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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기타 제조업체 콜트-콜텍의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를 당했습니다. 그 뒤로 계속된 투쟁과 농성. 지금도 그들은 인천에 있는 옛 콜트악기 부평공장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해고자 임재춘씨는 오늘도 그곳을 지키며 굵고 거친 손으로 펜을 꾹꾹 눌러 글을 씁니다. 임재춘씨가 농성장 촛불문화제에서 낭독한 '농성일기'를 연출자 최문선씨의 해설과 함께 독자 여러분들께 전합니다. [편집자말]
[기사 수정 : 19일 오전 10시 25분]


ⓒ 임재


사람이 살면서 도전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낯을 가리고 소심한 성격이다 보니 남에게 얼굴 내밀기가 싫어 새로운 시도는 하지 않았다. 말도 조리 있게 못하여 더 그럴 수 있다. 그게 내 생활이고 내가 세상을 사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성격을 바꾸려고 노력하는데 잘 안 된다. 왜냐하면 고정관념 때문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을 솔직, 정직하게 살아가면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정리해고 7년째 인천 콜트 악기 공장에서 쫓겨나면서부터 성격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이 나이에 영화관은 손꼽을 정도로 가본 적이 없고, 문화 생활은 하지 못했다. 더구나 소극장은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그러기에 연극을 하려고 한다는 애기를 들었을 때는 내 역이 들어오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다.

막상 (연극 <구일만 햄릿> 중) 오필리어 역이 주어졌을 때 생각을 많이 하였다. 솔직한 심정으로 하기 싫었다. '내가 여자 역을 어떻게 하나, 더구나 남자 목소리로 오필리어라는 순결하고 청순한 역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심을 많이 했다. 대본을 읽어보니 목소리도 안 되고 성질이 급하여 빨리 읽으려고 하니 발음도 안 되고 뜻도 모르겠고 어떻게 할지 몰랐다.

그래서 새벽 일찍 일어나 다른 사람 모르게 혼자 연습 하였다. 성질을 죽이고 천천히, 무조건 천천히, 최대한 천천히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어보니 발음이 수정되기 시작하였다. 발음이 수정되면서 대사의 뜻도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대사를 외우기 시작했다.

연출팀이 개인 지도를 해주면서도 뜻과 내용, 발음이 수정되었다. 대사를 하면서 오필리어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였다. 한 나라의 왕자를 사랑했건만 주위 사람들에게 이용당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 너무 슬프다. 여인으로 태어나 한 남자를 사랑하는 것이 뭔 죄가 될까.

"오~ 그렇게 고결한 분이 이렇게 무너지시다니. 귀인의 수려함, 기상의 칼, 석학의 교양 있던 분이었는데, 만인의 우상이었던 왕자 전하가 저렇게 변화시다니, 나 또한 이 세상에 가장 불행한 여인이 되어 과거에 봤던 눈으로 현재를 보아야 하다니…."

오필리어의 이 대목은 옛날 우리 어머니를 생각나게 한다. 옛날 우리 어머니는 모조건 희생만 하시다 젊은 나이에 일찍 돌아가셨다. 오필리어가 한 여인으로 태어나 결혼 한 번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참으로 슬프다.

연극을 하면서 사람의 감정, 표현, 억양을 많이 생각하고 배운다. 그렇기에 내가 맡은 역은 최선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작품을 하면서 이렇게 스텝(스태프)이 많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연출, 조명, 무대, 기획, 의상, 촬영, 무술, 화장 등등…. 다들 고생했다고 감사 인사를 전한다.

연극을 하면서 오필리어 의상을 입고, 화장을 하고 거울을 봤을 때, 너무 웃겼다. 사람이 화장을 하면 얼굴이 빛나는 이유를 알았다. 연극이 끝나고 한 관중이 나에게 물었다.  "왜 얼굴이 굳어 있냐?" "웃으면 대본을 까먹을까봐"라고 대답했다. 오필리어의 많은 인기는 캐릭터 자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관중이 호응을 많이 해주었기에 연기에 최선을 다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2014년 1월 21일 콜텍 해고자 임재춘

연극 <구일만 햄릿>에서 오필리어 역할을 한 임재춘 조합원.
 연극 <구일만 햄릿>에서 오필리어 역할을 한 임재춘 조합원.
ⓒ 진동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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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트-콜텍 해고자의 연극 도전기, 우린 이미 '정의'를 만났다

콜트-콜텍 해고자들이 출연한 연극 <구일만 햄릿>의 연출자 권은영의 연극계 지인은 공연 관람 후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신의 한 수!"

