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는 경북 경주와 마찬가지로 땅만 파면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다. 그만큼 공주는 도시 자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공산성, 우금티, 무령왕릉, 석장리 유적, 황새울 성지 등등… 이들 중에서 무령왕릉을 제외하고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곳은 공산성과 우금티일 것이다. 실제로 이 두 장소는 공주를 대표하는 곳이다.
한편 공산성과 우금티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자.
웅진성에서 산성공원까지, 공산성의 이름 변천사 앞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있고, 뒤로는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현재의 공산성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475년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을 때 이곳은 왕성(王城)이었고, 536년 사비(현 부여)로 천도했을 때는 북방성으로 불리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백제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때, 의자왕이 있던 곳도 사비성이 아닌 바로 이곳 공산성이었다. 당나라가 옛 백제땅에 세운 웅진도독부가 있던 곳도 공산성이었다.
통일신라 시기 공주는 신라 9주의 하나인 웅천주였고, 공산성의 이름도 웅천성으로 바뀌게 된다. 공산성이 지금과 같은 '공산성'으로 불리게 된 것은 고려시대 때부터였다. 940년(태조 23년)에 지방제도를 정비하게 되는데 웅천에서 공주(公州)로 명칭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때 비로소 공산성(公山城)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된다. 공(公)자형 산에 성이 축조됐다고 하여 공산성이 된 것이다. 공산성이 자리잡은 산은 '공산'이다. 변산반도의 '변산'처럼 '공산'도 한 글자 산이다.
공산성의 현재 모습은 조선시대에 그 틀이 잡혔다고 볼 수 있다. 1602년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했다. 이후 공주는 호서지방의 중심 고을이 되었고 공산성은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토성(土城)이었던 공산성이 튼튼한 석성(石城)으로 축조된 것도 조선시대였다.
한편 1624년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피신을 왔는데 그 이후로는 '쌍수산성(雙樹山城)'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인조는 성 안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길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다 이괄이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 나무 두 그루(쌍수)에 정삼품의 작위를 내린다. 그리하여 '쌍수산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공산성에 공원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곳에서는 각종 체육대회나 야유회가 개최되었다. 그래서 일제시대에는 산성공원(山城公園)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어 조선의 궁궐을 격하시켰듯 공산성에 공원을 만들어 그 위엄을 깎아내렸던 것이다.
공산성이 수많은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그 성을 둘러싼 역사가 '드라마틱' 했다는 뜻일 것이다. 현재의 공산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벽 일부가 내려앉아 등재까지는 가시밭길이다.
공주성, 동학농민군들이 가고자 했던 그 성왕성, 웅천성, 쌍수산성 등등… 지금까지 공산성과 관련된 수많은 다른 이름들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빠진 명칭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공주성이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1894년 10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들은 논산을 출발하여 기세등등하게 북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점령하고자 했던 곳은 공주성이었다. 그렇다. 지금의 공산성인 공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진격을 했던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당시 공주는 감영이 있던 충청지방의 중심지였다. 감영은 관찰사가 주재하던 곳으로 지금으로 치면 도청(都廳)소재지이다. 조선시대 크고 작은 변란이 있었지만 이괄의 난을 제외하고는 한 도(道)의 감영이 함락된 적은 없었다.
그래서 1894년 4월 27일, 동학농민군들이 전주성을 함락시켰을 때 조선 정부는 깜짝 놀라 '멘붕'에 빠졌다. 하지만 당시 조선정부는 이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결국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을 한다.
청나라는 조선정부의 공식적인 파병 요청을 받고 아산만에 출병을 한다. 이에 일본도 텐진조약을 빌미삼아 인천으로 군대를 급파하게 된다. 그나마 청나라는 출병 요청을 받았다지만 일본군은 왜 우리 땅에 들어왔나? 들어왔으면 전주성이 있는 남도로 진격을 해야지, 왜 인천으로 향했단 말인가?
뚱딴지같은 일본의 출병은 6월 하순에 있은 경복궁 점령으로 본색이 드러나게 된다. 그들은 조선사회의 평안을 위해 이 땅을 밟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평화유지군'이 아니라 그저'침략군'이었을 뿐이다. 경복궁 점령 이후,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군을 기습하여 청일전쟁을 벌인 것을 보면 그 침략야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뒤이어 발발한 청일전쟁에 대해 동학농민군은 크게 반발했다. 그래서 2차 봉기에 나서게 됐고 공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북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우금티에서 관군(3천명)과 일본군(2천명)의 연합부대와 맞서게 된 것이다.
