거리상' 국토의 정중앙을 자처하는 양구군과의 다툼은 흡사 경주와 안동의 자존심 싸움까지 닮았다.
신라의 천 년 수도로 역사의 본향임을 자처하는 경주에 대해 스스로를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는 뜻의 '추로지향'이라 부르며 '경주'보다 안동에 국보가 4점 더 많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 또한 안동인들 자부심의 표현이다. 당사자들에게야 피하고 싶고 달갑지 않겠지만 보는 이들에게는 은근한 즐거움까지 주는 문화를 놓고 벌이는 수준 높은 '싸움 구경'인 셈이다.
이런 내력이 있는 원주 여행의 매력 중 놓칠 수 없는 중요한 포인트 한 가지가 있다. 바로 폐사지 여행이다. 폐사지 즉, 절터야 다른 곳에도 얼마든지 많이 있지만 원주만이 갖고 있는 특별함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현존하는 부도 중 가장 화려하고 가장 정교하며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지광국사 현묘탑의 원래 자리, 바로 법천사지가 이곳 원주에 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 탑이고 법력 높은 고승의 사리를 모신 곳이 부도이다. 그래서 제 아무리 위대한 스님이라 할지라도 결코 탑에는 모시지 않는다. 또 탑은 대부분 사찰의 중앙에, 부도는 절의 구석진 한 켠에 모시게 되는데 탑과 부도는 그 구조와 생김새부터가 완연히 다르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잘 아는 조선 태조의 스승 무학대사를 모신 곳 역시 탑이라 부르지 않고 부도라 부른다. 한 나라를 창업한 개국시조의 스승인 왕사 조차도 그럴 지경이니 다른 스님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탑은 탑이고 부도는 부도인 것이다.
그러나 부도이면서도 탑이라 불리는 몇 안되는 귀한 부도,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 제일로 꼽히는 부도 중의 부도가 바로 이곳 원주 법천사에 있었던 지광국사 현묘탑이다. 부도 보다는 탑에 가까운 화려함과 아름다움 때문이다. 지금은 경복궁 고궁 박물관의 한 켠에 외롭게 서 있지만 현묘탑이 말끔하게 단장한 모습으로 그 빼어난 맵시를 뽐내던 법천사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 만으로도 원주여행은 이미 즐겁지 않을 수 없다.
두번째는 온전한 형태의 탑비를 볼 수 있다는 것.
지금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탑비는 대부분 비몸돌(비신)은 없고 용머리(또는 거북머리) 받침돌(귀부)과 머릿돌(이수)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세월과 전란까지 겪으면서 비교적 약한 부위인 탑비의 몸돌이 부셔졌거나 일부는 비문의 내용에 불만을 품었던 사람들에 의해 파괴된 경우까지 있었다.
그런데 이곳 원주지역의 폐사지에는 온전히 남아 있는 탑비, 그것도 가장 화려한 형태의 그것을 한데 묶어서 한꺼번에 볼 수 있는 특별한 혜택이 있다. 그것도 공짜로 말이다. 법천사지에 남아 있는 지광국사 현묘탑비(국보59호)와 인근에 있는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보물78호)이다. 두 탑 모두 천 년이 넘는 세월을 끝내 이기고 온전한 그 모습으로 당당히 서 있다.
법천사는 절터가 있는 곳의 지명이 법천리일 만큼 규모가 큰 거찰이었다고 한다. 인근의 거돈사 역시 그렇다. 그런데 지금은 인적 조차 드문 곳이 되어 버렸다. 왜 이런 곳에 절을 지었을까?
그 옛날 이곳은 흥원창이 있던 곳. 창(倉)이란 고려와 조선시대 때 국가가 징수한 곡물을 모아 보관하고 이를 다시 경창(京倉)으로 운송하기 위해 해안이나 강변에 설치했던 국립창고이다.
흥원창은 원주·평창·영월·정선·횡성·강릉·삼척·울진·평해지역의 세곡을 보관하고 한강수로를 이용하여 서울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던 곳으로 전국 13곳에 설치되었던 국가 물류체계의 핵심 기지였다. 굳이 오늘날과 비교하자면 지금의 KTX역과 같은 곳.
재화와 사람이 모이고 유통이 활발해지니 경제가 발달했을 것이다. 그 옛날 법천사가 있던 이곳은 모든 것이 풍족하고 흥성거렸던 비옥한 곳이었다. 그러니 겁도 없이 한반도의 중심을 자처하지 않았을까?하여 국교였던 고려 불교의 거대 사찰이 들어설 적지였을 것이다.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고승을 모시기에도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폐사지 여행은 이렇듯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모든 건물을 짓고 부수며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도시 하나를 뚝딱 만들고 건설해야 하는 쉽지 않은 고행일 수도 있다. 기껏해야 주춧돌 몇 개 뿐인 건물터와 운이 좋으면 탑이 하나 있을 뿐. 그러나 도시의 북적거림과는 다른, 조용히 과거를 회상하며 미소 지을 수 있는 유쾌한 침묵의 대화가 있다. 특히, 찾는 이 없어 고즈넉한 폐허가 주는 이 쓸쓸함을 견디고 즐길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그대! 폐사지 여행에 나서라! 원주라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