임재춘 조합원이 오필리어 역을 맡은 것에 대한 소감이었다. 오필리어는 공연 내내 인기 캐릭터였다. 그가 흰 옷에 고운 분칠을 하고 무대로 나오는 순간, 관객들은 "하악~" 비명을 지르고, 그의 행동과 그의 대사에 웃고 또 웃었다. 오필리어라는 배역의 특성에 임재춘 조합원 특유의 순수함이나 어눌함, 진지함이 조화를 이뤄냄으로써 관객들은 열광했다.

그는 말을 많이 더듬는 편이다. 관객들의 열광은 이른 새벽의 대본 연습과 함께 그만의 감수성과 상상력이 빛어낸 결과이다. 무엇보다 임재춘이 오필리어 역을 수락함으로써 "신의 한 수"는 이미 시작된 셈이다. 연극을 모르는 중년의 남성이 비련의 소녀 역을 선뜻 수락하기란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그는, 그들은 그만큼 자신들의 이야기를 함에 있어 용감했다.

연일 매진이었다. 2013년 10월 7일 첫 번째 공연을 시작으로 10월 14일, 22~27일 동안 총 8회의 공연이 치러졌다. 이변에 가까운 매진 행렬은 12월 17일부터 22일까지 총 6회의 앙코르 공연으로 이어졌고, 역시나 매회 객석은 꽉 찼다.

오필리어 역을 맡은 임재춘 조합원뿐만 아니라 햄릿의 장석천, 덴마크 왕 클로디어스의 이인근, 왕의 측근 플로니어스와 선왕을 맡은 김경봉 조합원은 그들에게 가장 잘 맞는 역을 맡아 매회 성장했다. 그리고 문화연대 활동가인 최미경님이 "아저씨들"과 함께하고자 왕비 거투루드를 맡아 열연하였다.

공연 연출 및 스태프 일을 두루 맡아 진행한 '진동젤리'는 '막무가내 종합예술집단'이라는 이름만큼이나 웬만해선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막무가내 정신'의 단체다. "아저씨들"이 공연 출연을 수락할 때는 매우 흔쾌했다. 하지만 연습 자세가 처음부터 성실하진 않았다.

연극 연습은 하필 무더위 한복판의 7월부터 시작됐고, 천막 농성장은 차 소리가 요란했다. "아저씨들"은 해고무효 소송 서울고법 판결을 앞두고 각종 시위와 연대활동, 콜밴(콜트-콜텍 해고자들이 만든 밴드) 공연으로 연일 바빴다. 게다가 웬만해선 말릴 수 없는 고집스러움과 뻣뻣함, 쿨하다 못해 무심에 가까운 농땡이를 종종 보여주기도 했다. '진동젤리'는 꽤나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그들 곁을 지켜가지 않았을까 싶다. 열의뿐만 아니라 담백하고 지극한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연극 대사 중 이런 말이 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 8년의 농성이 실현하고자 하는 정의는 인지상정 아닐까. 정리해고의 요건이 불충분했다면 복직이 인지상정이고, 사측이 그 책임을 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는 측은지심을 실현하는 것. 그것이 정의라면 '진동젤리'는, 특히 공동연출자인 '매운콩'과 '죠스'(권은영)는 정의로운 사람들이다. 이미 우리는 콜트-콜텍 해고자들의 연극 도전기에서, 7년 농성과 햄릿의 줄거리를 하나로 꾀어낸 '진동젤리'의 새로운 실험에서 정의를 만나본 듯하다.


태그:#콜트콜텍, #농성일기, #정리해고, #구일만햄릿, #임재춘 최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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