황량한 우금티 벌판, 어떻게 채울까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은 우금티에서 관군과 일본군 연합부대에 의해 크게 패배했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연합부대보다 병력이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죽창을 든 동학군은 개틀링 기관총 등 최신무기로 무장한 연합부대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만다. '우금티 전투'가 아닌'우금티 학살'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동학농민군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것이다.
우금티 전투는 갑오동학농민전쟁의 최정점에 위치한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농민군의 역량이 총집결하여 대규모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민군은 패배했고, 뒤이어 전봉준도 사로잡혀 한성으로 압송된다. 이렇게 갑오년의 뜨거운 함성이 메아리치는 우금티. 하지만 그 우금티를 바라보는 필자는 좀 엉뚱한 생각부터 들었다.
'음 여기서 족구 한 판 뜨면 재밌겠군!'역사적인 장소를 두고 너무 불경한 말을 한 것인가? 사실 필자는 공주여행에서 우금티를 따로 추천하지 않는다. 왜? 너무 한적하기 때문이다. 우금티에 올라서면 이곳이 역사적인 장소가 맞나, 할 정도로 황량함이 몰아친다. 그 흔한 비석조차 없다. 예전에 세워졌던 조형물들은 쓰러져 있고, 여름이면 그 사이를 잡초들이 파고 들어가 무성하게 피어난다. 잡초가 파고 들어간 조형물들을 보고 있자니 그저 안타까움만 더 커질 뿐이다.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쓰러진 농민군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1973년, 고개 아래쪽에 세워진 동학혁명군위령탑은 더 형편없어 보인다. 유신시대에 건립된 탑이라 그런지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담아낼 수 있을지 의구심부터 앞서는 게 사실이다. 또한 건립된 지 오래되어 그런지, 탑이 무척 낡아 보이기까지 한다. 실제로 탑신 중간의 벽돌이 떨어져 나가 흉해 보인다.
현재 우금티를 가장 명징하게 드러낸 조형물(?)은 바로 우금티 터널이다. 2006년에 개통된 우금티 터널은 국도 40호선의 4차선 확장 반대 투쟁의 산물로 등장하였다. 우금티를 가로지르던 기존 2차선 도로가 4차선으로 확장되면, 우금티 고개는 원형이 손상될 게 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시 공주지역 시민단체들은 도로 확장 반대를 주장하며 대안으로 터널형식을 제안하였고, 그것을 관철시켰던 것이다.
터널이 개통되었고 그 위로는 작은 벌판이 생겨났다. 일명 '우금티 벌판'.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곳은 그저 황량한 벌판일 뿐이다. 족구가 하고 싶어지는 그런 벌판인 것이다.
이 황량한 우금티 벌판을 무언가로 채워야 하지 않겠나? 언제까지 이런 역사적인 장소를 그저 쓸쓸한 공간으로 남겨둘 셈인가?
필자는 한 가지 제안을 해본다. 이 우금티 벌판에 돌로 만든 튼튼한 석상 조형물을 올려놓아 보자는 것이다. 큰 동상을 하나 세우자는 것이 아니다. 우금티를 못 넘은 동학농민군의 한을 담아 사람 크기의 동상들을 여러 개 세워보자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진시황의 병마용으로 보일 수 있는 동학농민군 동상들이 우금티 벌판을 '점령'하게 되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넘고자 했던 우금티 고개를 돌이 되어서나마 넘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책에서 배우는 것보다 직접 현장에 가서 배우는 것이 가장 좋다. 공산성이든 우금티든 한번 떠나보자. 공산성에서는 즐겁게 산성 트레킹을 해보고, 우금티에서는 갑오년 동학농민군의 결기를 느껴보자. 공산성에서는 백제시대를 떠올려 보고, 우금티에서는 구한말의 상황을 되새겨보자.
그렇게 살아있는 역사 지식을 쌓다보면 머릿속이 튼튼해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ps. 다음 편에는 공산성과 우금티를 직접 연결하여 트레킹을 할 수 있는 일명 '공주역사둘레길'에 대한 기사를 작성할 생각이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